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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경상남도 서남해안과 만나고 서로는 전라남도 여수와 동으로는 통영의 바다, 남으로는 넓은 남해바다와 만나는 섬 남해군은 전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지금은 섬과 육지로 연결되는 다리가 놓이고 섬이라 할 수 없지만, 한려해상 국립공원에도 일부가 포함된 멋진 해안의 풍경과 산림,  때묻지 않은 자연이 함께 하는 여행 명소이기도 하다.

해풍을 맞고 자라 맛있는 시금치, 마늘, 유자 등 특산물과 국가 주요무형문화재와 명승지로도 지정된 전통 어로방식인 죽방렴, 어살을 이용한 멸치가 유명하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47회에서는 볼거리 먹거리가 가득한 남해 바다의 큰 섬 남해군을 찾아 그곳의 명소와 사람들의 인생을 만났다. 

남해바다는 내려다보는 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암자인 보리암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설화가 함께 하는 남해 금산에 자리한 보리암은 그 유례가 삼국시대 신라 원효대사 때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가 깊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장군 시절 보리암에서 기도를 올리고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보리암은 양양의 낙산사,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와 함께 바다와 접하는 국내 3대 해수관음 기도 도량으로 손꼽힐 정도로 남해군의 중요한 명소다. 그 보리암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넓고 잔잔했고 세상의 모든 걸 품을 것처럼 광활했다. 그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남해의 구석구석을 찾아 나섰다. 

남해의 또 다른 명소이자 누군가에는 중요한 삶의 터전인 다랭이논 마을을 찾았다. 깎아지른 절벽을 계간해 대규모의 계단식 농지를 조성한 이 마을의 다랭이 논은 척박한 자연환경에 굴하지 않고 강한 의지로 삶을 개척한 우리 선조들의 중요한 유산이다. 남해의 다랭이 논은 바다와 접하고 있어 독특하면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금치 수확을 하고 있는 주민을 만났다. 이곳은 대대로 이어진 다랭이 논밭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다랭이 논밭은 봄에 물을 채워 논으로 활용하고 가을이며 밭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계단식 농지이기 때문에 기계를 사용하기 어렵고 사람의 손이 많이 가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농사일이 힘들지만, 오랜 마을의 전통을 지키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일하는 것 자체가 큰 행복으로 보였다.

그가 수확하고 있는  남해 시금치는 해풍을 만나 부드럽고 특유의 맛이 있다고 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중요한 남해의 특산물이기도 하다. 그를 따라 마을로 향했다. 좁고 꼬불꼬불 이어진 마을 골목길을 따라가다 그와 배우자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그 식당의 소박한 백반은 말 그대로 시골밥상 같은 정겨움이 있었다.  

다랭이 마을을 떠나 한적한 산촌마을로 향했다. 그곳에서 귀촌 7년 차의 노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도시에서 은행에서 일했고 사업을 하는 등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도시 실패로 큰 어려움을 맞이했고 마지막 남은 재산으로 연고도 없는 남해에 집을 마련했다고 했다. 낯선 남해였지만, 이곳은 도시생활에 지친 부부에게 소중한 안식처가 됐다. 여전히 불편하고 좁은 농가지만, 부부는 하루하루를 감사히 여기에 살아가고 있었다. 아내는 부부의 일상을 매일매일 일기로 쓰며 인생 황혼기의 여러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기도 있었다.

어렵게 여유를 되찾았지만, 부부는 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먼저 떠난 딸로 인해 다시 한번 마음이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어머니는 남은 삶을 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 벽 한 편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유족들이 해야 할 일과 영정사진에 쓸 사신을 붙여놓았다. 삶의 여정을 끝내는 시간 남은 가족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이렇게 하고 나서 어머니는 삶이 보다 편안해졌다고 했다. 그의 세상과의 이별이 가능한 늦게 더 늦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해 하면 떠오르는 돌들로 이루어진 해변이 아닌 고운 모래가 깔린 해수욕장을 찾았다. 그 모래는 곱고 촘촘했다. 물에 젖은 모래는 멋진 반영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모래사장을 걷다. 어머니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2명이 함께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나온 듯했지만,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9살 초등학생은 어머니가 40살이 훨씬 넘어 낳은 늦둥이 아들이었고 10살 초등학생은 그 어머니의 손자였다. 한 명에게는 엄마고 또 한 명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어머니였다. 9살 아들은 10살 조카가 10살 조카는 9살 삼촌이 있는 셈이었다. 처음에는 서로에 대한 호칭이 어색했지만, 이제는 삼촌과 조카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애초 늦둥이를 임신하고 낳기를 주저하기도 했지만, 자식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출산을 했다고 했다. 이후 어머니는 아들과 손자의 육아를 동시에 하고 있다. 가깝지만, 어색할 수 있는 삼촌, 조카 사이지만, 두 아이는 서로에게 멋진 삼촌과 조카가 되어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유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보리암에서 본 마을 전경 - 지후니

 


