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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군은 우리나라 2번째로 넓은 면적의 기초 자치단체이면서도 가장 낮은 인구 밀도를 보이는 곳이다. 인제군은 그 지형의 대부분이 산과 물로 이루어졌다 할 정도로 험준하고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오지라는 느낌이 강했다. 여기에 북한과 접하고 있는 접경지라는 특성은 타지역 사람들의 마음의 거리를 멀게 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과거 인제는 먼 산촌이었고 남북 대결의 긴장감 가득한 장소였다. 

하지만 최근 인제군은 은둔의 장소에서 벗어나고 있다. 최근 개통된 서울 양양 고속도로로 인해 접근성이 좋아졌다. 그 고속도로에는 국내 최장 터널인 인제양양터널은 지역의 명소가 됐다. 이에 인제군은 최근 오랜 세월 잘 보존된 청정자연을 관광 자원으로 삼아 여행지로 적극 홍보활동을 하고 있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중요한 래프팅 장소가 된 인제 내린천, 설악산 등산의 코스, 새롭게 조성된 여러 여행 명소는 자연과 함께 하는 힐링의 장소로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이끌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52회에서는 겨울 여행지 인제군의 이모저모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인제군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주인공들인 이웃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제군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역시 산이다. 인제군은 설악산 국립공원에 상당수 면적이 포함되어 있어 속초나, 양양에서 등정하는 코스 반대편의 내설악 코스의 길목에 있다. 그 내설악 등산로를 따라가다 설악산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이 백담사에 이르렀다.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된 사찰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역사의 부침 속에 소실과 재 창건을 거듭했다.

 

 


지금의 백담사는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된 터에 다시 창건한 사찰이다. 이 백담사는 과거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기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백담사에는 그의 시비가 있어 그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또한, 백담사는 격동의 현대사 속 중요한 인물인 12.12 군사 반란의 수괴 전두환이 대통령을 물러난 직후 머물렀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백담사 하면 떠올리는 인물이 전두환이다. 이로 인해 정작 기억되어야 할 인물인 한용운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현실에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제는 백담사의 역사가 모든 이들에게 제대로 기억되길 기대해 본다. 

백담사의 풍경과 주변 계곡에 무수히 많은 쌓은 방문자들의 기원들이 담긴 돌탑들을 뒤로하고 인제군에서 유명한 숲으로 향했다. 인제군의 자작나무 숲이 그곳이었다. 인제군의 자작나무 숲은 긴 조림 끝에 지금의 울창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무려 70여만 그루의 나무가 이곳에서 자라고 있다. 줄기의 껍질이 하얗게 벗어지면서 생긴 독특한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절경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주로 북유럽과 같은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자작나무 숲과 그 숲길은 인제군의 새로운 명소가 됐다. 줄기 껍질이 벗겨지고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 숲길은 다른 세상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신비로운 가득한 자작나무 숲길을 내려와 한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 카페는 곳곳에 자작나무 공예품들이 있었다. 카페에서 내어주는 차 중에도 자작나무를 활용한 차가 있었고 인테리어의 대부분도 자작나무를 이용했다. 이 카페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귀향한 남매가 운영하고 있었다. 오빠는 홀로 배운 기술을 활용해 자작나무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공방을 운영하고 동생은 자작나무를 이용해 차나 빵 등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작나무는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소중한 존재였다. 이들은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느리지만 여유 있고 다소 불편하지만, 때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서 남매는 삶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자작나무 숲을 벗어나 읍내 동네로 향했다. 동네 길을 따라 걷다 손두부 만드는 작업이 한창인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아침 장사를 위해 손두부를 만들고 있던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과거 젊은 시절 도시에서 대형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등 화려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사업 실패와 보증 문제로 금전적인 어려움이 커졌고 이곳으로 낙향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과거를 잊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행상을 하는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 옆에서 배우자 역시 힘든 시간을 함께했다. 이런 부부의 노력은 지금의 식당을 만들고 20년 넘게 이어지도록 했다. 이 식당의 주메뉴인 두부조림 요리인 짜박두부는 부부의  삶이 녹아들어 있었다. 부부는 지금도 매일매일 딸 흘려 일하는 일상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과거에는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기억을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의 여유가 가지게 됐다. 비록 도시에서의 풍족함과 멋과는 멀어졌지만, 이들 부부는 더 돈독해진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행복으로 그들의 삶을 채워가고 있었다. 

