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의 과거사 갈등과 일본의 경제 보복 속에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컸던 2019년 광복절이었다. 여전히 한일간의 갈등은 진행형이고 남북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는 상황,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한 긴장은 여전하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도 일본을 옹호하는 국내 세력들이 버젓이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현실은 마음을 더 복잡하게 하고 있다.
광복절에 앞서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에 이어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세력들이 있지만, 우리 헌법에는 3.1운동의 정신과 우리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민주 공화정의 시작이었고 그 안에는 행정부는 물론, 입법, 사법 기능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조직을 통합하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고 이념과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타국에서 온 힘을 다해 일제와 싸웠던 임시정부였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해방 후 대한민국의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체제 속에 한반도는 그 대리전의 중심에 섰고 남북이 분단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는 남과 북에 미국과 소련의 후원을 받는 정부의 수립을 불러왔다. 결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해방 이후 몇 개월이 지나서야 힘겹게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임시정부 인사들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임시정부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로서 인정받고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6.25의 비극과 남북 분단의 고착화라는 현실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담은 임시정부 인사들의 환국기념사진)
이런 아쉬움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이고 대한민국의 근간인 건 분명하다. 광복절을 맞이한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임시정부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했다.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지만, 그동안 우리는 역사 책등을 통해 그 역사를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현실에서 의미 있는 프로그램들이었다.
그중에서 임시정부의 핵심 인사였던 이동녕에 대한 프로그램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수립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임시정부가 큰 위기에 있을 때도 임시정부는 지키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도록 하는데 일생을 다 바쳤다. 하지만 임시정부하면 김구를 먼저 떠올렸던 사람들에게 이동녕은 다소 낯선 인물이었다.
이동연의 독립운동은 구한말 독립협회 활동에서부터 시작됐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시민사회단체였던 독립협회에서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국가의 중요한 이슈를 토론하고 이를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고 국민들의 계몽과 나라의 개화를 위해 큰 노력을 했다. 독립협회의 존속 기간은 길지 못했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은 이후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동녕은 독립협회의 활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후 독립운동을 함께 할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후 신문 기고를 통해 구국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사회단체를 조직하고 그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국내외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신민회 등 독립운동 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 폭을 넓혔다.
하지만 한일합방으로 이어진 일제의 국권침탈로 이동녕은 개화, 계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국외 무장투쟁을 적극 전개했다. 1911년 독립운동가들의 산실이 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신흥강습소 설립에 있어 이동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이동녕은 간도 지방과 연해주 등지에서 국외 독립운동에 매진했지만, 일제와 러시아의 압력에 더는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고 상해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 과정에서 이동녕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의 기반이 된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 선포에도 간여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4월 11일 조직된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동녕은 국무총리로서 임시정부의 중요 요직에 올랐다. 이후에도 대통령 대행 등의 역할을 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동녕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도 역할을 하면서 의회라 할 수 있는 의정원 위원장과 임시정부 내 여당이라 할 수 있는 한국독립당 창당도 주도했다. 이동녕은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과 내부 노선 갈등에 따른 와해 위기에도 임시정부를 지키면서 그 법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이동녕의 노력과 헌신으로 임시정부는 1920년대 큰 고비를 넘겼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의 위상을 한껏 드높일 수 있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한층 강해진 일제의 탄압과 일제의 중국 침략에 근거리를 상해에서 중국 내륙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동녕은 당시로는 노령인 60대의 나이에도 임시정부의 주석직을 수행하며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하지만 누적된 과로에 이동녕은 1940년 3월 과로에 따른 폐렴으로 중국 쓰촨성에서 영면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김구를 중심으로 항일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수권을 가지는 광복군을 조직해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했다. 일제의 항복으로 그 작전을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지만, 광복군은 대한민국 최초의 군대였다. 이동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과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타국에서 눈을 감았지만, 1948년 그의 유해가 봉환되어 지금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이동녕은 해방된 조국에서 영면할 수 있었다.
이동녕은 이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있어 그 시작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구심점이었고 정신적 지주였다.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지속할 수 없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이동녕은 그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묻히고 잊혀가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우리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독립운동사의 공백이 많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더 깊이 연구되고 알려져야 한다. 이동녕의 생애를 조명하는 다큐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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