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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교양 예능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 85번째 강의 주제는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조선의 왕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각종 기행과 함께 타락한 군주로 지금도 냉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산군은 잔인한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그에 대한 이미지를 더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연산군의 아버지는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성종이었다. 성종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제도를 완성했고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군주였다. 그는 대신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자리인 경연에도 적극 참석하는 등 강력한 왕권 하에서도 소통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성종의 뒤에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상당한 어머니 인수대비가 있었다. 인수대비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의 막후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성종이 장성하여 친정을 한 이후에도 인수대비의 영향력을 상당했다. 

이런 인수대비의 힘은 결과적으로 연산군의 비극을 불러왔다. 연산군은 성종과의 불화로 폐서인 되고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폐비 윤씨가 모친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아주 어렸을 때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대신 연산군은 적장자로서 순탄하게 차기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했다.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적장자의 왕위 계승은 큰 의미가 있었다. 가장 정통성이 확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그의 아버지 성종은 연산군의 잘못에도 너그러움을 보이며 그를 각별해 대했다. 






성종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와 관련해 절대 언급하지 않도록 교시를 내렸다. 이는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분란을 차단함돠 동시에 세자의 왕위 계승에 있어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이렇게 생모의 죽음에 대해 잘 몰랐던 연산군은 성종이 승하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연산군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일이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를 폭군으로 이끌었을 가능성도 크다.

연산군 시대 사림파들이 대거 숙청당한 2차례 사화인 무오사화와 갑자사회가 그의 생모의 죽임과 관련한 이들에 대한 원한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많은 이들이 생각이다. 하지만, 무오사화의 중요 원인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었다. 당시 훈구파는 성종 시대 이후 세력이 커진 사림파를 견제해야 했다. 그들은 사림파들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사림파를 탄핵했다. 

연산군은 왕의 견제기관인 사헌부, 사간원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사림파들이 탐탁지 않았다. 연산군은 이들을 왕권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여겼고 훈구파의 탄핵은 이들을 제거할 중요한 빌미가 됐다. 연산군은 다수의 사림파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냈고 그 세력은 급격히 줄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통해 폐비 윤씨의 사사를 주도했던 세력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그 대상은 사림파에 그치지 않고 훈구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훈구파 내에서도 폐비 윤씨의 사사와 관련한 이들은 숙청을 피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 세조의 왕위 찬탈 때부터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한명회는 부관참시 당하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연산군은 또한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들이 낳은 왕자들을 잔인하게 사사했고 그의 할머니 인수대비를 겁박하였고 그 충격으로 병중에 있던 인수대비는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궁중의 어른에 대한 제사를 3년 상으로 하던 관례를 깨고 25일 만의 인수대비의 장례를 끝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모에 대한 복수라고 알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저지른 폐륜 행위는 그에 대한 폭군 이미지를 더 각인시키는 이유가 됐다. 프로그램에서도 그 인식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하지만 2번의 사화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한 견제가 주요한 이유였다.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 문제는 이를 위한 하나의 불쏘시개였다. 이를 통해 연산군은 역대로 가장 강력한 왕권을 구현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연산군이 절대 권력을 무분별하게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연산군은 기행을 일삼았고 사치와 향락 유흥에 빠져 상당한 국고를 소진했으며 방탕한 생활로 지탄을 받았다. 2차례 사화 이후에도 연산군은 그에 직언을 하는 관리들을 사사하는 등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임사홍과 같은 간신들이 권력에 중심에 서고 기생 출신의 장녹수가 비선 실세로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연산군은 일반 백성들의 민심도 그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반정의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고 말았다. 

물론, 그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은 반정으로 그를 축출한 세력들에 의해 과장된 면도 있다. 프로그램에서 다뤄지지 않았지만, 연산군은 집권초 변방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제도를 정비하는 등 치세에 대한 업적이 없지 않았다. 그가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일반 백성들의 주거를 강제로 철거해다는 이야기도 궁에서 백 척 이내 땅에 민가가 들어설 수 없는 국법에 따른 조치였고 이에 대한 보상과 이주 대책이 이루어졌었다. 즉, 연산군의 악행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산군이 조선의 국가 시스템을 파괴하고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절대 권력을 위해 그 반대 세력을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독재자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그의 개인적인 복수와 유흥을 위해 사용했고 그 폐혜는 상당했다. 이는 당시 권력에 중심에 있었던 훈구세력들의 반발까지 불러왔고 급기야 조선 최초로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에 의해 축출되는 군주가 되도록 했다. 

이를 프로그램에서는 탄핵당한 군주로 표현했다. 신하들과 백성들의 민심을 잃은 연산군은 반정 세력에 변변히 대응하지 못했고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후 연산군은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얼마 안가 병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1살 때였다. 연산군의 사례는 부패한 권력은 무너질 수밖에 없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후 조선은 신권이 강화되었고 이는 붕당 정치로 발전했다. 연산군 이후 어느 임금도 그만큼의 권력을 가진 이는 없었다. 이는 프로그램이 주는 중요한 교훈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의 악행과 폐륜, 실정에 대해 한정된 시간 탓인지 단편적인 부분만 언급되었고 당시 정치적 상황 등 그 배병이나 이면의 이야기, 연산군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지 못한 건 작은 아쉬움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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