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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남부에 자리한 서천군은 북쪽으로 보령군과 함께 하고 금강하구를 경계로 남쪽으로 전북 군산시, 익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금강 하구둑이 있고 장항선 철도가 지나고 최근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서천군을 지난다. 서천군은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고 금강 하구둑 인근은 넓은 개펄과 함께 생태계의 보고로 기능하고 있고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인근에 위치하여 생태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75회에서는 이 서천군을 찾아 그곳의 명소와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웃들과 만났다. 

여정의 시작은 서천군의 넓은 개펄과 바다 풍경을 한 번에 살피고 걸을 수 있는 해양전망대와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스카이 워크가 있는 바다 산책로였다. 오래전 방풍림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을 지나 화창한 날씨 맑은 하늘 아래에서 서천군의 바다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옛 장항선 열차의 종착지였던 장항읍을 찾았다. 장항읍은 과거 철도와 함께 항구가 함께 있어 크게 번성했다. 지금은 그때의 모습이 사라지고 한적한 풍경이지만, 그때를 기억하는 마을 주민들을 이야기를 통해 당시를 상상할 수 있었다. 마을 주민들 속에서 장항읍의 번영을 상징하는 장소는 한결같았다. 일제 강점기 국내 유일의 비철금속 제련소인 장항제련소가 그곳이었다. 

1936년 조선제련주식회사로 설립된 장항제련소는 사실 일제의 자원 수탈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방 후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산업화의 최일선에서 큰 역할을 했다. 장항제련소는 그 규모가 커지고 확대되어 우 리나라 비철금속 제련 산업의 핵심이 됐다. 공장이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돈도 몰렸다. 제련소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됐다. 장항제련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산업 역군이라는 칭호와 함께 농촌이 대부분인 서천군에서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장항제련소는 관련 산업이 점점 쇠퇴하고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생산 규모가 줄었다. 장항제련소 인근 지역이 수십 년간 이어진 매연과 각종 중금속 배출로 인해 크게 오염되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에서 기준치를 크게 뛰어넘는 중금속이 검출되면서 제련 공정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결국, 실제 연구결과 제련소 인근 수 킬로 미터 이내 지역의 토양이 중금속으로 오염된 것이 확인됐다. 이후 인근에서의 농작물 경작이 금지되고 인근 마을 주민들의 이주 조치가 이루어졌다. 1990년에는 매연이 발생하는 용광로와 제련 공정이 폐쇄됐다. 이후 장항제련소는 가공 공정만을 담당하는 공장이 됐다. 굴뚝이 꺼진 장항제련소의 영광도 함께 사라졌다.

장항 제련소는 산업화 시대의 명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과거에는 지역민들에게 큰 자부심이었던 장항 제련소였지만, 이제는 우뚝 솟은 굴뚝이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이 공장이 영광의 기억으로 더 남아있었다. 과거 제련소에서 일했던 이들에게 장항제련소는 큰 자부심으로 남아있었다. 

이 제련소 인근에는 영광의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가 또 있었다. 오래된 다방에서였다. 장항제련소가 활발히 운영되던 시절에는 많은 다방이 읍내에 있었다. 이 다방에서는 제련소 노동자들을 위해 아침도 제공했다. 지금도 그때의 아침 메뉴를 제공하는 다방이 있어 찾았다.

사장님이 직접 만드는 깨죽과 계란 프라이에 커피 한 잔이 제공되는 모닝세트는 과거 출근에 바쁜 장항제련소 노동자들의 아침을 책임졌다. 이제는 찾는 이들도 많지 않지만, 사장님은 그때를 기억하는 단골손님들을 위해 모닝세트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 모닝세트와 함께 서천군의 근. 현대사와 함께 할 수 있었다.

현재 장항제련소는 인근 지역의 오염 정화작업과 함께 친환경 산업단지나 공원 등으로 새롭게 조성하려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곳이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고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읍내 길을 걸었다. 중고 어선 판매소를 지나 지역의 특산물 박대로 요리하는 식당을 만났다. 이 식당의 사장님은 박대를 바다에 나가 직접 잡아 오기도 하는 선장님이기도 했다. 이 식당은 사장님 부부와 아들이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사장님 부부는 어릴 적부터 심장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도시를 떠나 서천에 자리를 잡았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아들은 이제 장성해 부모님을 도울 정도로 건강하다. 세 아이의 아빠가 된 가장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아직도 아들의 건강이 걱정이지만, 아들은 너무 씩씩하게 잘 자랐다. 어른이 된 아들이 이제는 부모님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함께 하는 식당의 박대 요리는 특별했다. 