다시 동네 길을 걸었다. 겨우내 때기 위해 집 앞에 쌓인 연탄이 정겹게 보이는 오래된 골목길의 끝에 인제군 출신의 시인 박인환 문학관이 보였다. 박인환은 1940년대와 50년대 활동했던 시인으로 우리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180센티미터 넘은 큰 키에 수려한 외모의 멋쟁이로 유명했다. 그는 생전에 위스키와 담배를 즐겼다. 또한, 6.25 한국 전쟁 때는 종군 기자로 활동한 독특한 이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술은 그를 3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1956년 박인환은 알코올중독성 심장마비로 안타깝게도 요절하고 말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등 그의 시는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시인은 어린 나이에 고향 인제를 떠났지만, 항상 인제를 그리워했다. 그의 고향인 인제군은 그를 잊지 않았고 시인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박인환 문학관에서는 그의 작품세계를 살필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그가 주로 활동했던 서울 명동거리를 재현한 공간이 있어 시대상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박인환 문학관과 함께 문화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 또 있었다. 인제군에서 최북단에 자리한 서화면의 서화리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영화 촬영에 한창인 이들이 있었다. 스태프와 배우 대부분이 마을 주민들로 이루어진 촬영팀은 매우 진지한 자세로 한 장면 한 장면을 담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부부가 있었다. 이 부부는 그들의 집아나 촬영 베이스캠프라 할 수 있는 버스를 타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단편영화인 마을 영화를 만들었다. 그 수는 20여 년간 100편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인제 서화리에서 5년간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이 부부는 왠지 모르게 인제를 떠나기 싫었고 자리를 잡았다.

부부는 서화리가 과거 해방 이후 북한 땅이었다가 6.25 한국 전쟁 후 수복되어 북한과 접한 북쪽 끝 마을이 된 역사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서화리는 해방 이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의 비극, 이후 남북 관계의 변화에 따른 긴장과 기대가 반복되는 접경지 마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화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간이다. 부부는 그들의 작품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마을의 지리적 특징을 차용한 이름인 끄트머리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영화제 기간 산골 마을은 국내외 다양한 마을 영화들이 함께 하는 문화 예술의 공간이 된다. 이렇게 서화리 마을은 문화 예술 마을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영화 촬영장을 벗어나 마을 길을 걸었다. 오래된 마을이었지만, 마을 길은 넓고 잘 정돈되고 있었고 집들도 통일된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서화리 마을은 1979년 대북 전략촌으로 건설된 건설된 역사가 있었다. 당시는 북한을 의식해 건물은 최신식이었고 넓게 지어졌고 마을 길도 그에 맞게 건설됐다. 지금은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지만, 이곳은 한때 격변의 현대사를 담은 장소였다.

 

 


이 마을의 역사를 마음 가득 알고 있는 할머니 3총사를 만났다. 할머니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외딴 마을에 홀로 살려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식들에 폐를 끼칠까 자식들이 있는 도시로 나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자식들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할머니들이었다.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한 할머니 집 컴퓨터 자판은 가족들의 사랑을 느끼게 했다. 손자가 할머니가 자판을 쓰기 편하도록 자판의 한글 글씨를 크게 붙여 놓은 모습은 기발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담고 할머니는 하루하루 일상을 담은 일기를 쓰며 노년의 기억들은 기록하고 있었다. 이 할머니들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함께 그들의 인생 황혼기를 행복하게 채워가길 기원했다. 

남북 분단의 상징물인 38 대교를 찾았다. 38대교는 38도 선을 따라 지어진 다리다. 이 다리는 인제군의 현대사를 담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38도 선을 경계를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때 인제군의 대부분은 38도 선 이북에 속해 북한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후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제군 대부분이 남한 영토로 수복됐고 인제군은 본래 행정명을 되찾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제군은 남과 북의 영역에 속했었다. 지금은 남북 대치의 최 전선에 위치하고 있다. 인제군은 6.25 한국전쟁의 비극이 여전히 진행형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인제군 역사의 장소들을 뒤로하고 황태덕장으로 유명한 용대리를 찾았다. 그곳에서 한 황태 식당을 찾았다. 부부가 운영하는 황태 식당은 선대 때부터 이어진 황태 덕장과 함께 식당을 겸하고 있었다. 그 식당은 기존의 황태 요리에 더해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고 새 메뉴를 내놓는 등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지속하고 있었다. 물론, 기존의 일로도 바쁜 일상 속에 부담이 크지만, 부부는 함께 시간을 쪼개 신 메뉴를 만들고 적용하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국내외 요리 경진대회에 나가 수상하는 성과도 있었다. 이들의 노력이 앞으로 계속 기분 좋은 궁금함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이렇게 인제군은 조용한 산촌이지만, 현대사의 격변기를 품고 있었다. 전쟁의 역사는 최 일선에서 여전히 진행형이다. 하지만 인제군의 숲은 푸근하고 물은 맑고 청량했다. 전쟁의 기억보다는 평화로운 풍경이 인제군의 풍경을 채우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제군은 새로운 가치와 가능성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이웃들도 과거보다는 더 나은 미래와 희망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문인지 인제군에서의 시간은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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