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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흥기였던 영조와 정조시대는 다양한 실학자들이 등장해 기존 관념론과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학문적 연구가 활발했다. 그들에 의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다양한 책도 만들어졌다. 

1751년 영조 27년에 실학자 이중환에 의해 저술된 지리서 택리지는 기존의 지리서에 실학적 관점을 더한 인문지리서로 지리적 요건에 따라 살기 좋은 곳을 특정해 분석하기도 했다. 그 책에서 충남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지목된 곳이 내포지역이었다. 내포지역은 충청남도의 서북지역으로 지금의 아산시, 예산군과 당진시, 서산시와 태안군과 보령시를 포괄하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지역이 산이 험하지 않고 평야가 넓고 바다와 접하고 농수산물이 풍부하다 했다. 또한, 느리고 여유로운 민도 즉, 사람들의 성향이 특징이고 예술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고 쓰고 있다. 여기에 지세가 산모퉁이와 멀리 떨어져 있고 큰 길목이 아닌 탓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첨언했다. 풍요로우면서도 안전한 땅이 내포지역이었다.

내포지역은 이런 지리적 이점 탓에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시대를 거치면서 농수산업이 함께 발달했다. 또한, 복잡하면서도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을 형성하고 있어 항구 발달에 용이하고 이로 인해 대외교류가 활발했다. 이에 근대화 시대에는 천주교가 가장 먼저 전파되고 지역민들에게 퍼져나간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대외 문화 수용에 거부감이 덜했고 신물물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물론, 이로 인해 천주교 박해가 극심할 당시 내포 지역의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는 아픈 역사가 남겨지기도 했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44회에서는 과거 내포 지역의 중심부에 자리한 도시 서산시를 찾았다. 서산시는 택리지에서 저술한 내포지역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도시로 넓은 평야에 더해 간척 사업을 통해 넓은 농지가 추가되고 넓은 개벌에서는 풍부한 어패류를 수확할 수 있는 풍요로움이 있었다. 서산시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면서 교통망이 한층 편리해졌다. 최근에는 대중국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그에 필요한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대기업 공장들이 입주하는 등 농수산업에 더해 산업의 다양성까지 더해지고 있다. 프로그램에서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웃들과 만났다. 

 

 


여정의 시작은 수많은 철새들의 낙원이 된 천수만이었다. 천수만은 1980년대 간척 사업을 통해 대규모의 농지가 조성됐다. 시간이 흘러 이 농지는 철새들의 중요한 서식지가 됐다. 농경지에서 수확 후 떨어진 낱알은 철새들의 중요한 먹잇감이 되고 있었다. 여기에 겨울이면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한 탓에 철새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다. 천수만에는 대표적인 겨울 철새인 기러기를 포함해 천연기념물인 황새와 노랑부리저어새 등 멸종 위기종까지 다양한 철새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곡창지대의 풍요로움을 철새들과 함께 하는 곳이 천수만이었다. 

넓은 개벌이 펼쳐진 가로림만의 마을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가을철이 되면 개벌의 바지락을 캐로 가는 마을 주민들의 경운기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개펄을 따라 난 길을 따라가는 경운기 행렬은 또 다른 수확의 현장으로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이 마을 주민들에게 개벌은 아낌없이 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개벌에서 수확하는 바지락과 각종 어패류 등은 농사일이 없는 가을과 겨울 마을 주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이기 때문이었다.

서산 개벌의 바지락 수확 현장은 최근 관광공사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영화를 패러디한 머드맥스로 이름 지어진 영상으로 소개됐다. 수십 대의 경운기가 마치 경주를 하듯 개벌을 향해 달리는 영상은 매우 역동적으로 촬영되고 편집되어 큰 인기를 모았다. 그 조회 수도 엄청났고 서산에 대한 인지도도 크게 높아졌다.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지만, 다른 지역 이들에게 그리고 외국인들에게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런 반응이 있든 없든 개벌에서는 묵묵히 그들의 일상을 지속할 뿐이었다. 올해도 마을 주민들이 개벌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수확을 하길 기원했다. 

박으로 만든 재미있는 작품들이 마을 입구에 자리한 마을을 찾았다. 그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인형극 연습이 한창이었다. 알고 보니 이 인형극은 지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서산 박첨지 놀이였다. 박첨지 놀이는 1920년대부터 마을에서 시작됐고 계속 계승되고 있었다. 무려 1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인형극을 이끄는 주체는 마을 주민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 맡고 박으로 등장인물의 캐릭터 인형을 만들고 공연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을의 인형극으로 자리한 서산 박첨지놀이는 아름아름 알려져 마을의 중요한 문화로서 그 가치는 인정받았다.

특히, 전국적으로 마을에서 그 인형극을 전승하고 유지하는 건 극히 보기 드문 일이라 했다. 방문했을 때도 마을 주민들은 인형극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과거 탈춤이나 마당놀이처럼 서산 박첨지 놀이는 양반에 대한 풍자와 조롱,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가득 담고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과 집권층, 일제강점기 일제와 그들에게 협력하는 친일파 들에 의해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이 인형극은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덜어주고 마음껏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중요한 오락거리이기도 했다. 이제는 중요한 지역의 문화공연으로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인형극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다. 

