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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04회] 외교사의 비극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3. 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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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시절의 사건 사고를 되짚어가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04회에는 1983년 10월 온 국민을 슬픔에 빠뜨렸던 아웅산묘소 테러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으로 밝혀진 이 사건은 장기간의 해외 순방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의 암살을 목적으로 실행되었지만, 전두환은 암살을 모면했다. 대신 고위 관료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큰 인명피해가 있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해외 순방 외교 중 테러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대통령 전두환은 1983년 10월 장기간 일정으로 인도와 스리랑카 등 서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을 포함한 해외 순방을 했다. 이는 그동안 우리나라와 큰 교류가 없었던 제 3세계 국가들과의 교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전두환 정권은 12. 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이라는 원죄를 안고 출범한 정권이었다. 과거 유신시대와 같은 소소의 대의원들이 하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었다. 권력의 정당성과 전통성이 없는 정권이었다. 이는 큰 반발을 불러왔다. 전두환 정권은 야간 통행금지 해제, 프로야구를 포함한 프로스포츠 출범, 국풍 81과 같은 대규모 축제, 성인영화에 대한 검열 유연화 등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육성 등 유화책과 우민화 정책으로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고 정치권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지만,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국민적 저항은 계속됐다. 

1983년은 각종 사건사고로 정권에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이었다. 대표적 대형 금융비리 사건인 이철희 장영자 사건과 명성그룹 사건이 이 시기 터졌다. 두 사건 모두 권력과의 유착설이 크게 대두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 국면도 완벽히 극복되지 않았다. 여기에 대도 조세형 사건이 시중에서 큰 화제였다. 고위층과 부유층만 집을 상대로 절도 행각을 일삼았던 조세형은 의적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조세형의 대두는 당시 집권층에 대한 국민적 불만의 반영이었다. 

 

 


또한,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다시 뜨거워졌다. 대표적 야당 지도자 김영삼의 단식을 비롯해 사회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에 해외순방 외교는 정권의 치적을 쌓고 대내외에 정권의 정통성과 건재함을 과시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정재계를 총망라한 대규모 순방단을 구성했고 해외순방 외교에 대한 홍보 효과를 극대화했다. 전두환의 해외 출국과 귀국 시 대규모 환영 인파가 거리를 메웠다. 대부분 동원된 인원이었다. 여기에 언론과 미디어의 대대적이 보도가 뒤따랐다. 당시 뉴스에서는 메인 뉴스 9시 뉴스 시간이 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소식이 전두환의 동정과 활동이었다. 이에 당시 국민들은 9시 뉴스를 땡전뉴스라 말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83년 10월 보름 기간의 순방외교가 진행됐다. 문제는 버마 지금의 미얀마가 애초 순방 계획에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버마는 당시 아시아의 축국 강국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교류 비중이 크지 않았다. 실제 방문 시 정치, 경제적 실익도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버마는 친북 국가였다. 남북의 긴장 관계 속에서 위험 요소가 많은 버마 방문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버마를 순방국에 포함했다. 그 일정 중 우리의 현충원과 같은 버마 아웅산 묘소 참배 일정이 있었다. 아웅산은 버마의 독립영웅으로 버마 국민들에게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의 딸 아웅산 수치 여사는 버마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고 국가수반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아웅산 묘소 참배는 필요한 일정이었지만, 경호상 우려가 큰일이었다. 넓은 부지와 함께 참배지는 반개방 형태의 건물로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위험 속에 강행된 아웅산 묘소 참배는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참배 장소 천장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하면서 도열해 있던 정부 인사들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국가 경제정책을 이끌던 경제수석과 지금의 재정부 장관인 경제기획원 장관이 사망했고 외무부 장관도 희생됐다. 국가 최고 엘리트들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당시 내각은 정권의 호감도와 상관없이 크게 호평받고 있었다. 내각의 인재들의 희생은 나라의 큰 손실이었고 나라는 큰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테러에 의한 희생이었고 테러의 주체가 북한이었다는 사실은 국민들을 더 경악하게 했다. 

북한은 전두환의 해외순방 계획을 파악하고 테러를 준비했다. 이미 그 이전 전두환의 아프리카 순방이나 필리핀 순방 시에도 테러 계획이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북한은 버마와 우호관계를 형성하는 상황으로 북한인들의 버마 입출국에 큰 제한이 없었다.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들은 북한 상선의 선원으로 위장해 버마에 잠입했고 현지 북한 공간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아웅산 묘소 인근에서 노숙을 하며 테러를 준비했다. 그들은 테러 발생 2일 전 폭탄을 묘소 참배가 이루어지는 장소 천장에 설치했다. 2개의 폭탄과 화재 발생을 위한 소이탄이 있었다. 불행히도 참배 전 사전 점검은 그 하루 전에 완료됐다. 테러는 사전에 감지하고 대처할 기회가 사라졌다. 

