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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북동부 지역에 자리한 남양주시는 1980년 양주군에서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만들어지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미금시와 통합되어 남양주시로 자리를 잡았다. 남양주시는 서쪽으로 서울과 구리시, 동쪽으로 가평군과 양평군, 남쪽으로 경기도 광주시와 하남시, 북쪽으로 의정부시와 포천시와 접하고 있다. 서울의 3/4 이르는 넓은 면적에 주변의 시군구와 연결되는 도로망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런 남양주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신도시다. 일찍 수도권 신도시로 자리한 남양주는 도시 곳곳이 개발되어 도시 속 도시를 형성하고 주변에 농촌이 공존하는 도농복합도시이기도 하고 다핵 도시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서울의 위성도시로 베드타운 형태로 개발되었지만, 최근에는 2기, 3기 신도기가 들어서고 추가될 예정이다. 현재 남양주시는 인구가 고양시에 이어 경기 북부지역에서 두 번째로 많은 70만명을 넘어서는 거대 도시이기도 하고 자족 도시로의 발전 가능성도 모색 중이다. 

이렇게 도시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남양주시에는 곳곳에 역사 문화 유적지 등 과거가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49회에서는 이 남양주시를 찾아 도시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과 그 대조적인 두 가지 요소를 슬기롭게 조화시키며 살아가는 이웃들과 만났다.

시내를 탐방하기 전 근대 역사 유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조선왕릉을 찾았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과, 순종과 두 황후가 합장된 유릉이 있었다. 조선 후기 대한제국 시가와 일제강점기까지 큰 변화와 민족의 수난 시기를 함께 했던 두 왕이 잠들어 있는 능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은 즉위 초기에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성인이 된 이후에는 명성황후 민씨 세력에 밀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이후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 고종은 나름의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맞섰지만, 이미 기울어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한 후 1919년 의문 가득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아들 순종은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에 올랐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고 한일강제 병합 시 황제로 망국의 군주가 되는 비운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망국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은 이제 독립된 나라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서 역사의 순간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 주택들이 자리한 마을을 찾았다. 마을 한편에서 연탄봉사를 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남성이 있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인근에서 치킨가게를 운영한다고 했다. 그는 본업과 함께 시간만 나면 마을 곳곳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봉사활동의 경력도 됐다. 본업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지만, 그의 아내가 체념반 응원반의 심정으로 그를 지원하면서 마음껏 봉사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그의 봉사활동은 불우이웃을 돕는 것에서 남양주와 접한 한강 수계의 구조, 사고예방 활동 등 다양했다. 과거 젊은 시절 특전사에서 복무하며 다진 체력이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의 삶과 봉사가 함께하게 된 건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군 복무 시절 군부대 복귀를 위해 타고 있는 자전거의 반납을 지인에서 부탁했었다. 휴가로 집에 온 그는 그 지인이 자전거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됐다. 이에 그는 큰 자책감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틈만 나면 사고 현장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슬픔 속에만 머물지 않고 남을 위해 살아가려는 다짐을 했고 봉사활동이 그의 생활 속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그는 봉사활동을 통해 삶의 가치를 높이고 젊은 시절의 다짐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한적한 마을 길을 걸었다. 그 길에 길가에서 작업을 하는 두 여성이 보였다. 그들은 나전칠기를 만드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들을 따라 찾아간 공방에는 50년 경력의 장인의 작업이 한창이었다. 국가에서도 기술이 공인된 그 장인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져진 기술과 관록을 바탕으로 멋진 공예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그의 기술을 두 딸에게 전수하며 나전칠기 공예의 맥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통상 공예 기술은 아버지에서 그 아들도 또 다른 아들로 전해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곳으로 아버지와 딸이 함께 하는 장면이 이채로웠다. 오히려 여성의 섬세한 손길이 공예품을 더 돋보이게 하는 듯 보였다. 아직 기술은 아버지에 비해 부족함이 있지만, 두 딸은 함께 마음을 합쳐 가업이 된 나전칠기의 역사를 지키고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 세 사람이 함께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전통을 이어가는 또 다른 이가 이곳에 또 있었다.  마을 주민들을 따라가다 만난 전통 궁중요리 장인을 만났다. 그는 과거 조선시대 마지막 궁인이었던 이웃 할머니의 궁중요리 비법을 전수받아 그 비법을 발전시키고 제자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배움의 과정은 혹독했지만, 그렇게 배운 요리는 그의 자부심이 됐다.

