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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시시 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 86회에서는 조선에서 탄핵된 군주 2번째 이야기로 광해군을 다뤘다. 광해군은 과거 역사에서 폭군으로 간주되고 평가 절하된 군주였지만, 최근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상당수가 그를 임금에서 축출한 서인 세력들에 의해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에 대한 역사 기록이 과연 객관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문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차이나는 클라스에서는 광해군에 대한 긍정, 부정적 모습을 모두 다뤘다. 

광해군은 유년시절부터 영특하고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선조의 아들 중 광해군은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아버지 선조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저했다. 광해군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중전의 소생이 아니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선조는 자신 역시 장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붕당 정치가 본격화된 상황에서 왕권이 약해지는 것에도 부정적이었다. 

선조로서는 장자를 세자로 책봉해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고 왕권을 보다 더 굳건히 하고 싶었다. 선조는 사림파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강해진 신권이 달갑지 않았다. 선조는 동인과 서인을 나뉜 붕당정치 구조를 활용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런 선조에게 신하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광해군은 일종의 정적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광해군은 왕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음에도 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던 광해군에게 임진왜란은 중요한 기회였다. 임진왜란 초기 대비가 부족했던 조선은 일본군의 공세를 막지 못했고 전 국토에 전쟁에 휩싸였다.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의 대응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결국, 선조는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하는 처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선조는 위급한 국가 상황에서 세자 자리를 더는 비울 수 없다는 신하들의 요청을 더는 거부할 수 없었다. 






광해군은 전란의 혼란 속에 성대한 의식도 없이 급히 세자에 책봉됐다. 이후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는 와중에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의 임무를 맡겼다. 이는 조정을 둘로 나눠 전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조치였는데 세자에 오른지 얼마 안 된 광해군에서 최전선에서 조정을 이끌도록 하는 처사는 무책임한 일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국가 경영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광해군으로서는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광해군은 일본군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최 전선에서 일본군의 전쟁을 이끌었다. 광해군은 의병활동을 독려하고 군수 물자를 확보하는 한편, 무너진 행정 시스템을 복원했다. 세자가 최전선에서 적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선조를 비롯한 조정에 실망했던 백성들에게는 희망을 주었다. 광해군의 전쟁 대처와 위기관리 능력은 그의 정치적 기반을 더 공고하게 했다. 당연히 세자로서의 입지도 단단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이 선조를 뒤를 차기 권력이라는 점은 기정사실과 같았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아버지 선조가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여기에 명나라의 세자 책봉 승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입지가 흔들렸다. 명나라와 사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세자 책봉, 왕위 계승에 있어 명나라의 승인이 필요했고 이는 왕의 정통성 확보에 있어 필수적이었다.

이에 더해 뒤늦게 중전을 얻은 선조가 아들을 얻으면서 광해군의 세자 지위는 더 흔들렸다. 선조가 그토록 원했던 정실부인으로부터의 아들은 장자 상속이라는 원칙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성리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장자 상속의 명본을 얻은 선조의 늦둥이 아들 영창대군은 왕위 계승에 있어 중요한 변수가 됐다. 대신들의 여론도 점점 영창대군으로 쏠렸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은 어느새 소수파로 전락했다. 

이런 광해군에게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또 다른 위기 탈출의 기회가 됐다. 선조는 아직 3살밖에 안되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수 없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힘겨운 과정을 거쳐 조선 제15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집권 초기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나라의 전후 복구와 함께 유실된 서적 편찬과  무너진 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등에 있어 능력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당시 야전에서 생활에서 몸소 겪은 경험들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공납 제도를 개편하는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조세개혁도 단행했다. 대동법은 공평과세의 방편으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책이었다. 광해군은 이 과정에서 집권 세력은 북인의 대북 세력과 함께 남인 출신의 이원익 등 반대파들도 포용하는 정치력까지 발휘하며 성군의 면모를 보였다. 

