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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강화도의 역사를 재조명한 알쓸신잡 3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18. 12. 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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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수다 한 마당, 알쓸신잡이 12월 첫 주말 찾은 장소는 서해의 섬 강화도다. 강화도는 자동차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언제든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이제는 섬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고려, 조선, 근대사의 흔적이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보고다. 알쓸신잡에서는 전국적으로 첫눈이 내리던 날 강화도의 이곳저곳을 찾고 강화도의 연대기를 말로 풀어갔다. 강화도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화도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이 그것을 증명한다. 강화도 역사 박물관에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채석장에서 작업을 통해 모양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더해져 무덤으로 정한 장소로 옮겨야 했고 두 개의 거대로 돌기둥에 재단 형태의 돌을 올려야 하는 과정을 거친다. 선사시대는 국가라는 개념이 없이 부족 단위의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고인돌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인돌의 존재는 당시에 지배 피지배 관계가 형성되었고 대부분 사람에 의해 일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권력자가 힘이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인원이 다수 차출될 만큼 강화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한반도에는 전 세계 고인돌 중 상당수가 분포하고 있고 강화도 지역은 그 분포도가 높다. 강화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았던 곳이었다. 당연히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시절에도 강화도는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성이 컷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가 역사의 중요한 장소가 된 건 고려가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고 이에 항거하던 수십 년의 기간에서였다.당시 고려 조정은 무신의 나 이후 혼란을 정리한 최충헌에 이어 그 아들들이 실권을 장악하던 시대였다. 왕은 명목뿐이었고 최씨 정권의 세상이었다. 최씨 정권을 몽골제국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도성을 개성에서 강화로 이전하여 저항했다. 해전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활용한 전략이었다. 

이는 강화도에 각종 도성의 시설들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으로 말하며 도시의 인프라가 자리하게 됐다.  이런 발전이 그곳의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다수의 외지인이 섬에 들어왔다는 점, 그 대상들이 집권층들이었다는 점은 강화도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노역과 세금 징수의 고통을 가져다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강화도 인구가 7만명 정도임을 고려하면 상당한 규모의 인구 유입이었다. 

이 때문인지 강화도는 고려 시대부터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드는 간척 사업이 활발히 진행됐다. 강화도에서는 우리가 아는 간척 사업이 70대와 80년대 산업화 과정의 산물이 아닌 과거로부터의 유산이었다. 그 결과 지금 강화도 면적의 1/3은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든 결과물이다. 그만큼 강화도는 큰 변화를 오래전부터 겪어왔던 곳이었다. 

강화도는 조선시대 유배지로서 서양 세력과의 대결장으로 역사에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많은 왕족들이 강화도에 유배를 왔었고 대표적으로는 역사적으로 최악의 폭군이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이 있었다. 연산군은 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성종 임금의 장자로 상당한 정통성과 함께 강력한 왕권을 넘겨받았지만, 권력을 선정을 베푸는 것이 쓰지 않고 개인적인 쾌락과 즐거움, 복수심을 충족하기 위해 사용했다. 여기에 당시 신. 구 세력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불거진 두 차례 사화에 연산군이 동조하면서 그 악명을 높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에 취해있었던 연산군은 결국, 반정에 의해 탄핵되고 유배되는 신세가 됐다. 그는 강화도의 부속섬인 교동도의 작고 초라한 초가집에 머물렀고 유배지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죽음을 맞이했다. 독살설 등도 제기되고 있지만, 궁궐에서 풍족하고 뭐든 할 수 있었던 생활을 하던 사람이 아주 작고 주거가 제한된 섬에서의 생활을 견디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산군의 비참한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연산군의 비극과 함께 강화도는 조선 말기 서양 세력들의 침략을 최 일선에서 상대한 전쟁터였다. 강화도는 도성으로 향하는 각종 물자가 이동하는 한강의 바다로부터의 통로로 지리적 가치가 상당했다. 그 때문에 강화도는 해안을 따라 각종 진지가 다수 구축되었다. 프랑스군이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등을 문제 삼아 침략한 병인양요, 미국이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이유로 침략한 신미양요는 강화도가 전투의 장소였다.

당시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조선의 병사들과 주민들은 결사 항전을 했지만, 사거리가 엄청나게 차이나는 신식 총과 대포로 무장한 서양의 군대와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항전은 이어졌고 프랑스, 미국군은 힘으로 조선을 개항하고 개방시키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이 외세의 침략을 이겨낸 결과였지만, 막대한 문화재가 약탈되고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앞선 서양 문물 앞에 너무나도 초라한 조선의 현실을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한 문화재 중 대표적인 외규장각 의궤는 100년이 넘은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말 그대로 상처뿐인 우리들만의 영광이었다. 

이렇게 서양 세력들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던 조선이었지만, 조선은 자신들보다 한참 아래 수준으로 여겼던 일본에 의해 문화를 개방하고 말았다. 일본은 서양의 군함과 신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강화도에 보내 고의로 무력 충돌을 유도했고 이를 빌미도 조선과의 수교 통상 조약,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마침 쇄국 정책을 주도하던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외국과의 통상에 보다 긍정적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국제 사회로 편입되는 계기가 됐다. 개방의 시대로 접어든 조선이었지만, 이에 대한 대비는 없었다. 국제법 등 각종 제도나 시스템이 미비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은 일본에 대한 관세를 면제해주는 등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의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선은 조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몰랐다. 그 결과 조선의 경제는 빠르게 일본에 잠식당했다. 강화도 조약의 최종 결말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제 식민 통치였다. 즉, 강화도는 우리 비극적 역사의 무대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강화도는 근대화의 유적들도 만날 수 있다. 한옥 양식의 영국 성공회 성당, 지금은 멋진 카페로 사용되고 있는 폐방직 공장 부지 등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흔적들이다. 지금 이 유적들은 과거를 기억하고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이렇게 강화도는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상당한 곳이다. 멋진 바다 풍경 외에 역사의 장면들이 응축된 장소와 유적들이 산재해있다. 알쓸신잡에서는 우리가 스쳐 지나가거나 잘 몰랐던 강화도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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