사건 당일인 10월 9일 테러범은 전두환의 묘소 도착 시간인 10시 30분에 맞혀 폭탄을 폭발시켰다. 여기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갈 의전차가 고장으로 출발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그 몇 분의 차이는 전두환의 운명을 달라지게 했다. 마침 10시 30분을 즈음해 경호를 받는 고급 차량이 묘소에 도착했다. 버마 의장대의 연주가 시작됐다. 테러범은 폭탄을 폭파시켰다. 하지만 전두환은 없었다. 그 차량에 탑승하고 묘소에 들어온 이는 주버마 대사였다. 테러범은 그를 대통령으로 오인했다. 전두환은 간발의 차로 화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다수의 각료가 희생됐고 순방외교 일정은 중단됐다. 전두환은 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이후 테러범들은 버마 당국에 의해 체포됐고 사건 일체가 드러났다. 애초 배후 등에 대해 함구하던 테러범 2인 중 한 명인 강민철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며 자신의 북한 특수부대 요원이고 북한의 지령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고 테러범들이 소지하고 있었던 무기나 소지품 등에서 북한의 소행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북한의 테러는 국내외 모두에서 큰 분노와 비판을 불러왔다. 국내에서는 연일 북한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반공에 대한 의지가 더 강해졌다. 국제적으로도 북한은 테러국가로 낙인찍히며 외교적으로 어려움이 커졌다. 버나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이후 해외 수교국 숫자에서 남한은 북한보다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했던 버마는 친북한 국가였지만, 북한과 단교하고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더 강화했다. 북한으로서는 불량 국가의 이미지가 강해진 것이 외교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국내에서는 테러에 대한 국민적 규탄뿐만 아니라 보복 공격을 위한 계획이 준비되기도 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을 겨냥한 암살작전을 위해 부대를 구성하고 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게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전투 작전권이 없었던 한국의 독자적인 보복 공격을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미국은 이에 반대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1983년은 미국 LA 올림픽을 앞둔 시점이었고 한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 상황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북한의 테러를 규탄하면서 인내를 천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웅산 묘소 테러가 발생한 이후 남북 관계는 긴장감이 커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급속히 해빙 무드로 돌아섰다. 1984년 남한의 대규모 수해피해가 발생한 이후 북한은 수재 구호물자 제공 의사를 밝혔고 남한에서 이를 받아들이면서 남북 간의 물자 교류가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남북 당국 간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는 적십자 회담 등 지속적인 회담으로 연결됐다. 이런 해빙 무드 속에서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은 대중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와 함께 테러 사건의 범인들 또한 그 존재가 잊혀졌다. 버마 당국에 체포된 북한 테러범 중 한 명은 사형이 집행되었지만, 사건의 진상을 밝힌 강민철은 사형이 유보되면서 버마 교도소에서 그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는 남한행을 원하기도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건을 부인한 북한에서도 그는 언급되지 않았다. 결국, 테러범은 소모품이 되면서 남북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이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남한 당국으로서는 그를 송환해 사건의 진상을 더 상세히 밝히고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움직임은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북한을 규탄하는 분위기 속에서 정권의 위기 국면을 넘겼지만,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은 소홀함이 있었다. 이는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분위기마저 퇴색하게 했다. 이렇게 안타까운 죽음은 우리 역사 한편에만 기록되었을 뿐이었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은 반 인륜적 범죄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고한 목숨이 그 테러로 사망했고 국가적인 손실이 컸다. 북한은 남한 대통령의 암살과 함께 또 다른 계획을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당성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6.25 전쟁 후 지속된 북한의 군사도발과 테러는 우리 민주화 운동에 있어 큰 장애물이었다. 독재 정권은 북한의 위협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독재 정권은 민주화 투쟁 세력을 친북으로 몰아 탄압했다. 이는 1970년부터 계속되고 있고 지금도 색깔론을 정치에 악용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은 파괴된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엄연히 세습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북한의 비 민주적 통치체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있다. 과연 민주화 운동 세력이 북한 체제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동안 북풍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한의 각종 테러와 도발은 우리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 이제 체제 경쟁은 끝났고 민주주의 시스템의 우월함은 입증되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도 더 견고해졌다. 북한이 구시대적 군사도발과 테러 등으로 우리 사회를 흔들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2021년 당시 사건의 장소였던 버마, 지금의 미얀마가 군부 독재의 사슬을 벗어나지 위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다. 미얀마인들은 죽음을 각오한 항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미얀마 군부는 총칼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있다. 다수의 희생도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의 군부 지배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발생 때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우리는 그 아픔을 딛고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모두 이루어냈지만, 미얀마의 민주주의는 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길 기원하며 당시 희생자들에 대해 다시 한번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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