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남부에 자리한 관악구는 지역의 역사가 우리 산업화 역사와 함께 한다. 관악구는 1973년 영등포구에서 분구되어 그 역사를 시작했다. 이후 관악구는 지방에서 서울로 일거리를 찾아온 이들이 하나 둘 터를 잡고 살면서 인구가 늘었고 대표적인 서민 거주촌이 됐다. 지금도 서울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달동네가 있다. 그만큼 발전이 더디고 개발과 거리가 먼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관악구에는 서울의 대표적인 산 관악산이 있고 최고 대학교인 서울대학교가 있다. 여기에 고려 시대 최고 장군 중 한 명이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가 있다. 과거와 현재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장소들을 품고 있는 곳이 관악구다. 최근에는 개발의 바람이 이곳을 서서히 잠식하면서 대단지 아파트와 서민 주거 단지가 공존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51회에는 2022년 새해 첫 방문지로 관악구를 찾아 동네 구석구석과 관악구를 터전 삼아 살고 있는 이웃들을 만났다.
관악산에서 보는 일출을 시작으로 시작한 여정은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관악구를 거쳐 흘러가는 도시 속 하천 도림천 산책로로 이어졌다. 도림천은 산업화를 거치며 크게 오염되며 죽은 하천이 되기도 했지만, 꾸준한 정화작업과 노력을 통해 생태 하천으로 거듭났다. 지금은 지역민들에게 자연과 접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가 됐다. 산책로를 따라 걷던 중, 클래식 선율이 들렸다. 한 악단이 연주 중이었다.
70대 어르신들이 다수 포함된 악단은 지역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 상당 수는 늦은 나이에 악기를 배웠다. 비록, 프로의 완숙미 넘치는 연주는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재능을 함께 나누려는 이들의 정성과 노력이 그 음악을 더 가치있게 했다. 코로나 상황이 나이지고 이들의 공연이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
서울의 지하철 역중 가장 복잡하기로 이름난 신림역의 출퇴근 길을 찾았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직장인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거리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 풍경 속 특이한 노점 가게가 보였다. 500원 핫도그 집으로 불리는 그 가게에 가니 실제로 핫도그 가격이 500원이었다. 5천원으로 한 끼 식사를 할 장소를 찾기 힘들 정도로 물가가 오른 현실에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가격이었다. 가게의 사장님에게 물어보니 20년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가 있었다. 사장님은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 IMF 경제 위기 당시 큰 실패를 경험했다. 이후 그는 노점을 시작했고 핫도그는 20년 동안 그의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는 핫도를 포함해 먹거리 노점을 통해 다시 재기를 했다. 그는 힘든 시절 그의 핫도를 찾아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가격을 올리지 않고 유지했다. 그는 70대 노인이 됐지만, 지금도 핫도그를 수작업으로 만드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20여 년 전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노점상이 이제는 그의 삶과 함께 하는 일이 됐다. 지금도 그는 신림역을 오가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부담 없이 자신의 가게를 찾고 핫도그를 즐기는 모습에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그의 핫도그는 500원의 가격이지만, 그의 삶이 담겨있는 돈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가치가 담겨 있었다.
500원 핫도그의 기분 좋은 기억을 뒤로하고 어느 오래된 주택들로 채워져 있는 동네를 찾았다. 그 동네 어느 집 정원에 모여있는 주민들과 만났다. 동네 노인들이 중심이 된 그들은 마술을 배우고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배운 마술을 바탕으로 예술단을 만들고 지역 곳곳을 다니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배운 기술을 께 나누며 지역민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 예술단을 이끄는 이는 노년의 신사였다. 그는 과거 사업을 하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사업이 실패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힘든 시기 배우기 시작한 마술은 그의 삶에 큰 활력소가 됐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그는 그의 재능을 지역의 노인들에게 전수하고 뜻을 모아 예술단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그를 중심으로 노인 예술단은 마술을 배우고 익히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연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여정을 이어갔다.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의 새로운 핫 플레이스를 찾았다. 서울대 정면의 조형물에서 이름을 딴 샤로수길이 그곳이었다. 얼마 전까지 쇠퇴한 상권이었지만, 오래된 건물들 곳곳에 젊은 감각의 카페나 식당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과거와 현재이 트렌드가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 됐다. 이에 젊은 층들의 발걸음을 이끌면서 지역의 명소로 변모했다. 그 거리에서 한 주꾸미 식당을 운영하는 모자를 만났다.
모자가 운영하는 식당의 주꾸미는 양념 주꾸미 구이에 치즈를 얹어 독특한 맛을 내고 있었다. 샤로수길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메뉴였다. 식당의 사장인 아들은 자신의 고안한 기구를 이용해 구이가 타는 걸 방지하고 골고루 익도록 했고 그가 개발한 특재 양념에 치즈를 더해 매운맛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그 독특함은 손님들의 발걸음을 이끌어냈고 8년간 샤로수길에서 식당이 성업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었다. 핫한 상권에서는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식당가 가게가 부지기수지만, 모자의 주꾸미 식당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들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식당만의 시그니처 메뉴로 우뚝 섰다. 어머니는 그의 곁을 지키며 아들을 응원했다. 그를 묵묵히 지지하고 도운 어머니의 존재는 그가 기 시련의 시간을 버티게 해준 또 하나의 힘이었다. 거듭된 실패 속에서 모자는 성공의 방정식을 발견했고 그 성공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었다.
