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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36회] 국내 유일 섬 자치구, 부산 영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9. 2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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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제1의 항구 도시 부산은 작은 항구 도시였지만,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도시로 발전했다. 낙동강 전선이 최후의 보루가 되면서 부산은 임시 수도로 기능했고 전쟁을 피해  다수의 피난민들이 몰렸다. 그 피난민들은 곳곳에 터전을 만들고 정착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상당수 사람들은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전후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와중에 부산은 수출 항구가 됐고 도시의 발전도 빠르게 진행됐다. 지금은 인구 300만 명이 훨씬 넘는 대도시가 됐다. 

부산에서 영도구는 특이하게 국내 유일의 섬으로 이루어진 자치구다. 다리로 연결되어 육지와의 통행이 원활하지만, 대도시 속 섬이라는 특색이 있다. 과거 영도구는 절영도로 불렸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을 정도로 긴 역사가 있는 곳이다. 고려 시대에는 말의 명산지였고 이곳의 말은 그림자가 안 보일 정도로 빠르다 할 정도로 유명했다. 절영도라는 옛 이름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바다와 접하는 부산과 어울리는 섬 영도구를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36회에서 찾았다. 그곳에서 영도구를 중심으로 부산의 과거의 현재를 함께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도구로 향하기 전 부산의 명소인 송도해상케이블카에 올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과 함께하는 송도해상케이블카는 인근의 바다를 따라 만들어진 용궁 구름다리와 더불어 이 지역의 중요한 관광명소로 자리했다. 부산의 멋진 바다 풍경과 함께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영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인 영도대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영도다리라는 말이 더 익숙한 국내 유일의 도개교, 다리 일부가 들려 배가 지나갈 수 있는 다리다. 1934년 일제 강점기 건설된 이 다리는 노후화로 사용이 중지되었다가 2013년 영도대교로 확장 복원되어 도개교로 사용되고 있다. 다리 상판이 들려 세워지는 장면을 보기 위해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이 영도대교에는 6.25 한국전쟁의 아픈 기억이 함께 하고 있다. 당시 영도대교는 부산에 자리 잡은 피난민들에게는 중요한 만남의 장소였다.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피난을 내려온 탓에 생사를 알 수 없이 헤어진 가족 친지들을 찾으려는 피난민들로 이 다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영도대교는 피난민들의 한과 아픔, 혈육을 찾고자 하는 희망이 뒤섞인 공간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뒤로하고 영도대교 위로 차량들이 무심히 지나고 있었다. 

그 영도대교 넘어 영도구의 산동네는 찾았다. 경사진 산비탈을 따라 형성된 마을은 6.25 한국 전쟁 때 피난민들이 산을 깎아 마을을 형성하고 지금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좁고 가파른 길을 따라 걸었다. 그 마을 한편에서 송편을 만드는 주민들을 만났다. 전국 각지에서 온 피난민들의 마을답게 송편 역시 각양각색이었다. 송편 말고도 이 마을은 다양한 음식 문화가 공존한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오랜 세월 그들의 음식을 이웃들과 나누며 실향의 아픔을 보듬었다. 그때의 피난민들 중 상당수는 세상을 떠나고 어른 시절 이곳에 온 이들은 노년이 됐지만, 음식을 나누는 마을의 전통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 따뜻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비 오는 길을 걷다. 선박을 수리하는 조선소들이 모여있는 마을과 만났다. 깡깡이 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바다를 누비는 선박들이 고장을 수리하고 정비하는 곳이었다. 특히, 바닷물에 부식되면서 생긴 선박 표면의 녹을 제거하기 위해 배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때 나는 소리가 마을의 이름이 됐다.

한 수리 조선소에서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 작업장에는 노년의 할머니들이 다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망치로 배를 두드리고 녹을 제거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 90년 전통의 조선소에서 40년 경력의 80대 할머니 기술자를 만났다.

그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이 일을 시작했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 그 사이 그의 몸 곳곳에는 반복된 중노동으로 인한 후유증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는 물론이고 함께 일하는 이들 대부분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수리 조선소 일은 일의 강도에 비해 보수가 적어 남성들이 기피하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일은 상당수는 여성들이 하기 시작했고 수십 년의 경력자가 생겨났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노년의 기술자들은 오늘도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이들은 이 일을 통해 하루하루를 행복한 강한 성취감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깡깡이 마을에서 가족들을 위한 어머니들의 사랑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이분들이 고단함을 덜고 보도 편안한 노년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도 가졌다. 

