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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59회] 해방이후 혼란기 속 이승만 정부 탄생, 그 뒷이야기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4. 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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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는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59회에서는 대한민국의 최초 정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의 이야기를 다뤘다. 해방 이후 시작된 미 군정,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위한 미국과 소련의 협상, 그 과정에서 유력 정치 지도자들의 행보를 이승만을 중심으로 보여주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도 선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미국이 북으로는 소련이 진입하며 대립하는 구조였다. 해방은 되었지만, 두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상황이 됐다. 미국과 소련의 주도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정부 수립 전까지 그들이 주도하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반대하는 반탁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지만, 미국과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어 관련 논의를 지속했다. 

해방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전략은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과도 정부를 구성하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함께  물러나는 것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이었고 표면적으로 큰 대립을 하지 않았다. 과도정부 수립에 대한 공감대도 있었다. 미국은 소련도 동의할 수 있는 임시정부 지도자를 원했다. 

 

 

 

 



이는 미 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던 이승만에게는 위협 요소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고 독립운동 역시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했다. 한때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함께 하고 총리와 대통령에 오르기도 했지만, 중국에서의 활동보다는 미주지역 활동에 주력했고 이후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탄핵당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활동 무대는 미국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정치권에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왔을 때 미 군정의 환대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 고군분투했던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이 힘겹게 고국으로 돌아온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과도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과 미 군정의 관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승만은 반공을 기치로 하여  좌익과 우익이 함께 하는 과도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또한,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가 하면 소련과의 협상을 이어가는 미 군정을 비난하는 등 그만의 정치 행보를 이어갔다. 이승만은 전국을 순회하며 자신의 주장을 대중들에게 알렸고 그 인지도를 높였다. 우익 편향의 행보는 우익 성향의 단체들과 협회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승만은 어느새 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가 됐다. 이런 이승만에 김구를 비롯한 중국 임시정부 세력이 지원하면서 미 군정은 소련과의 협상에 어려움이 커졌다. 

이승만의 이러한 움직임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위한 수단이었고 미국과 소련의 협상이 결국 결렬될 수 것이라는 국제 정세 판단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세력의 확장을 경계하고 있었고 그리스 내전은 공산세력 확장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증폭시켰다. 미국은 공산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외교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미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던 이승만은 이러한 미국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정권을 잡기 위해 대중들의 지지와 여론 형성이 중요함도 알고 있었다. 그의 전국 순회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유력 정치인으로 그 입지를 단단히 할 수 있었다. 이승만으로서는 미국에서 생활을 통해 터득한 정치 감각을 적극 활용한 셈이었다. 여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 군정의 소련과의 협상을 비난하면서 우익 인사로서 자신을 더 강하게 인식시켰다. 이런 이승만에 김구가 적극 지원하면서 그를 뒷받침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과 반공이라는 공감대 속에 정치적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움직임에 미 군정은 그를 임시정부 수립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했다. 대신 미 군정은 좌익과 우익 세력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지도자였던 여운형과 김규식을 대안으로 고려했다. 하지만 미 군정과 동조하는 지도자들의 암살이 이어지면서 그 계획이 틀어졌다. 

특히, 국내에서 탄탄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대중적 신망이 두터웠던 여운형의 암살은 미 군정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도 큰 손실이었다. 그는 중도 좌파 성향으로 좌익과 우익 모두에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임시정부를 이끌 능력과 자질도 있었다. 실제 여운형은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여운형은 극우 단체의 10여 차례가 넘는 암살 위험을 극복했지만, 12번째 암살 시도를 끝내 피하지 못했다. 

이후 미 군정은 다른 대안을 모색했지만, 암살의 시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유력 인사들의 암살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들과 협력하는 인사들이 희생되면서 미 군정의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는 이승만에게는 큰 기회가 됐다. 미 군정은 이승만을 형식적인 대통령으로 하고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정치구조를 우선 고려했지만, 남한 지역에서 이승만의 정치 지도자로서의 입지는 더 단단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과의 미소 공동위가 결렬되었고 UN 주도하에 남한에서의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가 결정됐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시작이었지만, 한 편으로 남북 분단이 공식화되는 일이었다. 이승만은 이에 동조했고  김구와 김규식 등 중국 임시정부 세력은 강한 반대를 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등과 회담하는 등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그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승만이 이에 동조하면서 이승만과 김구의 협력관계도 끝나고 말았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지역에서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보통, 비밀 선거였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성인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됐다. 이렇게 구성된 의회는 제헌의회로서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었다. 그 헌법에는 지금의 헌법에서 명시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포함하였고 대통령 중임제를 기반으로 한 정치제도, 삼권 분립 등을 명시했다. 

또한, 근로자의 이익 배분권과 토지공개념 등 공공성을 강화한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회주의적 요소가 포함됐다 할 수 있다. 남한에서 좌익 세력이 사실상 배제되었음에도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일제의 억압에 함께 저항한 국민들을 위하는 공공성에 대한 강한 요구가 있었다. 우익을 표방하는 정당들의 정강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사회주의적 색체가 강했다. 제헌헌법에는 그런 사회적 요청이 반영됐다. 이 헌법을 기초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힘겹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국제적 상황, 그 과정에서 테러와 암살까지 좌익과 우익의 극렬한 대립과 남북의 분단, 어렵게 이루어낸 해방이었지만, 민족의 분단이라는 현실 앞에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기 이승만은 당시 정치 지도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정치 감각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권을 가져왔다. 그의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아픔과 함께 한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미소 냉전의 급속히 진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이승만은 그 시류를 잘 읽었다고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당시 남북과 좌익과 우익이 함께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나라가 만들어졌다는 우리 민족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대한 부질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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