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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정 중앙 내륙에 자리한 청양군은 유명한 대중가요의 제목이기도 한 칠갑산과 함께 산지가 주를 이루는 지형이다. 그 때문에 도시보다는 농촌의 풍경이 콘크리트 건물 숲보다는 청정 자연의 모습이 먼저 연상되는 곳이다. 실제 청양군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매운맛을 대표하는 청양고추다.

실제 청양군은 고추와 구기자의 중요한 산지로 오래전부터 그 명성이 있었다. 청양군의 칠갑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역의 명소이기도 하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45회에서는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청양군 곳곳을 조금은 여유 있는 걸음으로 둘러보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함께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청양군의 멋진 풍경과 만날 수 있는 천장호를 주변의 산책로를 걸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화창한 날씨에 알록달록 물든 단풍, 잔잔한 호수가 멋진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호수 위를 가로질러 걸을 수 있는 출렁다리는 천장호의 풍경을 보다 가까이 색다르게 즐길 수 있게 했다. 청양을 대표하는 명물인 빨간 고추와 구기자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다리 중앙에 위치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호숫가를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는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게 해줬다. 청양군의 멋진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천장호를 나와 시내로 향했다. 고추의 고장답게 고추로 디자인한 가로등이나 각종 조형물이 거리의 풍경을 채우고 있었다. 그 청양에서 중요한 장소인 고추시장을 찾았다. 2003년 설립된 청양 특화시장은 고추는 물론이고 구기자도 함께 유통하는 곳이었다. 시장이 열리지 않은 시간에 찾은 탓에 시장 특유의 북적임은 덜했지만, 한창 작업에 열중인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고추 꼭지를 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게 꼭지를 따고 판매하기 위해 거치는 작업이었다. 

 

 


고추의 매운맛이 작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작업을 하는 어머니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청양의 고추와 함께 한 어머니들에게 이 매운맛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작업량에 따라 일당의 주어지는 탓에 매운맛을 탓할 겨를도 없었다. 어머니들은 청양고추는 맵지만, 생계를 유지하고 삶을 조금이라도 윤택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한 가지 더, 고추를 수확하고 말리는 데 있어 기계를 이용하면 고추의 꼭지가 초록의 빛이 남아있고 햇볕에 말리는 태양초는 꼭지에 노란빛을 띠면서 마른다는 사실을 함께 알 수 있었다.

시장을 벗어나 인근 골목을 걸었다. 고춧가루나 관련 제품을 판매하는 골목 한편에 샌드위치 가게가 보였다. 그 가게는 청양고추와 치즈를 섞은 청양고추 치즈 샌드위치를 주메뉴로 내놓고 있었다. 고추의 매운맛과 치즈의 맛을 잘 배합한 소스는 청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샌드위치를 탄생시켰다.

시내를 나와 청양의 명소 칠갑산으로 향했다. 깊어가는 가을 속 단풍 풍경이 산행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편의 공원에 대중가요 칠갑산의 가사에 등장하는 콩밭 매는 아낙네의 동상이 있었다. 이 동상은 과거 힘들고 배고프던 시절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논이나 밭일을 하는 와중에 살림에 식구들 뒷바라지에 각종 가족의 대소사까지 챙기며 쉴 틈 없이 일하던 어머니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가요 칠갑산에서는 평생 자신을 버리고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하는 딸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시대가 변해도 어머니들의 가족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은 모성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칠갑산 자락의 산촌 마을을 걷다. 표고버섯 농장을 만났다. 하우스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이 농장에는 많은 버섯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농장의 주인 부부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애초 산에서 버섯을 키웠다. 부부는 매일매일 날씨의 변화에 노심초사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먼 산에 있는 농장을 찾아 급히 버섯을 돌봐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과가 모여 지금의 농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제는 그때의 고생이 즐거운 추억이 된 부부였다. 과정 없는 결과는 나올 수 없을 이 부부는 보여주고 있었다. 

청양의 과거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인적이 거의 끊긴 청양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터는 쓸쓸함이 가득했다. 과거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도 북적였을 이곳은 이제 흔적만 남아있었다. 시장이 번성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녹슨 슬래브 지붕의 시장 난전과 낡은 콘크리트 건물들만 그때를 기억하며 서 있었다. 이 장터가 새롭게 그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다음 길을 나섰다. 

