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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스를 살펴보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이슈 중 하나가 바다와 관련한 영토분쟁이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독도를 둘러싼 공방이나 중국과 일본, 미국, 동남아 국가까지 엮여있는 남중해 문제도 풀리지 않는 갈등 중 하나다. 과거에는 우리가 밟고 사는 땅과 관련한 영토분쟁이 주를 이루었던 것과는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만큼 해양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해양에는 육지에서 고갈되어 가는 각종 자원이 풍부하고 해상을 이용한 안정된 운송로 확보를 위해서도 해양영토의 확보가 중요하다. 강대국들이 해군력 증강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 있다. 이런 주변국들의 해양영역 다툼 틈바구니에서 우리도 고군분투중이지만, 힘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우리의 현실과 달리 과거 통일신라 시대 우리 연근해 바다를 지배하며 중국과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 교역을 주도했던 인물이 있었다. 과거 드라마로도 소개됐던 장보고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골품제라는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평민 신분으로 태어나 해상 무역을 주도했던 지역의 실력자로 이름을 떨쳤던 입지전적이고 드라마 같은 삶을 산 인물이었다. 





장보고가 태어나고 자라던 통일신라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다. 삼국을 통일하고 평화시대를 연 신라는 이후 지도층의 권력다툼이 심화하면서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왕위를 둘러싼 정변이 계속 이어졌고 국가 시스템은 사실상 붕괴했다. 그 사이 힘있는 귀족 등 권력자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고 더 많은 이권을 얻기 위해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들에게 백성들은 그저 자신들의 부를 채워줄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연히 민생은 점점 깊은 수렁에 빠졌다. 사회 곳곳에 비리가 난무했다. 백성들은 중앙 정부와 관리, 그리고 중앙의 통제가 느슨한 사이 힘을 얻은 지역의 호족들에게 2중 3중으로 수탈을 당하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살기 위해 외국으로 목숨을 걸고 떠나기도 했다. 


장보고 역시 어린 나이에 신라를 떠나 당나라에서 새 희망을 찾았다. 어려서부터 궁술 등 무예가 능했던 장보고는 당나라의 용병군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고 장군의 칭호까지 얻었다. 당시만 해도 당나라는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 국가였다. 당나라는 관직을 개방하는 등 이민족들에게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장보고는 이런 당나라에서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하지만 장보고는 당나라가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등 혼란에 빠지고 용병군이 폐지되는 와중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장보고는 살기위해 떠났던 고국 신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당나라 장군 출신이라는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일종의 증명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신라 왕실에 당시 해안지방을 수시로 약탈하던 해적 소탕을 이유로 이를 막을 군사거점을 마련할 것을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 


장보고는 자신들이 양성한 군대로 해적들의 격퇴하는 한편,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이라는 일종의 해군 기지를 건설했다. 이곳에서 장보고는 당나라, 신라, 일본과 연계한 중계무역을 활발히 진행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강력한 군대가 주둔해 해적의 위협이 없었던 청해진은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청해진의 성공을 바탕으로 장보고는 중앙정부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의 호족으로 자리했다. 독립적인 청해진 운영이 가능해지자 장보고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등 독자적 세력 확장을 하는 한 편 당나라에까지 자신의 영역을 확대했다. 사실상 그가 주도하는 해상왕국이 생긴 것이 다름없었다. 


장보고의 성공은 영원하지 않았다. 장보고의 강력한 힘은 필연적으로 당시 신라의 권력 다툼 속으로 그를 이끌었다. 장보고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무력충돌에 개입했고 자신이 지지하는 왕을 옹립하는데 까지 성공했다. 그의 권력이 지역을 넘어 신라 중앙정치까지 주도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비대해진 권력을 염려한 왕과 반대파는 그를 은밀히 암살했고 장보고가 평생에 거쳐 이룩한 청해진 역시 순식간에 와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846년의 일이었다. 


이렇게 장보고는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이름도 없는 시골 소년에서 신라와 중국,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친 인물이 됐다. 혼란 스러운 신라의 정세가 그에게는 기회로 작용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장보고는 혼란한 신라의 정치 사항에 휘말리며 그의 해상왕국을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난세에 나타난 영웅의 안타까운 몰락이었다. 


이제 장보고는 역사에서 남은 기록과 흔적만 남은 청해진 유적지로만 그 발자취를 알 수 있는 인물이다. 만약 그가 어이없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는 건 강대국 사이에서 해양으로 뻗어 나가기 힘겹기만 한 우리 현실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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