잠시 관악구의 역사적 장소를 찾았다. 앞서 언급한 강감찬 장군의 탄생설화가 함께 하는 낙성대 공원을 찾았다. 낙성대라는 이름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설화에 근거해 지어졌다. 지금의 그의 생가터에는 고려 시대 세워진 석탑이 있고 강감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동상이 있었다. 그곳에서 국난 극복을 이끈 영웅의 발자취와 함께 했다.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왔다. 과거 지역을 대표했던 장소였던 신림동 고시촌을 찾았다. 이곳은 사법고시를 포함해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들이 집단 거주지로 유명했다. 하지만 사법고시가 폐지되는 등 시대 변화에 따라 과거의 북적임은 사라졌다. 그 일대를 채웠던 고시생들도 대부분 떠났고 지금은 보다 값싼 주거지를 찾는 젊은 층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성공의 꿈을 위해 온 힘을 다하던 청춘들이 열정이 가득했던 고시촌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를 찾았다. 50년 역사의 옷 수선집이 그곳이었다. 노년의 부부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옷 수선집은 고시촌의 역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과거 이 옷 수선집은 가난한 고시생들의 옷을 수선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고시생들에게 옷 수선집은 소중한 곳이었다. 하지만 고시촌이 쇠퇴하면서 옷 수선집도 손님의 발걸음이 크게 줄었다. 가끔 옷을 수선하는 손님들이 드문드문 들를 뿐이다.
이런 변화 속에 노부부는 일을 놓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삶과 함께 한 옷 수선집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수입은 크게 줄었지만, 옷 수선집은 그들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부부는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신림동 고시촌의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로 또 다른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과거의 현재의 감성이 공존하는 골목길을 다시 걸었다. 그 길에 화사한 꽃들로 채워진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카페는 차를 주문하면 꽃을 장식해 내어주고 있었다. 작은 꽃 장식은 손님들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세팅됐다. 꽃향기와 함께 하는 차는 시각과 후각, 미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독특함이 있었다. 이 카페의 청년 사장은 자신의 플로리스트로서의 이력과 경험을 접목해 어디서도 보기 힘든 카페를 만들었다. 청년 사장의 열정과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장소였다.
꽃 카페의 향기를 뒤로하고 지역의 신원시장을 찾았다. 과거 도림천 일대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이 하나 둘 모여 만들어진 이 시장에도 아이디어 번뜩이는 식당이 있었다. 돈가스를 포함해 다양한 메뉴가 있는 시장 식당은 가족이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이 식당에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육회라면이 있었다. 최고 등급의 소고기와 특재 양념, 결합한 비빔라면은 매우 독특했다.
이 식당의 남편은 과거 전통 무술을 연마하며 도장을 운영했던 이력이 있었다. 하지만 도장운영은 여의치 않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 가정의 생계를 위해 식당을 시작했다.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들이 희생되는 상황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남편은 아내와 함께 식당 일을 시작했다. 식당을 하면서 수없이 임차인의 서러움을 겪으며 눈물짓는 일도 많았지만, 이제는 번듯한 식당으로 자리를 잡았고 가업이 됐다. 이 식당의 주메뉴인 육회라면은 아들의 아이디어였다. 남편은 지금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마음 한편에 간직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아내는 과거 남편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루하루 삶에 충실하며 식당을 지켜가고 있었다. 시련을 이겨낸 가족의 식당은 그래서 특별하게 다가왔다.
여정의 막바지 오래된 달동네 마을을 찾았다. 이제는 생소한 말이 된 달동네는 산비탈에 서민들의 옹기종기 모여 거주하던 마을이었다. 관악구의 마지막 달동네도 개발을 앞두고 주민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면서 쓸쓸한 분위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 마을 한편에 고물상이 있었다. 노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고물상은 아직 지역에 남아있는 노인들에게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고물상은 폐지를 주워 이곳을 찾는 노인들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들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등 따뜻함이 있는 공간이었다.
고물상은 운영하는 노년의 부부는 힘들었던 시절을 견뎌내며 지금에 이르렀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남편은 남의 집 머슴살이는 하는 등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내는 어린 나이에 남편을 만나 가난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함께 힘든 시절을 보냈다. 한때 남편이 큰 병을 얻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부부는 함께 그 시간을 극복했고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힘들었던 삶의 여정을 견딘 부부에게 고물상을 오가는 노인들의 모습은 남 같지 않았다. 큰 도움은 되지 않아도 말 한마디를 건네는데 조심스럽고 조금이라도 편안한 마음을 가지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부부는 힘든 삶의 여정 속에서 하루하루 나아지는 삶을 살아온 그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의 삶은 산업화 시대 가난을 이겨내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고물상 부부는 오늘도 버려지는 것들이 모여드는 고물상에서 보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루하루는 소중하기만 하다.
이렇게 관악구에서 만난 이웃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비록 화려하고 멋진 모습은 아니지만, 이웃들은 보석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닥친 시련은 삶의 원석을 다듬어 멋진 지금을 만들어줬다. 관악구에서 만난 이웃들의 삶이 이제는 보석처럼 빛나길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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