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장영실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물건을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여기에 천문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이는 그의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장영실은 부친 장성휘는 고려 때부터 기술직 관리로 능력을 인정받았고 천문과 관련한 일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는 천문 과학자였다. 왕조가 바뀌었어도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성휘는 고려가 이후 등장한 조선왕조에 협력하고 않았고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기생있었던 장영실의 모친을 만났고 장영실을 낳았다. 분명 장영실은 양반의 자손이었지만, 부모 중 한명이라도 천민이면 그 자녀 역시 천민이 되는 제도에 얽매여 관청의 노비로 살아야 했다. 당시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취급됐다. 그런 노비에게 일 외에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린 장영실은 이런 현실에서 하늘의 별자리를 지켜보는 것을 즐겼고 자신의 방법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즐겨했다. 이런 장영실에 부친과의 만남은 더 큰 꿈을 꾸는 계기가 됐다. 그의 부친 장성휘는 장영실의 재능을 읽고 천문과 관련한 서적을 그에게 주었다. 장성휘는 노비 신분인 장영실이 그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음을 알았지만, 그의 희망을 잃게 할 수 없었다.







장성휘는 가문의 제사에 장영실과 함께 가면서 장영실이 장씨 가문의 일원임을 알렸고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부자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모친과 함께 노비로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던 장영실로서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장영실은 부친을 통해 천문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가지게 됐고 과학자로서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장영실이 희망을 키워가고 있을 즈음 조선의 궁궐은 깊은 근심에 쌓여 있었다. 형제와 개국공신들과의 피를 부르는 치열한 권력 암투를 이겨내고 왕위에 오른 조선 제3대왕 태종 이방원은 왕위 찬탈자라는 오명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던지고 싶었다. 아직도 고려왕조를 따르는 세력이 상당수 존재하는 상황에서 왕권 확립이 시급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태종은 천문현상을 이용해 왕권의 존엄함을 세우려 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일식과 월식을 사전에 예측하고 그 시간 하늘에 제를 올릴 수 있다면 하늘의 이치를 헤아리는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직후 일식일자가 천문과 기상 풍수를 관장하는 관청인 서운관에서 예측됐다. 태종은 일식일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서운관의 예측은 빗나갔다. 일시는 일치했지만, 일식의 장소는 조선의 남쪽에 국한됐다. 태종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각 장영실과 그의 부친 장성휘는 그들의 고향이 부산 동래에서 일식을 관측하고 있었다. 장성휘는 전국 각지를 돌며 천문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일식의 일시와 장소를 유추했다. 그는 왕이 있는 도성에서 일식을 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장영실은 이런 부친의 모습에서 또 한 번 경외감을 가지게 됐다. 


이들과 함께 일식을 목격한 장성휘의 절친 서운관 관리 이천은 이 사실을 태종에게 알렸고 장성휘가 예측한 월식일도 함께 알려졌다. 장성휘의 예측은 서운관의 예측과 차이가 있었다. 태종은 장성휘의 예측을 따르기로 하고 제를 준비했다. 당시 조선의 천문연구는 중국의 기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은 부분도 상당수 존재했다. 태종은 이런 행태에 불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이 장성휘의 일식 예측을 따르기로 한 건 일식 예측에 실패한 서운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것과 더불어 자주적 천문연구에 대한 갈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태종의 기대와 달리 장성휘의 월식 예측은 들어맞지 않았다. 그가 남겨준 자료를 연구하다 월식일이 틀릴 수 있음을 알게된 장영실은 이를 알리려 했지만, 노비 신분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태종은 또 한번의 하늘의 버림을 받은 임금이 되면서 좌절해야 했다. 장영실 역시 노비의 신분으로 천문을 연구한 것을 이유로 모진 고초를 겪게 된다. 


장영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장영실은 더욱더 천문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청년이 되어서도 온갖 멸시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노비의 삶은 힘겹기만 했지만, 장영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다양한 발명품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천문 연구도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최하층에 자리한 장영실이 꿈을 펼치기에 조선은 너무나 제약이 많았다. 


장영실은 외국으로 떠날 것을 소망했고 그 준비를 꾸준히 했다. 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엄연히 노비 신분이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장영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서 현실에서 벗어나야 했다. 특히, 천문 연구에 있어 선진국인 명나라는 그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장영실은 지인의 도움을 얻어 명나라로의 밀항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청년 장영실에게는 희망을 지키고 키워나가기 위해 현실에서 탈출은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를 옭아매고 있는 신분제의 장벽은 결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장영실이 노비의 삶에서 벗어나 더 큰 꿈을 꿀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분명한 건 그가 떠나던 그렇지 않던 앞으로의 일들은 시련이 연속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진, 글 : 심종열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