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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 현대사에서 인천은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교류를 한 개항장으로 그 의미가 있다. 비록 개항이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이었던 강화도 조약의 산물이었지만, 인천은 그때 합의한 부산, 원산에 이어 3번째 대외에 문을 연 항구였다.

인천은 그 위치가 수도 서울과 인접해 있어 서구 문물의 전파 속도가 빨랐고 파급력도 컸다. 가장 먼저 철도가 들어왔고 전기, 전화가 들어왔다. 다수의 외국 상인들이 인천을 기반으로 무역활동을 했다. 이미 조선 후기부터 인천은 국제 무역항의 면모를 보였다. 그 속에서 인천은 시대 변화와 함께했다.  

하지만 인천은 그 발전과 함께 일제 강점기 일제 수탈의 최 일선에 있었던 아픈 역사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경제 침탈의 전진기지였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조선에서 생산되는 많은 쌀이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향했다. 이후 인천은 식량 수탈과 경제 수탈의 전진기지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근대 거리가 조성되고 겉으로 보기는 많은 부분이 발전했지만, 그 혜택은 조선인의 것이 아니었다. 

인천의 시련은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통해 그 깊어졌다. 일제는 인천을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았고 그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기울고 그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시점에는 최후 항전을 위해  한반도를 요새화하려 했다. 제주도는 그들 본토 방어의 최 일선으로 인천은 최후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인천 도시 역사관 부평 일본육군 조병창 자료

 

 

특히, 인천 부평구 일대는 일제의 전쟁 수행에 있어 중요한 곳이었다. 일제는 그들이 일으킨 중. 일 전쟁이 중국의 강한 저항으로 장기화되자 중국 침략군에 대한 안정적인 군수 물자 지원이 필요했다. 항구가 있고 중국과 가까운 인천은 병참 지원을 위한 최적지였다.

1939년부터 일제는 부평구에 다수 군수공장을 지었고 그 규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확대됐다. 일본 육군 조병창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됐다. 그 조병창의 군수공장에서는 실세 없이 군수물자가 생산됐다. 군수공장에서는 조선에 대한 인적 물적 수탈이 자행됐다. 물자 생산의 원자재는 조선의 땅에서 공급됐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도 전시 총동원령을 적용했다. 무기 생산에 필요한 철과 금속을 위해 심지어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놋그릇도 공출 대상이 됐다. 시골에서는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기름을 만들 수 있는 송진을 채취하기도 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 확보를 위해 가져갈 수 있는 건 뭐든지 가져갔다.

이런 물적 수탈보다 더 심각했던 건 인적 수탈이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의 대상이 되고 전쟁터로 향했다. 그들은 일본군으로 공장과 탄광 등의 생산직으로 여성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렇게 해외로 간 조선인 중 상당수는 현지에서 사망했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이들도 다수였다.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인들을 의미도 없는 전쟁에서 희생됐다. 

 

방송 링크

https://youtu.be/d5k3AHdLcNM

 

 

부평구 지도

 

 

부평의 일본 육군조병창 역시 강제 징용의 역사를 품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약 만여 명의 조선인들은 모집 공고를 통해 이곳에서 일했다. 겉보기에는 일반 노동자로 보였지만, 이들의 처우는 열악했다. 급여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고 깻묵 등 식재료를 만들고 버려지는 것들로 만드는 식사는 동물 사료와 같았다. 노동자들은 굶주리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밤낮으로 일했다.

일본 및 해외에서 일했던 징용자들의 삶 그 자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해외에 아는 조국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부평의 조병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해외 징용을 피하려는 다수의 조선인들이 몰렸다. 전장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조선인들의 절박함을 일제는 노동력 수탈을 위해 이용했다.

일제는 이들은 손쉽게 모집해 고의 공짜로 일을 시킬 수 있었다. 일제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어린 학생들까지 공장의 노동자로 활용했다. 그 어린 학생들의 손으로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각종 무기와 군수물자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일제의 야욕은 진주만 중일 전쟁의 전황이 그들 뜻대로 이어지지 않고 회심의 일격으로 여겼던 진주만 폭격이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이어지면서 패망으로 길을 향했다. 한때 동남아 일대와 태평양 일대 여러 섬까지 차지하며 위세를 떨치던 그들의 세력은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과 함께 크게 줄어들었다.

미국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공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무기와 군수 물자를 생산했고 기 물자는 전력화했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 승리를 기점으로 일본은 압박해 들어갔다. 미국은 태평양 연안의 일본군 점령지를 하나 둘 잠식해 들어갔고 일본 본토로 가는 관문이 오키나와 섬을 장악했다. 일본 본토는 미국 폭격기들의 대규모 공습에 초토화됐다.

