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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북촌] 정독도서관 가을 풍경, 신여성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삶 살필 수 있었던 서울교육박물관

발길 닿는대로/도시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10. 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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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북촌은 산업화의 흐름 속에 과거 흔적들을 다수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북촌은 도심 속에서 느낄 수 없는 감성 가득한 곳으로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서울의 명소가 됐습니다. 최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심화되고 상업화된 시설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원형이 훼손되는 등의 문제도 있습니다. 인근 서촌이나 유사한 감성의 장소들이 늘어나면서 발걸음이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잘 보존된 한옥과 골목길, 그런 분위기에 맞는 박물관과 문화, 예술 시설들이 공존하는 곳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정독도서관은 북촌을 찾는 이들이 방문이 많은 곳입니다. 정독도서관은 과거 경기고등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경기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이후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독도서관 건물은 1938년 지어졌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신의 스팀 난방방식을 도입한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우리 건축사 연구에 있어 소중한 유산입니다. 이에 몇몇 동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가치가 큰 정독도서관은 현재 시민들이 찾는 도서관이자 지역의 명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도서관 부지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교육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서울 각지에 흩어져있던 교육 관련 역사사료나 자료를 보관하고 있고 시대별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마침 가을이 깊어가는 시점에 이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을 느낌으로 채워지고 있는 북촌과 정독도서관을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교육 박물관에서는 옛 추억 가득한 자료들도 만났습니다. 한편에서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김란사의 삶을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전시공간도 있었습니다. 그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가을 빛으로 물들어 가는 정독도서관 

 

 

 

 

서울 교육 박물관

 

 

추억 가득한 전시물

 

 

청년들에게는 낯선 과거 학교의 모습들

 

 

운동회

 

 

그 땐 그랬지

 

 

서당
서원
무과 시험
문과 시험

조선시대

 

 

개화기 교육, 6.25 한국전쟁 당시 천막 학교

 

 

김란사와 만나다.

그의 삶을 표현한 작가들이 그림 작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란사의 삶

 

 

김란사는 1872년 태어나 191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던 집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집안의 내력은 그가 어려서부터 서구의 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일을 도우며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을 몸소 겪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1893년 21살의 나이에 17살 연상의 배우자 하상기와 혼인을 했습니다. 당시 하상기는 전 부인과 사별 후 재혼이었습니다. 김란사 역시 봉건적 악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시대속에 사는 여성의 굴레는 벗어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혼인은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하상기는 당시 대한제국시기 인천, 원산, 부산 등 개항장에서 통상업무를 하는 관리였습니다.

 

 

그 역시 서구 문물과 사상 등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 깨어있는 지식인이었습니다. 하헌기는 자신들의 배우자를 억압하는 봉건적 사고의 기존 남성들과 달랐습니다. 김란사가 자유롭게 교육을 받고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배우자 하헌기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그의 후원 속에 김란사는 1894년 서양 선교사가 설립한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에 입학하려 했습니다.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과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시기 김란사는 교육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가 더 많이 배우고 지식을 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 학교는 금혼 학칙이 있었고 이에 따라 김란사의 입학은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김란사는 수차례 입학을 위해 학장을 만났습니다. 김란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장과의 면담에서 "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들이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호소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정성이 통했고 1894년 그는 이화학당에 입학해 영어와 신학문을 공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에 귀의한 김란사는 낸시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그 세례명을 이름을 란사로 개명했습니다. 김란사의 삶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이후 김란사는 앞선 서구 문명을 배우기 위해 적국인 일본 유학을 하기도 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1906년 미국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김란사는 귀국해 이화학당의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함께 했습니다. 3.1운동 당시 대표적 독립운동가였던 유관순과의 만남도 이때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더해 김란사는 봉건적 사고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폄하하고 기존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여성들의 인권 신장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여성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김란사는 대외 활동에서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어 그의 통역사로 활약하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가 도래한 이후에는 해외에서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나서기도 했습니다. 1918년에는 미국에서의 모금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 설치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김란사에 대해 일제가 감시의 시선을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칫 신변의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었지만, 김란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고종의 밀명을 수행하던 김란사는 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3.1 운동 이후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출국했습니다. 중간 귀착지인 베이징에 머물던 김란사는 그곳에서 식사 도중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의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활동을 감사하던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지만, 밝혀진 건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그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외동딸이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그의 남편 하헌기 역시 그의 사망 후 얼마 안가 사망하면서 그의 혈육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에 그는 사후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고 그의 유품 등도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그의 독립운동의 기록도 묻히고 말았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조카 등의 후손들에 의해 그의 활동이 알려졌고 1995년건국훈장이 추서됐습니다. 긴 세월을 지난 이후였습니다.

 

 

그의 삶은 독립운동에 있어 남녀가 따로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여전히 여성들의 활동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최근에서야 관심이 늘어나고 그 활동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부족한 사료와 함께 관심도 낮았습니다. 김란사는 여성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이었고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국에서 그의 뜻을 다 펼치지도 못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우리 독립운동사의 재발견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 때문에 그와 만난 잠깐의 시간은 저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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