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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00회] 꺼지지 않은 구국의 불꽃 의병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18. 12. 18.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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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이 200회를 맞이했다. 역사저널 그날은 우리 역사의 장면들을 대담 형식으로 풀어가면서 잘 알지 못했던 뒷이야기와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최근에는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는 우리 근대사를 조명하고 있다. 슬픈 역사의 장면들이 너무 많지만, 그 속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고 있다. 

200회 방송에서는 조선 후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활약했던 항일 의병을 그 주제로 했다. 얼마 전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의병에 대한 대중들이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의병은 우리 역사에서 그 연구가 부족하고 비중이 크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의 무장 독립 투쟁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느껴진다. 사료도 많지 않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의병의 우리 근대사에서의 의미를 재 조명했다. 

의병의 역사는 조선시대 큰 전란이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로 정부의 위기 대응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북쪽으로 피난하기에 급급했고 무너진 국방 시스템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일본군은 큰 어려움 없이 도성인 한양을 점령했고 거의 전 국토를 유린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이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의병들은 적들로부터 자신의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지만, 이후 그 세력을 키워 일본군에 대항했다. 의병이 후방에서 일본군 보급선과 후방 지원을 차단하고 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면서 전세는 역전됐고 조선은 반격의 가능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청나라가 침략한 병자호란 당시에서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에서 농성전을 전개하긴 했지만, 청나라의 압도적 군사력을 당해 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준비 없는 친명 정책의 결과는 참혹했다. 청나라는 신흥 강국이었고 명나라는 국운이 쇠퇴했다. 대외 정세를 오판한 조선은 의미 없는 명분론에 집착하면서 청나라를 자극했다. 이는 청나라의 2차례 침략을 불러왔고 조선의 임금 인조는 항복의 예를 갖추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조선의 패전이었지만, 병자호란 당시에서 각지의 의병활동이 있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모두 집권층의 실정에 의한 것이었고 일반 백성들이 고통받고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사고는 집권층이 저지르고 이르 수습하는 건 일반 백성들이었다. 의병의 역사는 고려 시대에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고려 몽골과의 긴 전쟁 기간에도 고려의 백성들을 몽골군에 맞서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맞서 싸운 역사의 기록들이 있다. 

당시 고려 집권층은 강화도로 피신해 있었고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음에도 사치 향락으로 점철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강화도 외 지역에서는 몽골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자구책 차원에서 지역민들은 뭉쳐야 했고 각지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역시 사고를 저지르는 이들 따로 수습하는 이 따로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의병은 자신은 물론,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구국의 일념을 뭉친 자발적 운동의 역사였다.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에서도 그 정신이 이어졌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시점에는 어김없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변변한 무기도 없었고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이들이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여기에 조선과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그들의 총부리를 서로 겨눠야 하는 현실에서 의병의 활동은 한계가 있었다. 

의병운동의 변화하는 결정적 계기는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단행된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군대는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조직되어있었다. 하지만,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함께 일본의 조선에 대한 병합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해산될 처지에 놓였다. 당시 상당수 대한제국 군인들은 이에 응했지만, 당시 박승환이 이에 분개해 자결하면서 분위기가 변했다. 

박승환의 자결은 무기력하게 해산을 받아들였던 대한제국 군인들을 행동하게 했다. 대한제국 군인들은 무기고를 급습해 반환했던 무기를 다시 꺼내들었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대결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한제국 군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외국 침략군과의 전투에서 패퇴했고 해산의 비운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해산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의병군에 가담하면서 의병군은 보다 더 체계화된 편제를 갖추고 일본군에 대항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의병군은 전국 각지의 의병조직을 통합했고 그 세력을 결집했고 만만치 않은 세력을 과시했다. 당시 의병군은 과거와 같이 유학자들이나 양반들이 주도하던 것에서 벗어나 신돌석과 같은 일반 평민의 의병장으로 등장하는 등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자유, 평등사상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의병군은 각국에 의병군을 정신 교전 단체로 인정해줄 것을 천명하는 등 군사작전 외에 외교전도 함께 전개했다. 의병들의 활약상은 당시 영국인 종군 가자인 매컨지에 의해 해외로 알려지기도 했다. 매켄지는 일본의 방해와 주변의 만류에도 의병들을 찾아 그들의 만나 그들의 취재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 역사책에 등장하고 있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재현한 의병 사진의 그 산물이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저항을 상징했던 의병은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때 서울 진공작전을 진행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총 대장 역할을 하던 이인영이 돌연 부친상을 이유로 작전을 중지하고 낙향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고 일본군의 집요한 공세 속에 그 세력이 약해졌다. 일본군의 의병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협조하는 지역민들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 결과 의병들과 민간인들이 연결 통로가 막혔다. 조선의 백성들은 의병들을 지원하는 한편 정보원의 역할도 해주었다. 

이런 후방 지원이 끊기면서 의병들의 그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병들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이는 죽음을 의미했지만, 구국의 일념은 그것마저도 극복하게 했다. 결국, 상당수 의병들은 목숨을 잃었고 대한제국 내에서의 의병 활동도 그 불꽃이 사그러 들고 말았다. 이후 의병운동은 해외 무장독립 투쟁으로 이어지며 그 정신도 함께 계승됐다. 

혹자의 의병의 저항이 애초부터 무리한 시도였고 그 역량을 애국계몽 운동 등 현실적인 분야로 집중했다면 하는 의견도 제시하기도 한다. 실제로 의병군은 대한제국 해산 군인들이 가세한 이후에도 일본군과는 무기 등에서 비교할 수 없는 그 힘이 약했다. 일본군의 대결은 그만큼 상당한 희생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의병운동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의 중요한 에너지가 됐다. 그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았기에 일제의 폭압에 맞선 독립운동이 오랜 세월 지속할 수 있었다. 즉, 의병운동은 더 자세히 연구되고 기록되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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