 

 

 

 

인천 도시 역사관 일제 강점기 자료

 


더 이상의 희생을 막는 길은 항복이었지만, 일본은 결과가 보이는 무모한 항전을 지속했다. 한반도 역시 그들의 항전을 위한 기지로 사용됐다. 일제는 항전을 지속하기 위해 각종 군사시절과 생산 시설의 지하화를 추진했다. 
제주도 해안 일대에는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지하 벙커가 다수 건설됐다. 자폭용 개인 보토를 위한 해안 동굴도 만들어졌다. 

부평의 일본 육군 조병창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패망이 인접한 시점에 조병창의 생산시절 지하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부평구의 함봉산 자락에 수십 개의 지하호를 구축했다. 일제는 그곳에 방공호나 군사 기지가 아닌 생산시설일 이전해 생산을 지속하려 했다. 미국의 폭격에 대비하는 지하공장이었다. 

일제는 지하호 공사를 위해 다수의 조선인들을 인부로 활용했다.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없는 강제 징용이었다. 그들 중에는 나이 어린 학생들이 다수 포함됐다. 조병창 공장보다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 땅굴 시공을 위해 수차례 폭탄이 폭발되는 위험 속에서 조선인들은 일했다. 그 수는 무려 수십 개에 이른다. 

이런 일본 육군 조병창과 지하호의 존재는 일본군의 극비 문서가 세상에 공개되고 나서야 그 실체를 알 수 있었다. 해방 후 일본 육군 조병창 부지는 주한 미군이 주둔했고 우리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부대 안에 있는 일본 육군 조병창에 접근할 수 없었고 이를 아는 이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지하호 역시 그 역사를 모른 채 새우젓 보관소로 이용됐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 수탈과 강제징용, 전쟁의 역사를 담은 장소는 수십 년 세월을 망각의 시간 속에 머물러야 했다. 

이곳의 존재가 가시 부각된 건 미군 기지의 이전이 결정된 이후였다. 평택에 대규모 미군 기지가 건설되면서 용산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 미국 기지 대부분이 평택으로 이전했다. 미군들이 주둔했던 부지가 드디어 지역민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평구의 일본 육군 조병창 부지에는 일제가 건설한 공장과 창고 등 건물들이 남아있었다. 여기에 당시 일본군의 자료가 더해지며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지역의 역사학자들과 관련 기관, 언론과 방송에 일본 육군 조병창이 소개되면서 많은 이들도 그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을 모른 채 이용되던 함봉산의 지하호도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 받았다. 

의미 있는 역사 현장이지만, 일본 육군 조병창은 개발과 보존의 논란에 휩싸였다. 해방 후 미군 기지를 제외하고 그 일대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이 진행됐다. 미군 기지에 남아있는 당시 건물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공론화됐다. 자랑스러운 역사 유적도 아닌 조병창의 흔적을 지우고 개발하자는 쪽과 아픈 역사지만 의미 있는 장소이니 만큼 보존하자는 주장이 대립했다.

 

 

부평 지하호 안내도 - 부평문화원

 

 

부평 지하호 - 부평문화원

 

 

부평 지하호 - 부평문화원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개발과 보존을 논하기 이전에 미군 주둔 지역의 심각한 오염이 그것이었다. 용산의 미군 기지에서도 나타난 문제지만, 수십 년간 아무 통제 없이 사용된 미군 기지는 각종 발암물질을 포함해 오염의 정도가 심각하고 상당 기간 정화작업이 필요하다. 부평구의 미군 기지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부평구 미군 기지는 반환을 받고도 사용까지 또다시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 사이 근대 역사 유적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고 지역 역사학계와 문화원 등의 노력이 더해지면서 보존에 대한 지지가 늘었다. 지역의 문화재로서 이를 바탕으로 그 일대는 공원으로 활용하는 게 지역민들에게 더 큰 이익이 될 수 있기도 하다. 또한, 최근 한일 관계에 큰 전환점이 된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이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이해가 커진 것도 부평구 일본군 조병창과 지하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역사의 흐름 속 중요한 장소를 찾아 그 의미와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TBS의 '역사 스테이 흔적'에서 인천 부평구 일대 일제 강점기 역사 현장인 일본군 병참 기지였던 조병창과 일제가 건설한 지하호를 찾았다. 특히, 방송에서 잘 소개되지 않았던 지하호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 옛날 중장비도 제대로 없는 시절 어린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흙과 돌을 나르며 만들었던 지하호에는 일제 강점이 고난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곳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고 당시 어린 학생이었던 지금은 노년의 나아가 된 강제징용 피해자의 증언은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방송을 통해 부평구의 일제 강점기 역사의 흔적들이 재조명됐다. 일제 강점기 역사와 관련해 소중한 장소를 알 수 있었다. 이 역사의 장소가 잘 보존되고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이들에게 소중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그리고 역사 공원으로 더 많은 이들이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사진 : 프로그램, 부평문화원 / 인천역사박물관 / 픽사베이/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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