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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194회] 자주독립국을 위한 고종의 승부수, 아관파천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18. 11. 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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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궁궐에서 상궁들이 타는 가마 하나가 궁 밖을 나가 긴박하게 어느 장소로 이동했다. 그 가마가 향한 곳은 당시로는 아라사라 칭하던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그리고 그 가마에 타고 있는 인물은 조선의 임금 고종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인 아관파천의 시작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194회에서는 고종의 아관파천의 의미와 전개 과정을 다뤘다. 

아관파천은 1894년 청. 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노골화된 일본의 조선 국권 침탈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심의 선택이었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친일 내각과 궁궐 수비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항상 신변의 위협을 걱정해야 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고종으로서는 일본의 간섭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고종은 그 방법으로 당시 우호적 관계에 있었던 강대국 러시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친러 대신들의 도움 속에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벗어나 경복궁을 떠나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조선의 국왕이 러시아 영토로 사실상 망명을 할 것과 같았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곧바로 친일 내각의 각료를 해임하고 친러파 내각을 구성했다. 그 과정에서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백성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망명을 떠나야 했다.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각지에서 항일 의병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반일 감정이 극대 달한 시점에 고종의 아관파천은 백성들의 지지와 동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주춤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은 친 러시아 외교를 강화했다. 고종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러시사 황제 즉위식에 민영환을 중심으로 한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유대 강화에 공을 들렸다. 민영환 일행은 일본, 미국, 유럽을 거치는 수개월에 이르는 여정을 거쳐 러시아 황제 즉위식에 참여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서양의 발전상을 경험했고 그들에게는 파격적인 서양 문화를 접했다. 사실상 세계 일주와 같은 과정을 거친 사절한 일행은 부국강병이라는 중요한 목표를 가슴에 품게 됐다. 사절단 일행을 이와 동시에 러시아와의 밀접한 외교 관계를 구축하기 위하 비밀 협의를 진행하고 일부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유착은 필연적으로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불러왔고 국가의 자주성이 더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립국가로서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아관파천이었지만, 또 다른 외세의 내정 간섭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외세 의존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힘든 이유기도 하다. 이런 비판에도 아관파천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1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나왔다. 그는 거리의 불빛을 모두 켠 채 거대한 왕의 행렬을 이끌고 지금의 서울 조선호텔 자리에 위치한 원구단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고종은 대한 제국의 시작을 하늘에 고했다. 원구단은 과거 청나라 사진이 머물던 건물이 있던 자리로 고종은 그것에서 수천년을 이어온 중국과의 사대 관계가 끝났음도 함께 선언했다. 

이후 고종은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소실되었을 당시 선조가 행궁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고종이 거쳐를 옮길 당시 전각의 2채 정도 남아 있는 초라한 곳이었다. 고종은 그곳에서 근대식 건물을 다시 지으며 황제 국가의 궁궐로 발전시켰다. 마침 경운궁은 주변에 다수의 서양 공사관이 입지하고 있어 그의 안전을 확보하기도 용이했고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에도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세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병행했다. 이를 통해 대외적으로 대한 제국이 지주적인 독립국가임을 인식시키려 했다. 분명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나라의 재정은 열악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고종은 외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1900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공식 참가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자리로 만들었다. 당시 조선의 문화재와 풍습, 의복과 음식은 서양인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오기도 했다. 고종은 지속적인 외교활동으로 대한 제국의 존재감을 높이려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힘없는 대한 제국의 슬픈 운명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우선, 전 세계적으로 그 모습이 사라져가는 황제 중심의 전제 군주제를 고집한 것부터가 한계였다. 이미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제 군주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 체재였고 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나라의 각종 이권이 서양 열강과 일본 등에 넘어간 상황에서 독자적인 국가 운영에 한계가 있었다. 사실상 빈 껍데기뿐인 제국은 나날이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종으로서는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수립을 통해 기울어진 국운을 회복하고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어내랴 했지만, 강대국의 입김에 자유롭지 못한 현실과 일반 대중과 다소 동떨어진 황제의 노력은 한계가 분명했다. 이렇게 고종의 승부수는 점점 그 힘을 잃어갔고 대한 제국은 패망의 길로 점점 다가섰다. 

다만,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다시 세우려 했던 고종의 노력은 분명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가 수립한 대한 제국은 국가의 성격은 다르지만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우리 역사상 유일한 황제의 나라였던 대한 제국과 최초의 황제 고종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할 수 있다. 


사진 : 역사저널 그날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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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7 05:41 신고
    역사저널...고종이야기로군요.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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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7 07:37 신고
    대한제국이 쓰러져 가는 시기에
    왕위에 올라 있었으니
    고종에 대한 평가가
    폄하된 점이 없잖아 있을 겁니다.
    고종 때문에 망한 건 아닌데 말입니다.
    시대의 급류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나라도 쓰러져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역사가 그걸 증명해 보여주고 있지요.

    역사저널 재미나게 보던 프로그램인데
    요즘은 잘 안 봤습니다.
    하지만 193, 194회만이라도 다시보기를 해서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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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8 07:34 신고
    늘 아쉬운 근대사입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