길을 걷다 독특한 모습이 한옥 건물이 보였다. 지역의 대부호가 지었다는 이 한옥은 사랑채에 초가가 얹어져 있고 별채가 2층에 유리창문이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충남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윤남석 가옥은 대대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이에 조선 후기 개화기 한옥 양식과 일제 강점기 한옥 양식, 여기에 일본의 건축 양식이 더해져 건축의 시대적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큰 곳이었다. 이 가옥은 과거 지역의 중요 행사가 열리기도 했고 고위층 인사가 청양을 방문했을 당시 숙소로도 이용됐다. 지역의 구심점으로 지역민들에게 중요한 장소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가옥의 주인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자금을 남몰래 지원하는 일도 했었다. 그만큼 역사적 의미도 큰 곳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곳이지만,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려운 과정이 있었다. 할아버지 때에서 상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집안의 집사들의 농간으로 가산이 탕진되는 일이 있었다.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의 모습이 연상됐다. 딸에게 할아버지의 가옥을 이어받은 그의 딸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 가옥을 지켜냈고 그 자녀들이 그 유업을 이어받고 있었다. 힘든 과정을 거쳤지만, 이 가옥은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나고 관리하는 이의 정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이 가옥이 많은 사람들이 찾고 느낄 수 있는 명소로 오랫동안 남아있을 기원했다.

멋진 고택을 지나 농촌 마을의 버스정류장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주민들이 얼마 없는 이 마을 버스 정류장에는 하루에 한 대꼴로 버스가 지나고 있었다. 자가용이 없는 대부분 노년의 마을 주민들은 그 버스에 의지해 외부 세계로 나가고 소통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정류장에서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기다림의 흔적은 빛바랜 버스 정류장의 외관과 세월의 흔적 가득한 모습에 담겨 있었다. 그 기다림의 끝에는 반가운 만남이 있었다. 한마을 주민은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림의 시간 끝에 반가운 친척을 만났다. 기다림의 소중함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과거의 흔적을 지나 청양의 또 다른 특산물 구기자 재배 농장을 찾았다. 청양의 구기자는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크다. 흔히 청양 하면 고추를 떠올리지만, 구기자 역시 청양을 대표하는 작물이었다. 구기자는 한약재로 사용될 정도로 약 효과가 뛰어나다고 했다. 구기자를 재료로 구기주가 유명할 이유이기도 하다. 마침 구기주 명인의 집을 방문해 제조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팔순의 어머니와 그 며느리가 함께 청양의 전통 구기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시집와 모진 시집살이를 견뎌야 했다. 특히, 구기주를 담그는 날이면 엄한 시어머니에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렇게 배운 구기주 기술로 어머니는 엄한 전승자가 되어 며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며느리는 엄한 시어머니를 항상 웃음으로 대하며 티격태격하면서도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 함께 하고 있었다. 이제 이들은 서로에게 너무한 필요한 존재였다. 가깝지만 먼 사이라고 하는 고부간이었지만, 구기주로 함께 하는 이 고부간은 너무 다정하기만 했다. 그들과 함께 청양의 전통 구기주는 그 맛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한 농촌 마을을 찾았다. 콩수확이 한창인 주민들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10남매 집 딸이라 했다. 호기심이 생겼다. 그들을 따라 그 집으로 향했다. 마침 김장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90살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정했고 70살이 넘은 첫째 딸과 50살은 넘긴 아홉째 아들까지 함께 일하는 중이었다. 다산이 많았던 과거에도 10남매가 함께 하는 집은 흔치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시골 살림에 10남매를 건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10남매는 우애롭게 함께 자랐고 어른이 되어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지금도 할아버지 할머니 집 근처에 상당수가 거주하며 자주 만나고 함께 일하며 우애를 다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런 형제자매들의 구심점으로 든든히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사람이 우선이고 그 사람은 이 가족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너무 힘든 일이 된 요즘 세태에 보기 드문 대가족의 모습은 큰 울림을 주었다.

이렇게 청양군에서도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청양군에서의 그 시간이 느리게 흘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류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고 빨리빨리 행동하는 게 최선인 요즘과 달리 청양군에서 만난 이들은 그 서두름 대신 여유를 더불어 살아가는 미덕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만난 이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였고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이들의 이런 행복이 오랫동안 지켜지기를 기원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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