다시 길을 나섰다. 외딴 농촌 마을 길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길에 넓은 들판과 큰 저수지 등 평화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길에 오래된 식당을 만났다. 그 식당은 시골에서 보기 드문 장어요리 식당이었다. 장어하면 장어구이를 연상하게 되지만, 이 식당은 파김치와 함께 장어를 조리하는 파김치 장어조림이 주메뉴였다. 쉽게 맛볼 수 없는 파김치 장어조림은 오랜 시간 연구와 실패를 거듭하며 레시피를 만들어낸 식당 사장님의 결과물이었다. 과거 도시에서 생활하다 가계의 어려움으로 뜻하게 않게 서산에 자리를 잡은 사장님 부부는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리를 잡았다.

처음 식당 부부는 도시에서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실패하는 등의 이유로 삶이 어려워져 자영업에 도전한 수많은 이들 중 하나였다. 경험도 부족했고 준비도 부족했던 탓에 식당 일이 힘들었지만, 끈기와 노력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서산은 이 부부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한 삶의 터전이 됐다. 지금은 딸이 사장님의 기술을 전수받아 또 다른 파김치 장어조림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서산은 가족 모두와 함께 하는 곳이 됐다. 

다시 나서 길,  아픈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천주교 순교성지 해미성지가 그곳이었다. 서산의 해미 지역은 과거 충북 서북부 지역, 내포지방의 군사와 치안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천주교 박해가 극심한 시기에는 지역의 천주교도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장소였다. 해미성지는 그 중심지였다. 당시 내포 지방은 천주교가 가장 먼저 전파되고 확산됐다.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일반 대중들은 물론이고 몰락한 양반들에게도 큰 공감을 얻었다. 당연히 그 교세는 빠르게 커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의 집권층은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그 방법은 매우 폭력적이었고 천주교도 대부분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처형됐다.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내포지역에서만 수천 명의 순교자 발생했다. 하지만 그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이 수많은 이들이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혐오와 증오, 힘없는 이들에 대한 폭력이 지배하는 광기가 이 지역을 뒤덮었다.

심지어 선 처형 후 후 보고까지 용인될 정도였다. 이런 비극의 현장은 이제 조용한 순교 성지가 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교황도 있었다. 2021년 3월에는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국제성지로 지정되어 전 세계적인 천주교 순교지가 됐다. 당시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이들의 원통함을 다 씻어낼 수 없지만,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는 그런 광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해미성지는 잘 보존되고 그때의 역사를 알리는 장소로 남아 있기를 바라며 다시 길을 나섰다. 

무거운 마음은 안고 한적한 농촌 마을 길을 걸었다. 그 길의 끝에 넓은 잔디 정원과 예쁘게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서양식 건물이 보였다. 카페를 먼저 생각했지만, 이곳은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관장님은 과거 부친의 유지에 따라 이웃을 위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 오랜 세월 이 부지를 다지고 건물을 짓고 정원을 꾸몄다. 지금은 마을 주민들 누구가 찾을 수 있는 공간, 어린이들의 서적이 가득한 어린이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정원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고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이 도서관에서 유년 시절 잊지 못할 추억을 쌓고 있었다. 관장님은 과거에도 그렇고 자신의 손으로 도서관을 관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에 그는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삶도 감수해야 했다. 지금의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아내가 그를 지지하고 함께 하며 조금은 일손을 덜 수 있게 됐다. 돈보다는 사람, 나보다는 나남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도서관장님의 삶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그는 매일매일 순수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행복한 에너지로 그의 삶을 채워가고 있었다. 

 

 


다시 서산 도심의 잘 정비된 거리를 걸었다. 그 거리에서는 다양한 공예품과 수제 작품들이 있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중에 수제 기타를 연주하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인근 공방으로 함께 향했다. 그곳에서는 어려 기타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기타를 만들고 기타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레슨을 한다고 했다. 애초 그는 공방이 있는 건물 지하에 연극을 할 수 있는 소극장을 만들고 여러 공연을 기획했다. 도시에서 그는 공연기획자의 삶을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적 혜택이 부족한 지방에서 문화 콘텐츠를 나누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계획했던 공연과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다. 이는 그를 좌절하게 했다. 이런 그에게 아내는 그가 기타 공방을 함께 할 것으로 제안했고 그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아직은 완벽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그는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희망이 현실이 되었으면 하는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여정을 이어갔다. 

여정의 막바지 다시 서산의 바닷가 포구로 향했다. 그 포구에서는 바다 위 배에서 수산물을 판매하는 선상어시장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 형성된 이 시장은 포구에 마련한 부잔교에 수십 척의 배가 항시 정박해 수산물을 판매하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바다에서 방금 잡아온 수산물을 즉석에서 손질해 손님에서 내주기 때문에 보다 신선한 수산물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 방금 바다에서 잡아온 수산물을 싣고 온 배가 보였다. 남편은 바다에서 조업을 계속하고 있고 아내가 그 배에서 잡은 수산물을 선상어시장의 자리로 가져왔다고 했다. 아내는 항상 바다에서 조업 중인 남편이 걱정이라고 했다. 이런 걱정과 불안함을 안고 부부는 그들의 역할을 나눠가며 바다에서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침 서산의 바다에서 잡아온 꽃게는 매우 신선하고 살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수확의 즐거움은 이 부부와 이 선상 어시장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견디게 하는 원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상 어시장의 하루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서산은 근대사의 아픈 기억을 안고 있지만, 그 역사를 뒤로하고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역동적인 도시이기도 했다. 또한, 농촌과 어촌의 풍요로움이 함께 하는 독특함도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들이 삶은 다를 게 없었다. 그런 평범함이 서산의 또 다른 역사를 계속 만들어가고 있었다. 서산에서의 여정은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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