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사실상 주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배 체제로접어들었다. 일본은 통감부를 통해 사실상 대한제국을 통치했다. 서구 열강들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일본의 강압에 대한제국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대한제국에게 1907년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는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의 뜻에 반하는 불법 조약임을 세계에 알리고 지원을 얻어내랴 했다. 이것이 헤이그 특사사건의 시작이었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8회에서는 이 헤이그특사 사건을 다뤘다.
헤이그 특사사건은 3명의 특사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파견하기 까지 첩보전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일본에 의해 모든 것을 감시당하고 있는 고종으로서는 자신의 뜻을 담을 밀서를 전달하는 것조차 어려웠고 특사를 파견하고 현지에서 외교활동을 하기 위한 자금 마련도 큰 난관이었다. 프로그램에서는 이를 두고 고종의 비자금이라 당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교회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만큼 헤이그 특사 파견은 철저한 보안 속에 이루어졌다.
대한제국의 운명을 짊어진 특사 3인은 모두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20대 초반의 청년 이위종은 무관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유럽에서 성장했다. 곳에서 이위종은 앞선 서구 문명과 문화를 몸소 몸에 익혔고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까지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엘리트였다. 그는 헤이그 특사의 활동에서 대변인 역할을 하며 해외 만국평화회의 참가국과 해외 언론에 대한제국의 처지를 알리고 일본의 조선 침탈이 부당함을 알렸다.
그와 함께 한 이상설은 20대 젊은 나이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고 불과 2년 후 성균관 관장에 임명될 만큼의 대단한 능력자였다. 그는 문인이었지만, 과학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었고 신학문에서 눈을 떠 다방면에서 상당한 역량을 발휘하는 관료였다.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자결을 시도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한 몇 안 되는 관료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일본은 그를 핍박했고 이상설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세 번째 밀사였던 이준은 대한제국의 검사로서 관리들의 비위를 감찰하고 처벌하는 평리원에 재직하기도 했다. 그는 독립협회의 일원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는 저항운동에 깊숙이 참여해 일본에 맞서기도 했다. 그는 고종의 밀서를 전달받은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임명된 3명의 밀사는 각각의 경로로 일본의 감시를 피해 헤이그로 향했다. 먼저 이준이 이상설이 머물고 있던 연해주로 향했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당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한제국을 대표해 외교전을 펼치던 이위종과 합류해 헤이그로 향했다. 수개월에 걸친 여정이었다. 이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신변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과 먼 이국에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함에도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함께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미국인 헐버트의 역할도 중요했다. 당시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이 거사를 도모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일본은 고종의 특사로 미국인 헐버트를 주목했다. 그는 친한파 미국인으로 고종의 최측근으로 외교 고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이를 이용했다. 헐버트에 일본의 관심이 쏠린 탓에 특사 3인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향할 수 있었다. 헐버트는 일본의 감시를 교란하는 한편 일본이 그를 쉽게 압박할 수 없는 미국인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만국평화회에 참석한 특사단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그 역시 유럽의 외교가에서 대한제국의 입장을 알리는 일을 함께 했다.
사실상 4인의 특사단으로 구성된 대한제국의 특사단은 현지에 도착해 태극기를 숙소에 걸어 대한제국을 대표하고 있음을 알렸고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인 회의 참석은 불가능했다. 일본의 방해가 극심했고 일본에 우호적인 서구 열강들 역시 대한제국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한제국 특사단은 회의장 밖에서 각국에 대한제국의 입장을 알리는 문서를 보내는 한편 서양의 언론에 일본의 부당한 대한제국 침탈과 을사늑약의무효를 주장했다. 그들의 활동은 실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특사단은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약소국의 비애를 몸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사단은 온 힘을 다했지만, 회의 참석은 끝내 불발됐다.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지배되는 만국평화회의는 세계 평화 구현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강대국들만의 잔치였다. 수개월을 머물며 전개한 외교전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과 같았다. 이 과정에서 특사단의 일원이었던 이준은 헤이그 현지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사인을 두고 화병, 독살설, 자살설 등의 추측이 있었지만, 출구 없는 대한제국의 처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 머나먼 이국에서의 과로 등이 겹쳐 사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렇게 이준을 잃은 특사단은 회의 막바지까지 외교전을 전개했고 이후에도 현지에서 외교전을 전개했다. 회의 참석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세계에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부당한 침략을 알렸다는 점은 큰 성과였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대한제국에 큰 후폭풍을 불러왔다. 이 사건을 사실상 지휘한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됐고 그의 아들 순종이 즉위했다. 일본은 이후 더 빠르게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사단 역시 시련을 겪었다. 일본에 의해 이들은 관리를 사칭했다는 죄목과 함께 궐석 재판을 거쳐 이상설을 교수형을, 이위종은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이들의 헤이그행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이후 이상설은 연해주로 돌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이 유해와 유품을 화장하고 제사를 지내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주권을 잃은 고국으로의 귀향을 그는 죽으면서도 원하지 않았다. 또 한 명의 특사였던 이위종은 러시아로 돌아가 외교활동을 하는 한편 러시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위종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공산 혁명에 가담한 것까지는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더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위종은 러시아인으로 급변하는 러시아 현대사 흐름 속에서 그 삶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3명의 헤이그 특사들은 최고의 엘리트들로 일본에 협력했다면 풍족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부귀영화를 버리고 위기의 조국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했지만, 독립된 조국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씨앗이 되어 독립운동은 계속 이어졌고 그들의 소망했던 나라의 독립은 이루어졌다. 긴 세월이 지나 그들의 영혼은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는 실패한 헤이그 특사 사건이었지만,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헤이그 특사들은 발자취는 실패의 기록이라 할 수 없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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