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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장영실이 주도한 조선 천문 연구가 허무한 끝을 맞이했다. 평소 세종의 과학 진흥정책에 대해 반대하던 일부 사대부 세력들은 조선의 비밀 천문 연구에도 강하게 반발했다. 임금이 그 일을 주도하는 탓에 직접 반대는 못 했지만, 연구를 막기 위해 보이지 않게 움직였다. 


이 상황에서 명나라가 조선의 천문연구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상황은 더 급하게 돌아갔다. 주변국들의 천문 연구를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는 명나라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는 건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는 명나라가 조선을 불경죄로 겁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고 군사적 충돌까지 우려되는 일이었다. 


하연은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나라의 안위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들어 비밀리에 조선 천문 연구소를 없애려했다. 당연히 그 연구소에 있던 장영실을 비롯한 인물들의 목숨도 무사할 수 없었다. 하연은 장희제를 끌어들여 그 일을 하도록 사주했다. 장희제는 인간적인 고민을 했지만, 자신의 출세에 대한 욕망과 장영실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그 일을 앞장서서 했다. 





장영실은 마지막까지 기록물이라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불타는 천문연구소와 더불어 그 역시 죽음의 문턱으로 다다르고 말았다. 이찬이 뒤늦게 그곳을 찾았을 때 그가 만난건 잿더미가 된 천문연구소와 불에 탄 3구의 시신이었다. 이렇게 조선의 천문 연구는 큰 좌절 속에 빠져들었다. 세종 역시 이에 큰 슬픔과 분노를 드러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이 일의 배후를 알고 있었고 순간 이들을 숙청할 마음도 가졌지만, 즉위 후 유지했던 반대파까지 함께하는 포용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세종은 슬픔을 억누르며 천문을 비롯한 격물 연구의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반전이 있었다. 화재 당시 사망한 것으로 알았던 장영실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희제의 보이지 않은 지략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장희제는 명나라에서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장영실의 목숨까지 거둘 수 없었다. 그는 장영실을 죽은 것으로 위장했다. 대신 장영실에는 생존을 위한 조건이 있었다. 장희제는 장영실에게 그의 존재가 세종과 조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그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말 것을 종용하는 서찰을 남겼다. 


그렇게 장영실은 은둔의 삶을 살게 됐고 그의 존재는 세상에서 지워졌다. 이렇게 큰 사건이 지나고 장영실이 사라진 이후 조선은 겉으론 평안한 시절을 보냈지만, 천문 및 과학 연구 역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세종 역시 의욕을 잃고 건강까지 나빠졌다. 


이런 세종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은 아악의 연구였다. 세종은 천문과학은 물론이고 궁중 음악인 아악에도 표준을 만들기 힘썼다. 이를 위한 기본이 되는 표준음 연구는 과학적 지식이 밑 바탕이 되어야 했지만, 진행이 지지부진했다. 특히, 음의 중심을 잡아줄 편경제작은 계속 난항을 겪었다. 세종은 이 일의 책임자 박연에게 힘을 실어주며 독려했지만, 편경제작은 기술 부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장영실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됐다. 아악의 책임자 박연이 편경제작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기술일 지닌 편경 장인을 만나게 되고 제대로 된 편경 제작에 성공하게 되는데 그 장인이 장영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영실은 오지에서 은복이라는 이름으로 은거하며 백성들의 실생활에 유용한 기구들을 제작하며 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세종의 숙원이었던 음의 표준을 만들기 위한 작업 중 하나인 편경제작을 나름의 방법으로 하게 되고 박연과의 만남은 완벽한 편경 제작으로 이어졌다. 분명 엄청난 포상을 받을 일이었지만, 장영실은 끝내 사양하며 은거 생활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변화한 상황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로 다가왔다. 마침 그가 만든 휴대용 천문 관측기구가 그의 지인인 이천에 전해지고 그의 생존을 확신한 이천은 그의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명나라에서 인연을 맺은 주태강이 조선 천문연구를 허락한다는 명나라 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사신으로 조선에 오면서 긍정적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그를 애타가 찾던 이천과의 재회는 그가 다시 궁궐로 돌아올 것을 예고했다. 이번에는 편경제작을 한 장인으로서 당당히 돌아올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된 장영실이다. 사진으로 조선에 온 주태강도 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인물이다. 한때 생.사의 갈림길에서 큰 고비를 맞았던 장영실의 화려한 부활은 시간문제가 됐다. 


물론, 그의 부활은 조선 정국에 큰 파란을 일으키는 일이 될 수 있다. 아직도 조선 천문, 과학 연구에 부정적인 사대부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고 노비 출신 장영실에 대한 견제와 질시가 여전한 조정의 분위기 역시 큰 위험요소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장영실에게는 앞으로 더 어려운 싸움이 예고되고 있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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