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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의 거대 도시 중 한 곳인 수원은 과거 조선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끌었던 왕인 정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정조는 수원에 당시 첨단 기술이 집약된 수원 화성을 축조하였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조선시대 최대 이벤트라 할 수 있는 화성행궁 능 행차는 당시 수도 한양에서 수원까지 이르는 여정이었다. 그만큼 수원은 정조에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반이었다. 

지금 정조는 역사 속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유산인 수원 화성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적 유적으로 남아있고 수원을 대표하고 있다. 현재 수원은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이 들어서고 많은 인구가 모인 도시가 되었다. 최근에는 광교에 또 다른 신도시가 조성되어 그 위상이 더 높아졌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74번째 여정은 역사적 전통의 살아 숨 쉬고 있는 수원 팔달구와 장안구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로 채워졌다. 

수원 화성의 전경을 조망하며 시작한 여정은 수원의 중심 팔달산으로 이어졌다. 사방 팔달이 훤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팔달산에 오르지 수원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정상에 자리한 거대한 범종인 효원의 종을 치며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을 알렸다. 

 

 



수원 화성 길을 벗어나 길을 걷다 사용하지 않는 생활용품들로 화단을 꾸민 한 의상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마트나 다양한 의류 상가, 심지어 인터넷이나 홈쇼핑으로 옷을 사는 것이 보통인 시대에 의상실은 이제 낯선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 의상실에는 동네 주민들로 북적였다. 

이 동네에서 수십 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의상실은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었다. 수십 년 단골인 이 의상실의 손님들은 요리를 해서 함께 나누기도 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가족 같은 모습이었다. 1968년 발급된 빛바랜 자격증을 가게 한편에 걸어놓은 의상실의 사장님은 손님들이 주문한 그들만의 옷을 만들고 있었다. 옷도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세태에 이 의상실은 옷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 의상실을 찾는 단골손님들은 단지 자신만의 옷을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 사람 간의 정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정이  있어 이 의상실은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의상실을 떠나 수원 구 도심 한 편에 자리한 공구거리를 찾았다. 과거 6.25 전쟁 이후 생겨난 이 공구거리는 그 규모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었지만,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있는 대장간의 사장님을 만났다. 

그는 60년간 대장장이 일을 해오고 있었고 지금은 홀로 대장간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70살을 넘어선 나이에 일이 힘들고 힘에 부치지만, 그는 평생의 업으로 지켜온 일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자신과 함게 한 공구들에게 조금만 더 견뎌보자 격려하는 그의 독백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한 편으로는 이 일을 더 이어갈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오늘과 과거의 전통을 지켜며 살아아고 있었다. 

수원 화성 장안문 인근의 먹자골목에서 들렀다. 그곳에서 30년 전통이라 적혀있는 오래된 간판과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물의 아귀탕 집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귀탕 집은 46년의 전통이 함께 하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지금 이 아귀탕 집은 과거부터 이 가게를 지켜온 어머니와 그 딸이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뛰어난 손맛으로 이 아귀탕 집을 소문난 맛집으로 만들었고 그 딸은 누룽지를 더한 새로운 아귀탕을 개발해 이 아귀탕 집의 유명세를 더하도록 했다. 두 모녀가 합심하여 개발한 누룽지 아귀찜은 매콤한 아귀찜 특유의 맛에 구수한 누룽지가 더해진 독특함이 함께 하고 있었다. 

먹자골목을 벗어나 수원에서만 만날 수 있는 화장실 박물관과 공원이 있는 해우재를 찾았다. 이곳은 과거와 현재의 화장실 문화를 살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더럽고 불결하다는 이미지가 강한 화장실이지만, 이곳에서는 그 화장실을 유쾌하게 즐기는 문화의 아이템으로 삼았다. 실제 이곳에서는 역사의 흐름과 변모한 화장실의 모습들을 부담 없이 볼 수 있었고 그 안에 담긴 문화적, 시대적 의미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세계 유일의 화장실 박물관에서의 재미있는 경험을 뒤로하고 여정은 꽃들로 가득한 한 화원으로 이어졌다. 20대 젊은 여성 농부가 운영하는 이 화원은 식용꽃들과 허브 등을 재배하고 있었다. 이 꽃들은 다양한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다고 했다. 젊은 시절 레스토랑에서 일하다 아이디어를 얻어 작은 텃밭에서 시작한 이 화원은 이제 1,000평이 넘는 규모로 성장했다. 젊은 농부는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화원을 만들었고 부모님들이 그 일을 돕고 있었다. 20대의 아이디어와 열정, 이를 지지하고 응원해 준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함께 하는 훈훈한 공간이었다. 봄 햇살과 함께 하는 화사한 꽃들이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였다. 

꽃향기를 맡으며 다시 도심의 길을 걷다가 80년대 풍의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레스토랑에 이르렀다. 과거 경양식집이라고 불리며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돈가스를 주메뉴로 하는 이 식당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수원에서 최초로 문을 연 이 경양식집은 같은 업종의 식당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와중에서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이 경양식집의 사장님은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직접 서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식당을 단순히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사명감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경양식집은 198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장년층에는 만남과 설렘의 공간이었다. 당시 돈가스는 아주 귀한 음식이기도 했고 특별한 날에 찾는 곳이 경양식집이었다. 이 경양식집은 그때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공간이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보였다. 

여정은 다시 오랜 역사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이끌었다. 정조의 효심을 느끼게 하는 노송지대가 그곳이었는데 이 노송들을 정조가 비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고 오는 길에 500그루의 소나무들을 심어 조성되었다고 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이 소나무들을 울창한 숲길로 변했고 수원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조는 이 소나무 숲길을 만들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을 덜어냈을 것으로 보인다. 

수원에 남은 역사의 흔적은 도심 속 한 초가집에서도 살필 수 있었다. 1888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초가집은 지역의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었다. 잘 정돈된 초가집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자체의 관리가 잘 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이 초가집을 지키고 있는 칠순의 할머니를 만났다. 

이 할머니는 홀로 부모님의 유산인 이 집을 매일 청소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아파트나 현대식 주택이 보편화된 시대에 불편함이 가득한 초가집이지만, 이 할머니는 자신은 물론이고 9남매가 태어나고 자란 이 집을 떠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부친 역시 이 집을 허물과 새집을 짓다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이 초가집을 지켰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유지를 지키는 것과 함께 자신의 역사를 지키는 마음으로 초가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마음이 있어 우리 소중한 전통문화의 유산이 우리 삶 속에 남을 수 있었다. 

숨 가쁜 여정의 끝은 수원 광교 신도시에 새롭게 조성된 인공 호수인 광교호수 그리고 그 주변에 자리한 문화공간인 수원컨벤션 센터였다. 광교호수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은 수원의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수원은 현대적 도시가 되었지만, 수원은 역사적 전통이 곳곳에 살아 숨 쉬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전통은 수원을 문화도시로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 일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 이 여정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였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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