남해의 명소 중 한 곳이 독일마을로 향하는 길에 한 빵집에 들렀다. 독일식 빵을 만드는 이 빵집에도 남다른 사연이 숨어있었다. 빵집은 사장님은 40대 나이에 뒤늦게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남해에 열었다. 이후 틈틈이 익힌 제빵 기술 재능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50살이 넘은 나이에 제과제빵 자격증을 취득하고 고 빵 가게를 열게 됐다.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마침 독일인 지인이 전해준 독일빵 기술을 바탕으로 이 가게만의 빵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독일인 지인은 그에게 반려자까지 소개해 주고 50대 나이에 가정을 이루게 해준 인생의 은인이었다. 그에 대한 고마움은 지인의 가게 한편에 서있는 그의 흉상에서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남들이 늦었다고 여기는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50대 빵 가게 사장님의 도전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 길로 독일 마을로 향했다. 독일마을은 1960년대와 70년대 독일로 파독된 한국 광부와 간호사분들이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조성된 마을이다. 독일식 건물로 채워진 마을은 마치 독일의 어느 마을과 같았다. 이런 독특한 마을 풍경은 남해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의 방문으로 이어지며 여행 명소가 되도록 했다. 여행 명소로 먼저 알려진 독일마을이지만, 이 마을에는 과거 힘들고 어렵던 시절 더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가족들을 위해 이국땅에서 힘들고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청춘을 보낸 이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일했던 한국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현지인들이 하지 않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하면서도 누구보다 성실했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들의 번 외화는 상당수 고국으로 보내졌고 가족들의 삶에 큰 보탬이 됐고 나라 경제 발전에 중요한 발판이 됐다. 우리의 산업화와 한강의 기적에는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남해 독일마을은 고된 삶을 보낸 노년의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에게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하는 안식처가 되고 있었다. 그 마을에게 만난 파독 광부, 파독 간호사 노부부에게는 이제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워할 필요도 없고 일가친척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행복해 보였다. 남해 독일마을을 찾게 된다면 그 안에 담긴 우리 현대사를 한 번 더 떠올려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독일 마을을 떠나 산촌 마을도 향했다. 산지 마을의 한 편에 넓은 초지가 보였다. 그곳에서 양 떼 무리가 보였다. 우리 산간 지방에서 몇몇 유명한 양 떼 마을이 있지만, 섬에서 양 떼를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 양 떼 목장의 사장님은 과거 아버지의 한우 목장을 이어받아 이 목장을 조성했다고 했다. 한우 목장을 더는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고 양 떼 목장을 생각했다.

신선한 발상이었지만, 양 떼 목장을 만드는 일을 힘든 작업의 연속이었다. 부족한 자본 탓에 자신이 직접 산지를 척박한 인근 돌산을 개간하고 풀이 아는 초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해도 해도 성과가 나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4년이 시간이 흘러 그는 남해의 새로운 명소로 이 양 떼 목장을 일궈냈다.

이런 그의 곁에는 한결같이 그의 옆을 지키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고생하는 아들이 안쓰럽고 미안해 함께 목장일을 거들며 함께 했다. 그런 어머니의 손가락을 거친 노동의 후유증으로 휘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런 어머니의 손을 볼 때마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지만, 성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 목장이 자리를 잡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사장님도 아들은 쉬지 않고 목장일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들 모자의 노력이 계속 풍성한 결실을 맺기를 기원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한적한 산촌 마을 길을 걷다. 흔치않은 원통형 모양의 황토집이 보였다. 그 집의 정원에서 집주인분이 아슬아슬 돌탑을 쌓고 있었다. 그는 바람에 돌탑이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균형을 맞추며 기묘한 돌탑을 쌓는다고 했다. 조금은 별난 취미를 가진 집주인의 아내는 이런 배우자를 심하게 타박하지 않았다. 지금의  보금자리가 삶에 여유를 가져다 둔 탓으로 보였다. 

부부는 지금의 마을로 귀촌을 결심한 이후 주택을 건축했다. 너무 독특한 디자인으로 건축업자들이 대부분이 공사를 꺼려 했다. 원통형의 황토흙집은 분명 힘든 작업이었다. 이에 부부는 직접 건축에 나섰다. 정확히 말하며 집주인 남편의 고집이었다. 당연히 시행착오가 있었도 공기가 길어졌지만, 집은 남편의 구상대로 지어졌다. 하지만 원통형의 집은 가구들의 배치를 어렵게 하는 단점을 노출했고 부부는 근처에 별도 별채를 더 지어야 하는 수고를 겪었다.

집을 건축하는 단계부터 이후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부부의 귀촌은 좌충우돌의 과정을 겪었지만, 이제는 산촌에서의 삶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사진이 취미인 남편은 매일매일 배우자를 모델로 삼아 남해 곳곳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그렇게 담은 사진들은 부부의 삶의 흔적과 기록이 되고 있었다. 시작은 쉽지 않았지만, 남해 산촌의 부부는 그들 삶의 제2막을 멋지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남해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는 이웃들이 곳곳에 있었다. 이들의 삶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한 남해의 다랭이 논이나 건물이 서기 힘들어 보이는 아찔한 해안 바위 절벽에 서서 남해바다의 멋진 풍경을 가득 품고 있는 보리암과 닮아있었다. 행복은 찾아오는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남해군에서의 여정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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