모시로 유명한 한산면의 한 마을을 찾았다. 한산 모시는 지리적 표시제를 적용받을 정도로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산품이다. 한산 모시의 직조기술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침 그 마을에서 전통방식으로 모시 실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 마을 어머니들을 만났다. 그들에게서 어릴 적부터 이 모시와 함께 하는 게 숙명이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어머니들이 작업을 하며 부르는 노동요 속에 삶의 애환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마을에서 전통기술을 지키며 살아가는 장인을 만났다. 그는 손으로 나무를 깎아 손잡이를 만드는 전통부채 장인이었다. 그의 부채는 4대째 내려오는 기술을 바탕으로 공작새 모양의 손잡이가 특징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부채 만드는 일을 거들고 배웠다.

한때 장인의 삶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에게 전통부채는 버릴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는 노년이 됐다. 이제는 값싼 외국 부채가 다수 수입되면서 전통부채 장인이 길이 험난해졌지만, 그는 이 길을 포기할 없다. 그는 힘이 닿는 데까지 이 길을 가려 한다고 했다. 그런 그의 곁에는 그의 일을 함께 하는 아내가 있어 든든하다. 그 부부의 정성이 가득 담긴 다양한 부채는 부채가 아닌 예술품이었다. 

어느 한적한 농촌 마을을 찾았다. 길 한편에 바쁜 일과로 인해 식사를 채 마치지 못한 밥상에 마음 한 편이 무거워졌다. 주민들이 농사일을 하는 시간,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한적한 길을 따라 걷다가 여러 채소와 야채가 가득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인 가게라는 간판이 붙은 이 장소에는 주인은 없고 방문자들이 물건을 고르고 쓰인 가격을 돈 통에 넣는 방식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텃밭에서 직접 키운 농산물이라 더 믿음이 갔다. 주민들은 이런 믿음에 신뢰를 더해 무인 가게를 열었다. 초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주 고객이었지만, 이제는 외지에도 소문나 나면서 사람들이 찾는다고 했다. 소소한 금액이지만, 할머니들이 대부분인 마을 주민들은 매일매일 수익을 정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가 더 많이 팔고를 떠나 자신의 농산물이 누군가에 팔린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 보였다. 이 즐거움과 소통의 장소가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금강 하구둑 인근을 찾았다. 바다 풍경과 함께 걷다 한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40년 경력의 제빵사 남편과 아내가 운영하는 빵집이었다. 남편은 제빵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힘든 시간을 견뎌 내기도 했다. 원래 부부는 타지역에서 살았다. 서천군에는 연고가 없었다.  어느 날 아내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장기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병원을 찾다가 서천군 인근의 병원으로 왔고 남편은 아내의 간호를 위해 서천군에 터전을 잡았다. 

 

 


큰 불행이 이 부부와 서천군의 인연을 시작하게 했다. 큰 시련이었지만, 남편은 그저 풍경이 좋아 지금의 자리에 빵집을 열었다. 또한, 사고 후유증으로 장기 재활이 필요한 아내를 위해서도 서천군이 적격이었다. 많은 이들이 회복이 힘들다 했지만, 아내는 긴 재활을 견디며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거동조차 힘들었지만, 지금은 홀로 걷고 산책도 가능하다. 시련이 이들 부부를 더 돈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사랑이 가득 담긴 단팥빵이 이 빵집에서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세월의 흔적 가득한 건물들이 곳곳에 있는 마을을 찾았다. 과거 번성했을 마을을 상징하는 극장 건물부터 여러 건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건물들을 따라가다 한 이발소가 보였다. 50년도 넘었다는 이발소는 이 마을의 흥망성쇠를 이 장소에서 지켜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발소 건물도 나이를 들었고 이발사도 나이를 먹었다.

그 이발소 옆에 큰 콩국수 식당이 있었다. 이발사의 아내가 운영하다 지금은 아들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아들은 15년 전 귀향해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 일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아픈 몸에도 일을 쉬지 않는 어머니를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다. 

이 식당은 콩국수는 콩 국물을 당일 만들어 만든 만큼의 사용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국물을 내는 마지막 단계 일을 직접 하고 있었다. 전부터 내려오는 방식으로 이렇게 하면 더 걸쭉한 국물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수작업으로 하는 작업이 힘들기도 하지만, 전통 방식을 버릴 수 없었고 이는 식당을 찾는 단골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아들과 그의 아내는 그런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식당의 역사를 또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50년 넘은 이발소와 그 옆 콩국수 식당, 근. 현대사 흔적이 공존하는 서천군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서천군에는 근. 현대사의 파편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이웃들은 지역의 역사를 단절시키지 않고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합쳐진 근. 현대사의 파편들은 장항제련소 용광로에서 만들어졌던 철처럼 서천군의 단단한 지지대가 되고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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