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6회에서는 1904년 2월부터 1905년 가을까지 이어진 러. 일 전쟁을 주제로 했다. 러. 일전쟁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본격화한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있어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대국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훗날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어렵게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던 대한제국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과 세력 균형을 이루던 한 축인 러시아가 퇴장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침략을 막을 중요한 수단을 잃었고 비운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러. 일전쟁은 방송에서도 언급됐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강대국들 간의 대결이었다. 러시아는 당시 독일,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일본은 영국, 미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마치 대륙과 해양 세력의 대결장이었다. 청.일 전쟁 승리 이후 요동반도를 손에 넣고도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내줘야 했던 일본은 이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도 약화됐다.
이에 일본은 외교적으로 우군 확보가 절실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고 맞서고 있었던 영국과 밀착했다. 부동항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남진 정책을 펼치던 러시의 극동 진출을 막기 위해 영국은 일본을 후원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게 된 일본은 미국과의 외교 관계도 강화했다. 미국 역시 러시아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다. 미국은 외교적 지원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쟁 준비에 필요한 재정 지원도 함께 해주었다.
특히, 일본은 유대계 금융자본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정 후원을 받으면서 군사력 강화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일전을 위해 온 나라의 국력을 쏟아부었고 국민들 모두에게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일깨우는 심리전도 함께했다. 러시아는 일본인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영토를 확보한 초 강대국이었다. 군사력에도 일본과 비교가 안됐다. 러시아는 청나라와의 밀약을 통해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요동반도의 요충지 뤼순을 점령하여 해군 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었지만, 일본만큼 절실하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이러한 태도는 대한제국에게는 긍정적이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통해 러시아를 방패막이로 삼아 열강 등의 침략을 막는 한 편, 자체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외세의 개입이 없는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도 상당한 노력을 했다.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이 군사력 강화에 투입됐다.
하지만 러.일 전쟁의 발발은 대한제국의 자생적 근대화와 자주권 유지에 치명타였다. 대한제국은 중립을 표방했지만, 일본은 한.일 의정서를 통해 일본군의 대한제국 영토의 사용을 합법화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사실상 일본에 볼모로 잡힌 상태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받았다. 고종은 러시아에 밀서는 보내는 등 러시아와 관계 유지에 힘썼지만, 그 시도는 이내 일본에 발각됐고 러시와의 연결 통로고 막혔다. 대한제국은 뜻하지 않게 일본의 편에 서야 했고 이는 일본의 조선 지배가 사실상 시작된 것과 같았다.
러.일 전쟁의 양상도 대한제국의 뜻과 달리 진행됐다. 철저한 준비를 거친 일본은 해전과 육전에서 거듭 승리를 했고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러시아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전쟁을 했다. 일본은 러시아가 지배하던 만주로 전선을 확대했다. 러시아는 일본군의 힘을 과소평가했고 전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러시아는 요충지 뤼순을 잃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발틱해에 주둔하던 해군 함대를 한반도로 진출시켰다.
러시아로서는 마지막 승부수였지만,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영국이 지배하던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없었던 러시아 발틱 함대는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무려 수개월의 여정을 거쳐 한반도로 올 수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러시아 함대는 일본 함대에 힘없이 패했고 이는 러.일 전쟁의 양상을 일본쪽으로 급격히 기울게 했다. 하지만 일본 역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일본은 청.일 전쟁 때와 같이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기는 힘들었다. 러시아나 일본 모두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전쟁을 종료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의 미국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 뉴딜정책으로 대공황기 미국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를 이끌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먼 친척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친 일본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는 러.일 전쟁의 종료를 위해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협상을 중재했고 그 결과 러.일 전쟁은 끝을 맺었다. 전쟁을 종료하면서 일본은 그 전리품으로 대한제국을 얻었다.
대한제국은 강대국들의 전리품 협상의 대상이 됐고 일본은 그토록 원하던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얻었다. 대한제국은 이에 대한 우려를 했고 미국에 대한제국에 유리한 중재를 미국에 요청했지만, 미국인 이미 일본과의 밀약으로 사실상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준 이후였다.
결국, 러.일 전쟁을 통해 일본은 강대국들의 묵인하에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이런 결과를 도출한 미국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가 됐다. 강대국의 평화는 약소국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국 지위 유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강대국들에게 약소국은 전리품, 또는 이권을 나누는 수단이 불과했다. 대한제국의 식민지 운명은 러.일 전쟁 발발과 동시에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대한제국은 한반도보다 만주의 지배권에 더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의 승리를 내심 기대했지만,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러.일전쟁은 강대국들 간 이권 다툼의 산물이었고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경쟁 틈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이라는 식민지를 얻어냈고 이후 수십년간 인적, 물적 수탈을 자행했다. 또한, 러.일 전쟁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로 급속히 변모했다. 물론, 그 결과는 패망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고 이후 분단국가로서 그 아픔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점에서 러.일 전쟁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슬픈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문화 > 미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사기획 창 216회] 글로벌 기업의 무책임, 이에 속수무책인 정부 (3) | 2018.11.28 |
---|---|
[역사저널 그날 197회] 치욕적 근대사의 시작, 을사늑약 (3) | 2018.11.26 |
[TV 리뷰] 알쓸신잡에서 조명한 부산, 중요 키워드 6.25 한국전쟁, 장기려 (1) | 2018.11.18 |
[차이나는 클라스 86회] 광해군, 성군과 폭군의 경계에서... (3) | 2018.11.15 |
[역사저널 그날 195회] 광장 민주주의 시작, 독립신문, 독립협회 (2) | 2018.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