광해군은 내치는 물론이고 외교에서도 기존의 사대를 하던 명나라와 신흥 강국 후금 사이에서 교묘한 중립외교로 전쟁의 위험을 극복하는 수완을 보였다. 이는 명나라를 사대하는 조선의 기본 정책에 배치되고 대신들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전후 복구 등으로 힘겨운 조선으로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집권 초기 광해군은 여러 면에서 치적을 남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군의 이미지가 퇴색됐다. 아버지 선조의 적장자라 할 수 있는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에게 항상 큰 위협이었다. 영창대군을 배경으로 한 반정의 가능성은 항상 존재했다. 그를 보필하는 대북 세력은 소수파 정권이었던 탓에 광해군의 왕위는 불안했다. 이는 왕권 유지를 위한 무리수를 불러왔다. 

대북 정권은 영창대군을 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유배 후 살해했다. 아직 10살도 채 안 된 영창대군은 유배지에서 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북 정권을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를 궁궐에서 내보내 별도의 별궁에 유폐시켰다. 공식적으로 광해군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인목대비에 대한 탄압은 성리학적 사고로는 폐륜이었다. 이는 광해군에 대한 반정에 있어 중요한 명분이었다. 광해군은 이후 포용의 정치를 버리고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또한, 광해군은 궁궐을 새롭게 건축하는 대규모 공사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가져오게 했다. 전후 복구에 시급한 조선에게 궁궐 건축은 시급한 사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이를 강했다. 이는 당연히 백성들의 원성을 불러왔다. 부족한 공사비용 충당을 위해 관직을 매관매직하는 일도 생기면서 그에 대한 여론은 점점 악화됐다. 이런 광해군을 둘러싼 대북 세력의 독단과 전행, 주변을 둘러싼 간신들의 존재는 그의 총명함을 잃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됐다. 

이에 서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세력은 1623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결행했고 광해군은 그들에게 밀려 권좌를 내주고 긴 귀양 생활을 하게 됐다. 광해군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배우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고통과 강화도와 교동도, 제주도로 이어지는 고단한 일정의 긴 귀양 생활에도 이를 견디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후에도 폭군으로 기록되며 긍정적인 면이 철저히 가려졌다. 

하지만 최근 광해군은 조선시대 또 다른 탄핵 군주인 연산군과 달리 재평가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의 전후 복구 노력과 전쟁의 위험을 방지한 실리 외교정책, 대동법 시행을 통한 민생을 돌보는 모습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다. 그가 그의 이복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왕실의 법도상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인목대비를 박해한 점, 집권 후반기 무리한 토목공사와 함께 통치의 난맥상을 보인 점은 분명 비판이 필요하다. 

하지만 친인척과의 권력 투쟁은 조선 시대 내내 있어왔고 수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희생됐다는 점에서 광해군만의 문제로 볼 수 없다. 이런 비극의 원인 제공자는 오히려 아버지 선조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세자에게 분조를 맡기고 의주를 거쳐 명나라로 피신하여 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임금이었다. 






선조는 적장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고 광해군에 대한 견제를 집권 내내 이어갔다. 수많은 선위 파동을 일으킨 것도 광해군에 대한 견제가 주원인이었다. 이런 선조가 남겨둔 어린 아들은 태생부터 권력 투쟁의 중심 설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되지 못한 이복동생의 입지는 항상 불안했고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광해군으로서는 자신의 안위와 권력 의지를 버리지 않는 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반정의 가능성을 항상 마음속에 가져야 했다. 영창대군이 점점 더 성장하면서 그 우려는 그를 더 옥죄어 왔을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소수파 정권이었던 광해군에게는 이런 위험요소가 큰 부담이었다. 어쩌면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와 걱정 근심이 쌓게 성군의 자질이 있었던 그를 폭군의 모습으로 변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가 권력의지를 버리고 영창대군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도 하기도 어렵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우호적인 기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광해군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 정권은 오히려 병자호란을 초래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더 힘들게 했다. 그 서인 정권과 함께 했던 임금 인조는 결코 광해군보다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임금이었다. 이점에서 광해군을 폭군으로 규정하기는 무리가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흘러도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인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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