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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그날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국의 직위가 사실상 사라진 날이었다. 그날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에 빗대어 1905년 을사년의 이름에서 따온 을사년스럽다라고 표현했고 지금의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탄생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1905년 이전 이런 표현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1905년 을사늑약의 우리 역사에서 치욕적인 날이었다. 그 늑약에 서명한 이완용을 비롯한 5명의 대신들을 을사 5적으로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7회에서는 을사늑약과 관련한 국내외적 상황을 다뤘다. 

당시 일본은 조약에 대해 논의하던 덕수궁 일대를 군대를 동원해 포위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본은 전권대신으로 훗날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당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파견해 을사늑약을 체결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에서 조약 서명을 강요했지만, 고종은 결정을 차일피일 미뤘고 대신들과 협의하여 결정토록 했다. 고종으로서는 자신의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이미 국제 정세는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가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종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최대한 조약 체결을 미루면서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미 일본은 강대국들과의 다자간 외교로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인정받았다.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 테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하는 대가로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영국과의 인도와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향호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러일 전쟁을 종결하는 러시아와의 강화협상에서도 러시아의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원천적으로 막아냈다. 

대한제국으로서는 강대국들 간의 세력 균형을 통해 대한제국의 자주국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외교 전략이 사실상 사라진 셈이었다. 대한제국은 미국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미국과 일본의 유착관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의미 없는 미국 바라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 친일 성향이 강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이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몇 달 전 대한제국을 방문할 당시에도 나라의 상당 예산을 사용해 국빈급 대우를 하며 예우하며 마지막 희망을 찾으려 했지만, 공허한 외침이었다. 

고종은 외교적 노력을 계속했지만,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가 우선시 되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시점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시간을 늦추는 정도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고종은 책임을 신하들에게 미루는 무책임함을 보이기도 있다. 이런 황제의 태도는 협상에 임하는 대신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었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협상에서 그들은 개인적인 판단을 해야 했다. 

일본은 8명의 대신들을 하나하나 설득 또는 위협하며 찬성을 이끌어내려 했다. 8명의 대신 중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3인을 반대했고 이완용을 비롯한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5인은 찬성하며 조약이 체결됐다. 이후 반대한 3인 중 민영기, 이하영 역시 친일로 돌아서면서 마지막까지 조약에 반대한 이는 한규설이 유일했다. 이후 7인의 대신들은 일본으로도 작위를 수여받고 막대한 부와 명예를 누렸다. 나라는 일본에 넘긴 댓가였고 그 부는 해방 이후에도 후손들에게 전해지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당시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황실의 안위를 보장받고 향후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역량을 갖출 때까지 조약이 지속한다는 문구를 넣었다는 것을 성과로 들고 있지만, 한 나라의 주권을 내준 조약에 서명하고 날인한 행위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었다. 또한, 그 반대급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이후에도 일제에 협력하며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일본의 강압 속에서 체결된 을사늑약은 국제법적을 무효였다. 우선,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강제적인 방법으로 조약을 체결했다. 전제 군주제의 대한제국에서 조약의 최종 승인자인 고종황제의 조약 체결권을 대신들이 완벽하게 위임받는 것도 아니었고 추후 비준도 없었다. 또한, 조약의 제목도 없었으며 조약의 문구도 일본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고 추후 변경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가 직적 수정하기도 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요식행위였다. 

하지만 이런 위법성에도 당시 대한제국은 조약의 체결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외교적 노력은 사실상 막혀있었다. 러일 전쟁 직후 일본의 대한제국의 지배는 정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강요된 조약에 서명한 대한제국의 무기력함은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조약 체결 소식이 알려진 이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이에 저항했지만, 대한제국의 정부는 죽음으로 부당함을 대내외에 알린 민영환과 몇몇 대신들 외에는 저항의 움직임이 없었다. 정해진 대세에 따를 뿐이었다. 

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과 수교했던 각국의 공사관들도 모두 철수하면서 대한제국은 국제 사회에서 더는 기댈 곳이 없는 처지가 됐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나라가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치욕이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이 마지막까지 구세주로 여겼던 미국은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나라명을 바꾸며 자주독립국의 지위를 지키려 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은 이렇게 물거품이 됐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법 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사항을 막아야 하는 대한제국 정부의 무능함과 일본에 편승한 매국 대신들의 반역이 결합한 결과물이었다. 다시 대한제국 국민들은 누구도 이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치욕의 근대 역사는 현대사로 이어지며 지금도 그 상처를 남기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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