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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광군은 북으로 전라북도 고창군과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전남 장성군, 남으로는 전남 함평, 무안군과 경계를 이루는 여러 지역과 교차하는 입지에 있다. 서쪽으로는 사시사철 먹을 것을 내어주는 넓은 개펄과 바다가 있고 동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넓은 땅이 있는 영광군은 과거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여겨졌다. 영광군의 한자에서 신령스러운 빛이라는 점도 영광군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준다.

특히, 지금도 영광하면 떠오르는 단어인 영광굴비는 영광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조기를 말려 만드는 것으로 예로부터 중요한 지역의 특산물이었다. 귀한 반찬인 굴비는 영광을 풍요롭게 해주었고 지금도 영광굴비는 꽤 높은 가격에도 역사적 전통이 함께 하는 인지도로 인해 찾는 이들이 꾸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심지어 중국산 조기를 이용해 굴비를 생산하고  영광굴비 브랜드를 사용하는 가짜 영광굴비 유통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영광굴비는 우리 수산물 중 가장 큰 가치를 가진 이름이다. 영광 굴비에 대한 지역민들의 자부심은 강할 수밖에 없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동네 한 바퀴 146회에서는 굴비의 고장 영광을 찾아 지역의 명소와 하루하루 알차게 삶을 채워가는 이웃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영광군의 중요한 여행 포인트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넓은 개벌과 높은 절벽이 멋진 풍경을 만들어주는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 길에 개벌에서 굴따는 작업을 하고 있는 어머니들을 만나 삶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포구에서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모습도 장관이었다. 그 길의 끝에 전망대는 영광의 앞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전형적인 어촌 마을의 풍경을 마음에 담고 본격적인 동네 탐방을 시작했다. 

서해안에서 보기 드문 넓은 모래사장이 있는 가마미 해수욕장과 접한 어촌 마을을 찾았다. 한적한 마을의 한 집에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있었다. 예쁘게 단장한 할머니들은 사진촬영을 위해 모여있다고 했다. 특별한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할머니들은 세상과의 작별을 고할 때 놓일 영정사진, 장수사진이었다. 지역 사회단체가 주관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사진사가 재능기부를 하여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 사진사는 영광군 일대에서 10여 년 넘게 동안 장수사진 촬영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최근 사진이 아닌 어머니의 과거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모신 기억이 있었다. 이는 그의 마음 한편을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인생의 황혼기 가장 아름답고 밝은 모습의 사진을 남기는 게 너무 소중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어르신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더해 자신의 시간을 쪼개 지역 어르신들의 장수사진 봉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은 할머니들에게는 또 다른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 같았다. 그 할머니들의 밝은 웃음을 뒤로하고 읍내로 향했다. 

읍내 시장에 들렀다. 아직은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아 한적한 시간대 문을 연 젓갈 가게가 보였다. 그 가게는 젓갈을 직접 담가 판매한다고 했다. 그 현장이 궁금했다. 안내를 따라 가게 뒤편으로 향하는 오래된 한옥 건물이 보였다. 족히 수백 년은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옥 앞마당에서 젓갈을 담그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젓갈은 40년의 내공이 함께 하고 있었다.

젓갈 가게 사장님은 어른 나이에 시집와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의 배우자는 결혼 직후 병에 시달렸다. 그런 배우자의 병수발을 하며 사장님은 시부모님을 포함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젓갈 장사가 어느덧 40년을 넘었다. 지금은 시장에서 이름난 젓갈 가게가 되고 많은 단골들이 있지만, 장사 초기에는 젓갈을 팔기 위해 그 젓갈을 이고 지고 먼 곳까지 가는 등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그 모진 세월 속에 사장님은 남몰래 많은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장님은 어머니로서 가장의 가장으로 그 시간을 견뎠다. 사장님의 젓갈은 남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장님의 삶이 함께 담겨있는 특별함이 있었다.

