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장영실이 주도하는 격물 진흥 정책의 성과는 눈부셨다. 조선은 더는 명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천문 연구가 가능해졌고 다양한 발명품들은 백성들의 삶을 더 풍요롭 게 하는데 이용됐다. 특히,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의 보급은 상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이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격물 연구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기득권 세력인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는 커져만 갔다. 세종을 중심으로 한 열린 사대부 세력들이 격물 진흥 정책을 뒷받침했지만, 대다수 사대부들에게 격물진흥은 체제를 위협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흔들게 하는 일로 여겨졌다. 실제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진다면 이와 비례해 지식의 습득이 보다 쉬워질 수 있고 이는 사대부들이 독점..
부친 장성휘의 죽음과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명나라행의 실패로 실의에 빠진 장영실은 부친인 장성휘의 절친한 벗이었던 이천과 한양으로 향하게 된다. 관노의 신분이었던 장영실로서는 자신의 명나라행을 막은 이천의 처분에 따라 자신의 거취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장영실은 한양으로 가는 도중 수 차례 도망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천의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을 접었다. 이천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혼란기에 자신의 가문이 조선 태조 이성계 의해 멸문되다시피 한 아픔이 있었다. 누구보다 조선 왕조에 대한 증오심이 큰 그였다. 이천은 그 마음을 억누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조선 건국에 힘을 보탰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이천..
갖은 설움 속에 유년기를 보냈던 장영실은 청년이 되어서도 노비라는 신분의 굴레 속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손재주와 천문을 읽어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지만, 어디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장영실은 노비로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서 자신만의 천문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장영실은 그의 절친과 함께 숲속에 비밀 움막을 짓고 연구 성과물들을 기록했다. 이는 그의 부친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나름 큰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장영실은 자신의 모친이 억울하게 군관에게 죽임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아들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며 그를 애써 외면하는 부친과 부자의 정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장영실은 그럴수록 비밀 연구에 매진했다. 연구의 성과물인 혼상을 명나라와 일본을..
장영실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물건을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여기에 천문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이는 그의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장영실은 부친 장성휘는 고려 때부터 기술직 관리로 능력을 인정받았고 천문과 관련한 일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는 천문 과학자였다. 왕조가 바뀌었어도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성휘는 고려가 이후 등장한 조선왕조에 협력하고 않았고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기생있었던 장영실의 모친을 만났고 장영실을 낳았다. 분명 장영실은 양반의 자손이었지만, 부모 중 한명이라도 천민이면 그 자녀 역시 천민이 되는 제도에 얽매여 관청의 노비로 살아야 했다. 당시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취급됐다. 그런 노비에게 일 외에 다른 분야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