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2월 궁궐에서 상궁들이 타는 가마 하나가 궁 밖을 나가 긴박하게 어느 장소로 이동했다. 그 가마가 향한 곳은 당시로는 아라사라 칭하던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그리고 그 가마에 타고 있는 인물은 조선의 임금 고종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인 아관파천의 시작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194회에서는 고종의 아관파천의 의미와 전개 과정을 다뤘다. 아관파천은 1894년 청. 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노골화된 일본의 조선 국권 침탈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심의 선택이었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친일 내각과 궁궐 수비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항상 신변의 위협을 걱정해야 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고종으로서는 일본의 간섭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
서인 정철과 윤두수가 주축이 된 세자 책봉을 둘러싼 비밀 회합은 선조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서먹한 자리가 된다. 선조는 서인의 영수 정철과 윤두수, 동인의 영수 이산해, 류성용에게 붕당 간의 대립에 대해 경고했다. 선조는 강력한 왕권을 신하들이 뒷받침해줄것을 은연중 내비쳤다. 당연히 선조의 후계자, 즉 세자 책봉을 위한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하지만 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왕권을 원하는 선조와 정치적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신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차세대 권력이 필요했다. 그들은 미래 권력만큼은 서인의 정치 성향과 맞는 인물이 필요했다. 서인이 원하는 세자 후보는 광해군이었다. 서인은 이러한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동인과 관계에 있어 유화책을 펼쳤다..
격물 진흥 정책을 위해 던진 세종의 승부수가 적중했다. 세종이 공언한 대로 장영실과 서운관 관리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일식의 일지와 일시는 정확히 예보했다. 세종은 역대 가장 정확한 시간에 구식례를 거행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격물진흥 정책에 대한 조정의 반대 여론은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추가적인 격물 진흥 정책도 탄력을 받게 됐다. 이 과정에 큰 위기가 있었다. 누적된 기록 부족으로 고심하던 장영실과 학자들은 일식 일자는 예보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일시는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이들은 과거 조선 비밀 천문연구과정에서 작성된 기록을 떠올렸다. 그 기록은 당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장희제에 의해 보관되어 있었다. 장희제는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그 기록을 가지고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