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58회에서는 1949년 6월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던 김구 암살 사건을 다뤘다. 김구 암살 사건은 안두희라는 포병 장교에 의해 자행된 사건으로 암살범 안두희는 온 국민의 공분을 샀고 배후에 대한 의혹이 끊임없이 있었지만, 속 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했고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암살범 안두희가 1996년 사망하면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마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 저널 그날에서는 각종 기록들을 토대로 김구 암살사건의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1949년 6월 백범 김구는 그의 자택에 머물러 있었다.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는 당시 북한군과의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나가기 전 그를 면담했다. 김구와 안면이 있었던 안두희는 의심을 받지 않고 김구와 대면했다. 안두희는 가지고 있는 권총으로 김구를 저격했고 김구는 그 자리에서 서거했다.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당시 일제의 암살 위협에도 이를 피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민족 지도자였던 김구는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고국에 돌아왔지만, 그토록 원했던 해방된 조국에서 같은 민족에서 암살당하며 너무나 허망한 죽임을 맞이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온 국민들에게 큰 슬픔이었다. 대규모 국장을 치르긴 했지만, 한 번 떠난 그가 되돌아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국민들을 더 경각하게 한건 암살범 안두희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처벌이었다. 안두희는 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얼마 안 가 10년 형으로 감형되었고 6.25 전쟁 와중에 장기 복역수들이 처형되는 와중에서 생존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그는 형을 면제받았고 현역 군인으로 복귀하며 명예로운 전역을 했다.
민족 지도자 암살범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관대한 처분이었다. 당연히 안두희의 배후에 대한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하지만 6.25 전쟁 중에 김구 암살에 대한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전쟁 후 안두희는 군과 관련한 군납 사업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 강원도 지역에서 세금 납부 순위 3위 안에 들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특별한 인맥이나 배경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군납 사업을 했다는 점에서 안두희에 대한 의혹을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안두희는 4.19 혁명으로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움직임이 커지는 상황에서 은신하며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살아야 했다. 만약, 민주 정부가 지속되었다면 그는 진실을 밝혔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얼마 안가 발생한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다시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진장 규명 역시 다시 요원해졌다.
안두희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여전했고 일부 국민들의 그에 물리력을 행사했다. 안두희는 사람들을 피해 수시로 거쳐를 옮기며 홀로 은거하며 살아야 했다.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그가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안두희는 언론의 인터뷰를 통해 사건의 진실과 배후를 말하려는 듯 보였지만, 끝내 그 실체를 밝히지 않았고 그 생을 마감했다. 결국, 김구 암살사건은 암살범이 안두희라는 사실 외에 더 알려진 사실이 없었다.
사건의 배후를 두고 여러 추측이 있었다. 그와 정적 관계에 있던 이승만의 배후설이 강하게 제기됐다.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적극적이었고 초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김구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고 대립이 극심해지는 상황을 우려했다. 이는 남. 북의 물리적 충돌을 가져올 수 있었고 민족에 큰 불행이 될 수 있음을 김구는 알고 있었다. 김구는 많은 우려를 뒤로하고 북한에 방문해 평화 회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소련이 배후에 있는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한 북한 정권과,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김구는 정치활동을 접고 자택에 은거했다. 비록, 그가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승만 정권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중요 인사들의 암살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우익 세력이 중심이 된 남한 정부로서는 이념보다 민족의 통일을 우선시하는 김구는 위험인물이 될 수 있었다. 우익세력에 있어 김구는 좌익 인사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이승만과 김구의 대립이 크다는 점은 당시 누구가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이승만 정권은 김구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의 암살을 배후에서 지시하긴 어려웠다. 그럼에도 안두희에 대한 처벌과 그를 사실상 사면하는 등의 상황은 여전히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와 함께 미국 배후설도 제기됐다. 미국은 정보기관을 통해 김구를 위험인물이 인식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김구의 존재는 남한 정부는 물론이고 남한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에도 부담이 될 수 있었다. 방송에서 공개된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에서도 김구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또 한 가지 암살범 안두희가 미 정보기관의 요원이었다는 점도 미국 배후설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이를 기정사실화하기에는 미국의 당시 국제 전략상 한반도가 중요 지역이 아니었다. 소련과 공산화된 중국의 위협에서 미국의 방어선은 일본과 대만이었다. 실제 미국은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이후 미군을 철수했다. 영향력을 유지하긴 했지만, 대응 방식은 일본보다 소극적이었다.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미 군정 시절 대립각을 세웠던 김구의 존재는 분명 부담이 될 수 있었지만,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었다.
이렇게 김구 암살과 관련한 진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의문은 있지만, 실체가 없는 추정만을 할 뿐이다. 분명한 건 그가 민족의 지도자였고 나라의 큰 어른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민족이 우선이었고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에도 그의 목소리를 전하는 인물이었다. 목숨을 내던지며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로서는 남북 분단의 현실은 그에게 분명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김구가 같은 민족의 흉탄에 쓰러져 생을 마감한 사실은 우리 역사의 큰 비극이었다. 그의 암살에 대한 실체를 밝히고 진상을 규명하는 노력은 우리 현대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역사저널 그날 258회는 굴곡진 우리 현대사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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