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물 진흥 정책을 위해 던진 세종의 승부수가 적중했다. 세종이 공언한 대로 장영실과 서운관 관리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일식의 일지와 일시는 정확히 예보했다. 세종은 역대 가장 정확한 시간에 구식례를 거행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격물진흥 정책에 대한 조정의 반대 여론은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추가적인 격물 진흥 정책도 탄력을 받게 됐다. 이 과정에 큰 위기가 있었다. 누적된 기록 부족으로 고심하던 장영실과 학자들은 일식 일자는 예보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일시는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이들은 과거 조선 비밀 천문연구과정에서 작성된 기록을 떠올렸다. 그 기록은 당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장희제에 의해 보관되어 있었다. 장희제는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그 기록을 가지고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
자칫 장희제에 의해 불태워질 위기에 처했던 장영실의 새로운 물시계는 마지막 순간 장희제의 양심이 발동하며 극적으로 보존됐다. 장희제는 자신을 몰래 미행해왔던 김학주에 위해를 가하면서까지 물시계를 지켜냈다. 장희제 역시 장영실 물시계의 독창성과 그 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물 진흥이라는 대의를 장희제는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장희제는 함께 물시계 제작과 천문 연구를 하고자 내민 장영실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장희제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물을 그대로 두고 칩거에 들어갔다. 위기를 벗어난 장영실의 물시계는 마침내 세종과 대신들에 공개됐다. 그의 혁신적인 기술에 세종은 물론이고 여타 대신들도 찬사를 보냈다. 이는 그동안 격물 연구에 반대하던 대신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로서도 조선의 표준시간을 알려..
태종과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종으로부터 재주를 인정받은 장영실이었지만, 노비의 신분은 벗을 수 없는 굴레였다. 하지만 장영실은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 애쓰기 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맞은 봐 소임에 온 힘을 다했다. 이런 장영실을 신뢰하고 있던 세종은 그에게 큰 임무를 맡겼다. 그는 서운관의 책임자 장희제와 더불어 명나라 사신단에 참가해 명나라의 앞선 천문 기술을 보고 배우도록 했다. 세종은 이를 바탕으로 조선만의 천문관측 기술을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조선의 역법을 만들려 했다. 이전 중국의 역법에 의존한 천문관측이 나라 실정과 맞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세종의 마음이 담긴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명나라는 천문기술의 대외 유출..
부친 장성휘의 죽음과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명나라행의 실패로 실의에 빠진 장영실은 부친인 장성휘의 절친한 벗이었던 이천과 한양으로 향하게 된다. 관노의 신분이었던 장영실로서는 자신의 명나라행을 막은 이천의 처분에 따라 자신의 거취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장영실은 한양으로 가는 도중 수 차례 도망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천의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을 접었다. 이천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혼란기에 자신의 가문이 조선 태조 이성계 의해 멸문되다시피 한 아픔이 있었다. 누구보다 조선 왕조에 대한 증오심이 큰 그였다. 이천은 그 마음을 억누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조선 건국에 힘을 보탰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이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