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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은 조선의 임금 고종이 궁궐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을 일종의 망명을 한 아관파천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과 함께 독립협회가 설립된 연도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었고 독립협회는 일반 대중들이 참여한 자주독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했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5회에서는 독립신문의 창간에서 시작해 독립협회의 활동 그 의의를 다뤘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거사가 실패한 이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서재필이 창간을 주도했다. 서재필은 당시 개화파 정치 세력을 주도하고 있던 인사들의 후원 속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서재필과 개화파 인사들은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있음을 공감했다. 그들은 대중들을 계몽하고 근대사상을 전파할 수단으로서 신문 발행을 착안했다. 

그들은 임금인 고종과 방송에서는 상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일본의 지원, 당시 정동 일대를 중심으로 외교가의 내. 외 인사들의 후원을 얻어 1896년 4월 7일 최초의 신문을 발간했다. 독립신문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한글 신문으로 기사의 한 면은 영문으로 인쇄하여 외국인들에게도 우리의 소식을 알렸다. 






독립신문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뜨거웠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에도 조선시대 내내 언문이라고 칭해지며 천대받았던 한글로 만든 신문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독립신문에 구독 열기가 상당했다. 독립신문은 근대화 사상과 함께 자주독립 사상을 보다 알기 쉽게 전달했고 중요한 정책과 사안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대중을 계몽하는 대 큰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은 이 과정에서 당시로는 획기적인 광고를 개재해 운영자금을 충당하는 등 독립 운영을 위한 시도도 함께 했다. 

독립신문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정부와 일본 등 외부의 도움에 크게 의지하면서 독립적 운영에 한계가 있었지만, 우리 한글도 보다 더 대중들에게 다가선 활자 매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다. 독립신문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은 이어진 독립협회 설립과 운영에도 큰 힘이 됐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을 중심을 설립된 독립협회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시민단체였다. 독립협회는 초기 사교적 단체로 시작했지만, 이후 일반 대중들이 참여하는 시민단체로 그 성격이 확장됐다. 독립협회는 민중계몽과 함께 나중에는 국민들의 참정권 주장과 함께 입헌군주제로의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등 개혁세력을 대표하는 일종의 정당적 성경까지 띄게 된다. 

독립협회는 이름 그대로 당시 서구 열강들에게 이권을 침탈당하는 등 자주성이 흔들리고 있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으로 발전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독립문은 그들의 의지를 표현한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물론, 한계점은 있었다. 독립협회 중요 인사들 중 상당수는 정부 관리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관변 단체의 성격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여기에 정부 관료들 중 상당수는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외세 의존성이 강한 인사들이 상당수존재했다. 한때는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도 독립협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정도였다. 그들의 세운 독립문도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주성을 표현하는 건축물이라 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다. 

이런 독립협회가 보다 더 대중들과 가까워진 계기는 만민공동회를 비롯한 대중 집회를 활발히 열면서 일반 대중들과 활발히 소통하면서부터였다. 만민공동회는 단순한 집회가 아닌 중요 현안에 대한 공론화와 함께 여론 조성의 장이었고 일종의 참여 민주주의 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민 공동회의 규모는 커졌고 참여자들 역시 크게 늘었다. 이와 동시에 독립협회의 발언권도 한층 강화됐다. 

독립협회는 이후 고종의 환궁과 대한제국의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고 서구 열강들의 국권 침탈에 대한 강한 저항 운동을 통해 일부 성과를 내기도 했다. 독립협회를 통해 대한제국은 자생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중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역사의 주역으로 나섰다는 점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프로그램에서도 그 의미를 크게 다뤘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은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주장은 전제 군주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고종에게는 큰 위협으로 느껴졌다. 이미 고종은 자신에 대한 독살 미수 사건의주범에 대한 처벌에 있어 전 근대적인 연좌제를 반대하는 독립협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종에게 독립협회는 일종의 반대 정치세력이었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내놓은 중추원 설립을 통한 의회 구성안에 합의 한 직후 독립협회를 강하게 탄압했다. 그 이유는 독립협회가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한 공화정을 설립한다는 이유였다. 물론,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가짜 뉴스였다. 이는 수구세력들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모함이었다. 고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상설 개최하고 계속된 철야 집회로 맞섰지만, 수구 세력을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황국협회를 통하 폭력사태를 유발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독립협회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독립협회는 1899년 해산되는 비운을 맞이했고 독립신문 역시 운명을 함께 했다.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했던 서재필 역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로써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대중 운동은 그 싹을 다 틔우기도 전에 힘을 잃었다. 이는 분명 대중들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을 무시한 처사였다. 고종은 전 근대적인 전제 군주제를 고집하면서 대중들의 정치 참여와 함께 민주적 정치제도로의 정치개혁을 끝내 거부했다. 

고종은 격변기에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가 효율적이라 여겼을 것으로 보이지만, 봉건제적 사상을 버리지 못한 한계점을 노출했다. 독립협회 역시 대중들을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여기기보다는 계몽하고 자신들이 이끌어야 하는 약한 존재로 여겼다. 고종과 독립협회 모두 대중들의 힘을 과소평가했고 정치권력 다툼 속에서 외세에 대응한 내부 역량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만약 독립협회의 운동이 수용되고 대한제국이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이 작동하는 나라가 되었다면 나라를 일본에 강탈당하는 비운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낮아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열었던 만민공동회를 통해 시작된 광장 민주주의는 이후 3.1운동과 6.10. 만세운동으로 이어졌고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에 저항한 4.19. 의거, 부마항쟁, 광주민주화 운동 6월 항쟁, 최근에는 국정 농단 세력을 끌어내린 촛불 혁명으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당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참여 민주주의 정신과 역량은 역사를 통해 쌓였고 불의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표현됐다. 그 점에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할 수 있다. 역사저널 그날 195회에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점을 잘 짚어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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