시장을 나와 가을이 깊어가는 영광의 농촌 마을로 향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한편에서 초록의 작물을 수확하는 모습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새싹 보리였다. 새싹 보리는 최근 건강식으로 그 수요가 늘어나고 있고 고수익 특용작물로 자리했다. 이 마을에서는 새싹 보리는 가을과 봄 두 차례 수확한다고 했다. 농번기 수확이 이루지는 탓에 마을의 중요한 부수익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새싹 보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부침개나  칼국수로 만들어 먹으면서 색다른 맛을 즐기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서 그 부침개와 전을 맛볼 수 있었다. 늦가을 초록의 싱그러움이 더해진 음식은 색달랐다. 그렇게 영광의 또 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다시 농촌 마을 길을 따라 걷다 잘 꾸며진 정원을 만났다. 바다가 보이는 정원은 아주 특색 있었다. 정원 곳곳을 둘러봤다. 그 정원에서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였다. 사람들은 골프고 아니고 게이트볼도 아닌 듯한 경기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파크골프였다. 영어로 정원을 뜻하는 파크와 골프를 합성한 파크골프는 녹지와 공원 곳곳에서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한 개의 골프채로 할 수 있고 골프장 같은 넓은 공간이 없이도 경기가 가능했다. 이동거리가 상대적으로 적은 탓에 노년층들이 즐기기에도 좋아 보였다. 공원의 잔디밭이 있다면 여러 사람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경기였다. 마침 공원에는 마을 주민들이 경기에 한창이었다. 주민들은 파크골프를 즐기며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고 건강도 챙기고 했었다. 많이 대중화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먼 스포츠가 골프다. 그 골프를 대신할 수 있는 스포츠로 파크골프는 훌륭한 대안이 될 것 같았다. 마침 이 마을에서는 전직 골프 선수가 레슨을 해주며 마을 주민들이 파크골프는 보다 잘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생활 스포츠로서 파크골프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법성포 인근의 한옥 마을 길을 걸었다. 그 길에 청년들이 모여 일하는 현장이 보였다. 굴비 모양의 벤치 등에 색을 칠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들은 지역의 젊은 예술 작가들이었다. 이들은 영광에서 나고 자란 이들도 영광에 남아 예술가로서의 꿈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그림과 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은 지역의 공방거리에서 터전을 잡고 상호 소통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개인 작품 외에 지역의 특색을 살리고 지역을 홍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일도 함께 하고 있었다. 농어촌 지역에서 젊은이들이 새로운 기회를 잡고자 도시로 떠나는게 보통인 현 세태에서 자신의 고향에서 터전을 잡고 꿈을 키워가는 이들의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들의 손으로 꾸며질 영광군의 모습도 기대됐다. 이들 청년 작가들의 미래에 큰 응원을 보내며 다시 길을 나섰다. 

영광을 대표하는 굴비, 그 굴비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굴비 거리를 걸었다. 그 길의 끝에 굴비 거리에서 보기 드문 게장식당이 보였다. 굴비 거리에서 게장식당은 이채로웠지만, 40년의 역사가 있는 곳이었다. 노년의 부부는 오래전 이 거리에서 터전을 잡고 식당을 키웠다. 이 식당은 이 식당만의 비법으로 만들어낸 게장과 굴비를 포함한 다양한 반찬이 더해진 정식이 주메뉴였다. 식당만의 특성과 내공이 가득한 한 상이었다.

식당의 사장님은 남편과 어느 섬에서 만나 결혼을 했고 무일푼으로 육지로 나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사장님이 생계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졌다. 처음에는 다른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일 시작했다. 어린아이를 업고 고된 일을 하기도 했다. 사장님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견디고 견뎌 부부는 그들의 식당과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게장식당은 힘들었던 삶의 담긴 곳이었지만, 행복을 만들어가는 공간이었다. 지금도 부부는 소중한 그들의 삶의 터전을 굳건히 지켜가고 있었다. 이 식당의 게장은 부부의 인생이 담긴 맛이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큰 굴비 덕장이 있는 집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바다에서 잡아온 조기를 그들의 만의 염장 방법을 더해 말리고 굴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덕장은 90살이 넘은 할머니에 이어 아들, 그 아들까지 3대가 함께 하는 역사 깊은 가업의 현장이었다. 할머니는 지금도 덕장의 여러 일들을 하고 있었다. 굴비를 잘 엮는 할머니의 매듭은 손자도 따라 하기 힘들 정도로 능숙하고 단단했다. 수십 년 내공이 그대로 느껴졌다. 

할머니는 8남매와 있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굴비 장사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장군이라는 말을 정도로 당당하고 씩씩하게 장사를 했고 그 규모를 키웠다. 할머니의 굴비 장사는 8남매에게 이어졌다. 지금은 사업 수완이 가장 좋은 다섯째 아들이 가업을 이끌고 있지만, 할머니는 일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의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한 덕장과 굴비 장사가 이미 삶의 일부분이 된 탓으로 보였다. 할머니는 일을 하면서 건강을 지켜가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과거 일 때문에 자녀들에게 소홀했던 시간들이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다섯째를 낳고 그 갓난 아기를 집에 두고 다음날 장사에 나설 정도로 강인한 어머니였다. 그만큼 그 시절에는 살아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할머니의 가업을 이어가는 아들들은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들들은 그들의 어린 시절 곁에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나 아쉬운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런 모진 세월을 견디고 가업을 일으킨 할머니에 대한 아들들은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섯째 아들은 그 마음을 담아 틈만 나면 굴비와 어머니를 주제로 시를 만들고 할머니에 들려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무덤덤하게 그 시를 듣지만, 힘들었던 세월에 대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들이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점은 할머니가 더 힘을 내고 살아가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족들이 함께 하는 영광의 어느 덕장에서는 오늘도 굴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영광군에서 만난 이들은 잘 알려진 이들도 아닌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영광과 같이 밝은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을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그런 노력으로 한때 어두웠던 인생의 길을 밝히고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삶이 모여 영광군은 그 이름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행복이 결코 특별하지 않고 우리 가까운 곳에 있음을 느끼게 한 영광군에서의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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