 

부산의 야경 - 픽사베이

 

다시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오래된 마을을 걸었다. 그 길에 세월의 흔적 가득한 한 분식집이 보였다.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이 찾는 이 분식집은 같은 장소에서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켜왔다고 했다. 벽면 가득한 졸업생들의 사진과 그들의 글이 담긴 메모장들이 이곳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과거 중장년층들의 학창 시절 중요한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던 분식집이었지만, 이곳에서 만난 분식집은 과거가 아닌 지금도 학생들이 즐겨 찾고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분식집의 사장님은 세대를 초월해 학생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학생 손님들에 맞는 메뉴를 지속적으로 개발했다. 단골 학생들의 이름을 딴 메뉴는 그런 소통의 중요한 산물이었다. 이런 사장님의 노력은 학생들이 계속 이곳을 찾게 하는 이유가 됐다. 사장님은 지금도 부모와 이모의 마음으로 요리를 하고 학생들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렇게 쌓인 신뢰는 수십 년의 세월 이 분식집이 세월의 흐름 속에도 학생들의 변함없이 찾는 명소로 자리하게 했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학창 시절 추억을 쌓아가고 있었다.

다시 나선 길 영도구의 명소인 흰여울문화마을을 찾았다. 바닷가 절벽을 따라 형성된 마을은 예쁜 색을 칠해진 집들과 바다 풍경과 어울리는 벽화가 이색적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만나는 바다 풍경은 마을의 풍경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과거 낙후된 동네였던 이곳은 영화 촬영지로 알려졌고 독특한 풍경과 분위기로 많은 외지인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이에 자치구 차원에서 마을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홍보를 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유명 관광지가 겪는 문제점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가 발생하고 애초 문화마을의 취지와 달리 문화 예술인들이 떠나고 그 자리를 각종 카페 등이 차지하면서 정체성이 흔들리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또한, 본래 삶의 터전이 이곳에 각종 상업시설과 방문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주민들의 불편이 커지고 있기도 하다. 흰여울 마을과 비슷한 곳이 겪는 공통의 고민인 지역의 정체성과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조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한 흰여울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한 예술가를 만났다. 자신이 만든 목각 인형으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대중음악가로 성공을 꿈꾸기도 했지만,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생계를 위해 목각인형 제작을 시작했고 음악가의 경력을 살려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작업실에는 다양한 모양의 목각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이 많은 목각 인형들과 달리 그의 작품은 어른들은 위한 캐릭터가 대부분이었다. 공연 역시 어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현대사의 큰 파고를 견디며 살아온 중장년층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고 했다. 그의 노력이 문화 마을의 콘텐츠를 보다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다시 길을 걷다 목선 만드는 일에 열중인 청년들과 만났다.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목선 제작은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수적이라 했다. 이들은 다른 일을 하다 목선을 만드는 일이 좋아 마음을 모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 이 일을 자리를 잡지 못한 탓에 생계를 위해 별도의 아르바이트 등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고 여전히 그 어려움은 진행형이다. 이에 목선 제작을 위해 일하는 이들과 그들의 공방 유지를 위해 다른 일을 하는 이들이 돌아가며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힘든 현실 속이지만, 이 청년들은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크게 만족하며 힘차게 하루하루의 삶을 채워가고 있었다. 이들은 이 일을 바탕으로 향후 그들이 운영하는 해양문화공간을 만드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의 도시 부산과 어울리는 장소가 탄생되길 기대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가파른 고갯길이 끝없이 펼쳐진 한 마을을 찾았다. 과거 느낌 가득한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에 예쁜 꽃신을 만드는 공방이 보였다. 이제는 사극 드라마에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귀해진 꽃신이 이 공방에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공방은 아버지와 그의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아들로 이어지며 4대에 걸쳐 가업으로 전승중이었다.

 

부산 바다 - 픽사베이



아버지는 10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 일을 물려받았다.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그는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을 발전시켜 장인이 됐고 이제는 그 기술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있었다. 과거와 달리 그 수효가 크게 줄었지만, 이들은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장인은 사람이 걷는 게 아니라 신이 걷는다는 느낌으로 꽃신을 만든다고 했다. 일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명감과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 이는 외롭게 힘든 전통 꽃신 제작을 길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아들이 있다. 

여정의 막바지 영도의 바닷가 포구를 찾았다. 그곳에서 물질이 한창인 해녀분들을 만났다. 제주를 먼저 떠올리는 해녀지만, 이곳의 해녀분들은 수십 년의 세월 부산의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부산의 바다는 이들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일터이기도 했다. 10대 시절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시작한 해녀 일이 평생의 직업이 됐다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모진 세월 속 회환이 깊게 베어 있었다. 

바다에서 방금 나온 해녀분들의 손에 들린 미역인 듯 다시마인듯한 해초가 눈에 들어왔다. 곰피라 불리는 이 해초는 과거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 지역민들, 특히, 전쟁 당시 부산에 왔던 피난민들에게 소중한 양식이었다. 부산 바다에서 많이 나는 곰피는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다. 그 곰피로 사람들은 곰피밥과 여러 반찬들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별미가 됐지만, 당시 곰피는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존재였다. 곰피에는 과거 아버지, 어머니의 삶의 녹아들어 있다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느낄 수 있었다. 

부산 영도구는 우리 현대사의 아픔과 이후의 변화를 섬 안에 가득 담고 있었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과거 알려지지 않았던 보통의 역사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영도구에서의 시간은 장면 장면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하는 영도구 영도구를 품고 있는 부산이 또 다른 역사가 보다 밝고 건강하게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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