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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은 현대사에서 격변을 가져왔던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유신헌법을 통해 사실상 종신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던 절대 권력자 박정희가 그의 최 측근의 총탄에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분명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이후 맞이한 절대 권력의 붕괴는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후 대한민국의 또 다른 군사 독재의 시대에 맞이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비극이 역사로 남았다. 그리고 그때의 아픔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사살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에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잃었고 이후 친일파들의 협력 속에 정부의 기능을 하나하나 일본에 내준 상황이었다. 여기에 군대마저 해산당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에 저항했고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통해 국제사회에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열강들이 주도하는 국제 정세에서 조선의 외침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다. 

이렇게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있을 때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국내외 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이었고 지금도 일본에서 그 업적을 칭송받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1대 통감을 지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했고 독립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이들에게는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그가 홀로 주도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연해주 일대로 들어온 독립운동가와 해외 독립운동 조직의 치밀한 계획과 협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치밀하게 준비됐다. 하지만 의거를 직접 실행에 옮긴 이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안중근 의사 역시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나라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우선했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투신한 모든 이들의 생각이 그와 같았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국민들을 대신해 침략자 그리고 전 세계에 나라의 독립의지를 행동으로 전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독립의지를 담은 외침을 토해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의연함을 보였다. 그는 독립군의 장교로서 교전 중 적장을 사살한 것으로 살인자가 아님을 강력히 주장했다. 

일본은 그의 재판을 서둘러 마쳐야 했다. 일본은 안중근을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저항하는 자들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를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그들의 침략행위가 더 알려지는 일이 초래됐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철저히 불공정한 재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1살의 젊은 나이에 그 삶을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지 전까지 옥중에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정리해 집필하는 열정을 보였다. 당시 그를 감시하던 감옥의 간수들조차 그에게 감복했음을 익히 전해진 일화다. 그 때문에 안중근이 남긴 기록들은 지금도 전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100년의 세월의 더 흘렀다. 그의 사후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모두가 하나가 되어 조선의 독립을 외쳤고 이후에도 일제의 억압 속에도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도 이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안중근 의사가 염원하던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졌지만, 대한민국은 수많은 격동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그 시련의 역사를 넘어 지금의 대한민국은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소망했던 독립된 조국에 묻히는 일은 지금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 집행 후 그의 유해가 있는 장소를 철저히 숨겼다. 그의 유해가 묻힌 장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수 있고 그의 정신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두려웠을 지도 모른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하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지만, 원하는 결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안중근 의사의 묘소는 서울 효창공원에 가묘 상태로 남아있다.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의 정신은 계속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10월 26일 그의 의거에 대해 언론이나 방송 매체에서 큰 언급이 없다는 현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만약, 안중근 의사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향했던 그의 총알은 또 다른 일제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을 향했을 것이다. 

그의 의거를 더 기억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상세히 알려야 하는 건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일제의 잔재와 친일의 역사를 향한 강한 경고와 함께 후세의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더 발굴하고 알리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나라의 전통성을 바로 세우고 우리가 불의에 저항 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사진,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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