전통 궁중요리의 맛을 내기 위해 장인은 된장과 간장을 직접 담기고 오랜 세월 숙성하고 각종 약초를 발효시켜 활용하는 등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전통의 지키는 일이 어렵긴 하지만, 그는 그와 함께 하는 제자들이 있어 그 부담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그의 손길에서 나온 수라상은 정갈하면서 격조 높은 한 상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 음식문화의 멋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도시 속 마을 길을 걷다 겉 보기에도 오래돼 보이는 남성 이용원을 찾았다. 그곳은 헤어숍이기도 했지만, 남성용 가발을 제작하여 착장해주는 곳이었다. 남성 헤어스타일을 창조하고 멋지게 만들어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50여 년의 역사가 있는 이 이용원의 사장님은 일터와 가정집을 분리하지 않고 연결되도록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사장님은 그의 아들딸과 함께 가업으로 이용원을 운영하고 지키고 있었다. 이용원은 긴  세월 변하지 않았지만, 이용원을 찾는 손님들은 멋진 헤어 스타일링을 받으면서 기분 좋은 변신을 경험하고 있었다. 수십 년 이발 장인과 그의 수재자인 자식들의 손길에서 손님들은 잃어버렸던 세월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도시 지역을 벗어나 남양주의 남쪽면과 접하는 팔당호 수계의 한강변의 멋진 풍경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이자 발명가, 개혁가이기도 했던 정약용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정약용의 생가터와 여유당이라는 정자, 그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부흥기였던 영조와 정조시대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다방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의 학문은 보다 부강한 나라와 국민들의 삶을 편안하고 윤택하게 만드는데 집중됐다. 대표적으로 우리 중요한 문화유산인 수원 화성 축조 시 사용된 거중기가 있다.

정약용은 정조 사후 수구 세력들이 재집권하면서 실각되어 긴 유배길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생가와는 까마득하게 먼 전남 강진에서 긴 세월 귀향 생활을 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난 이후 큰 상실감과 불안감에 빠질 수 있었지만, 정약용은 유배 기간을 학문의 깊이는 더하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그 결과 그는 강진에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대부분 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고 일상을 보다 편리하게 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실학의 중요한 정신인 실사구시의 기본을 그는 평생 잃지 않았다. 이런 정약용의 발자취를 가까이에서 만나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한적한 농촌 풍경 속 사진 촬영에 열중하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가 모델이 되고 촬영 스태프가 되면서 촬영 중이었다. 그들을 대표하는 사진작가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암 투병 중 남양주로 귀향을 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사진 촬영 결과물을 보고 행복해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사질 기술을 같은 암 환우들과 함게 나누고 싶었다.

그는 틈만 나면 암 환우들과 출사길에 나서 그들의 멋진 모습을 담고 있다고 했다. 긴 투명에 지친 암 환우들은 촬영을 하는 순간만큼의 행복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기 위해 그리고 그와 같은 처지의 암 환우가 돋보이도록 도우면서 투병의 고통을 잊고 불행 대신 행복으로 그들의 일상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런 특별한 출사가 아주 오랜 세월 이어지길 기원했다. 

 

 


주택가 마을을 찾았다. 그 길의 끝에 작은 갤러리가 보였다. 그곳에 가니 독특한 그림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기법이나 표현이 일반과 다른 감성이었다. 이 작품은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의 작품을 그의 부모가 전시한 것이었다. 부모님은 아들의 아픔에 좌절하기보다는 아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 아들이 높은 집중력을 발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후 부모님의 지지와 후원 속에 아들은 어엿한 화가로서 삶을 살 수 있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은 지금도 아들의 든든한 후원자로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자칫 불행으로 채워질 수 있는 가족들의 삶이었지만, 아들의 그림은 이 가족에게 희망이 됐다. 그래서 이 갤러리는 그 어느 갤러리보다 빛나고 가치 있어 보였다.

여정의 막바지 한강변의 산책길을 걸었다. 겨울의 빛으로 채워진 산책로는 다소 쓸쓸하고 허전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 허전함을 채워줄 곳이 있었다. 30년 넘게 가업으로 이어지는 식당이 그곳이었다. 그곳에서는 특별한 맛의 국수가 있었다. 차가운 오이소박이 국수가 방문자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이곳의 오이소박이국수는 실향민 출신의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다시 그 아들로 이어지며 그 맛을 지켜가고 있었다. 지금은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국숫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머니의 손맛에 아들의 체계화된 레시피와 관리기법이 더해져 한층 업그레이드된 국수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런 아들이 안쓰럽고 아들이 더 나은 미래를 포기한 게 하는 걱정이 있고 아들은 고생하는 어머니가 걱정이다. 이런 모자의 걱정과 서로를 향한 마음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수십 년 국숫집을 든든히 지켜가는 힘이 되고 있었다. 

남양주시는 대표적 신도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과거의 전통도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신도시라면 기존의 것을 모두 부수로 없애고 다시 지어올리는 게 보통이지만, 남양주시는 도심이 곳곳에 자리한 탓에 그 과거가 공존하는 틈이 생길 수 있었다. 이는 이 도시를 콘크리트 건물로 획일화된 도시가 아닌 다양성이 함께 하는 도시가 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앞으로 남양주시가 다양성을 조화시켜 그들만의 도시 색깔을 만들어가길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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