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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임진왜란 1592, 5회는 임진왜란이 후반부를 다루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조선은 나라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몰렸다. 왕을 비롯한 집권층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북으로 피난 가기에 급급했다. 왕은 명나라 망명을 고려하기에 이르렀고 백성들은 침략군의 약탈과 노략질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됐다. 


조선에서의 손쉬운 승리에 일본은 기세를 몰아 조선을 넘어 명나라로의 진격을 현실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생각지 않았던 변수가 등장했다. 우선 바다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며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육지에서는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이 그들을 괴롭혔다. 조선의 북쪽 깊숙이 진격한 일본군은 군수물자 부족은 물론이고 식량난에 시달리며 사기가 떨어졌다. 당연히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였다. 


일본의 주춤하는 사이 명나라의 참전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을 국제적으로 변모했다. 명나라는 자국의 상황이 그리 여유가 없었지만, 일본군의 자국 침략과 자신들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우려했다. 게다가 조선은 그들과 오랜 사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제후국이었다. 명분과 실리에서 전쟁을 무조건 외면할 수 없었다.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조선은 밀리기만 하던 육전의 상황도 반전시킬 수 있었다. 명나라군은 일본군의 주력 무기인 조총을 능가하는 사거리와 위력을 가진 화포로 무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화력전과 함께 새로운 진법을 구사하고 일본군을 압박했다. 결국,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고 일본군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일본군은 한양으로 주력 부대를 집중시키며 조.명 연합군의 남하를 대비했다. 그나마 한양의 군량 사정이 가장 나았다는 점을 고려한 전략이었다. 공세와 수세가 바뀐 셈이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탈환을 기점으로 빠르게 남하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군은 그 속도를 더 빨리했다. 그들은 그들의 5만 대군이 먹을 군량의 확보를 위해서도 한양 탈환이 급했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이 화를 불러왔다. 명나라군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던 일본군은 벽제관에서 명나라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예상치 못한 대패에 명나라군은 전쟁에 대한 열의가 급격히 식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독자적으로 한양수복을 계획하고 군사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한양 인근의 행주산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은 3천명이 채 안 되는 병력이었고 일본군은 3만명의 대군이었다. 조선군에 절대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조선군은 각종 화포와 신기전, 비격진천뢰는 신무기를 활용해 수적 열세를 만회했다. 결국,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조선군의 빛나는 승리로 기록된 행주대첩이었다. 


벽제관 전투와 행주대첩은 명나라와 일본군 모두에 강화협상의 필요성을 높였다. 조선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됐고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이 길어지면서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협상이 진행되면서 일본군은 남해안 지역으로 철군하여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휴전상황이었지만, 일본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1차 공격에서 패전했던 진주성을 다시 공략해 이를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진주성에서는 엄청난 살육이 자행됐다. 


명나라 심유경, 일본 고니시가 주도권 협상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양측 강화조건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심유경과 고니시는 문서를 위조하는 등의 방법응로 양측 정부를 모두 속이는 술수를 발휘했다. 이를 통해 일본 도요토미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왕으로 책봉됐다. 도요토미로서는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도요토미가 아니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한 직접 공격이 어려움을 인정했지만, 조선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도요토미는 재침을 명령했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을 그렇게 깨졌다.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또 한 번의 전면전이었다. 강화협상의 사기극임을 알아차린 명나라는 수군을 포함한 대규모 부대를 다시 조선으로 보냈다. 2번째 국제전이었다. 


명나라가 개전 초기부터 참전했지만, 정유재란 초기 상황은 조선에 불리했다. 일본의 농간에 조선 조정은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을 파직했고 그가 없는 조선 수군은 칠전량에서 괴멸됐다. 재해권을 장악한 일본은 호남지역까지 마음껏 공략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전국 각지에서 약탈과 납치, 살인을 자행했다. 정유재란은 영토 전쟁이라기 보다는 조선이 가지고 있는 하나라도 더 빼앗아 가려는 노략질에 가까웠다. 조선의 피해는 훨씬 더 컸다. 


하지만 일본군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휴전 기간 전쟁에 대비한 조선군은 이번에는 약하지 않았다. 육전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고 그들을 남쪽으로 밀어냈다. 이순신이 복귀한 수군 역시 빠르게 제해권을 장악하며 일본군을 압박했다.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전쟁을 주도했던 일본의 도요토미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를 서둘렀다. 사실상 전쟁의 끝이었지만, 조선 삼도수군통제가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다. 


이순신은 철수하는 일본군에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고 노량해전을 통해 수백척에 이르는 일본 선박을 격침했다. 이순신은 선봉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흉탄에 전사하고 말았다. 장렬한 최후였고 그의 전사와 함께 임진왜란도 종지부를 찍었다. 침략자들을 몰아냈지만, 전쟁터였던 조선에는 너무 큰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의 후폭풍은 동북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침략국 일본은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고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던 도쿠카와가 새롭게 정권을 잡았다. 전쟁에 참전한 명나라는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에 멸망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전쟁 당사자들의 정권이 모두 바뀌는 와중에도 조선의 왕조는 유지됐다. 당연히 양반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의 위치도 변함이 없었다. 백성들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전쟁 후유증이 상당했지만, 조선의 집권층은 이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도리어 그들의 흔들리는 기득권을 더 강화하기 위해 더 보수화된 정책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명분론에 매몰돼 병자호란이라는 또 하나의 굴욕적인 패전의 역사를 만드는 우를 범하기까지 했다. 


결국,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처를 끝내 치유하지 못했다. 조선은 집권층은 전쟁을 교훈삼아 나라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지 못했다. 조선은 이후 쇠락을 길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무책임한 정권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백성들에 가중됐다. 반대로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은 조선의 앞선 문물과 도자기 제조를 비롯한 기술들을 습득해 나라 발전의 동력을 삼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끝났지만, 이를 발전적 변화의 계기로 삼지 못한 조선은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의 역사는 아직도 우리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이는 임진왜란을 결코 승전의 역사로 기억할 수 없게 하는 이유다. 


드라마 임진왜란 1592는 5회만으로 7년 전쟁을 모두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우리만의 시각이 아닌 중국, 일본 3국의 시각으로 조명했다는 점과 상대적으로 드라마 등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이면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특히, 마지막 전쟁 후 조선만이 그 왕조를 유지했다는 언급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사진, 글 : 지후니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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