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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치정극의 주인공으로만 볼 수 없는 임금 숙종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4. 1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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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이야기는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의 주요 소재였다. 조선실록을 비롯해 관련 기록이 다수 남아있어 역서적 고증이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수백 년간의 기록 속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 안에서 여러 이야기 소재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중에서 조선 숙종 임금과 인현왕후, 장희빈 등 얽혀있는 이야기는 그동안 수차례 드라마 소재로 활용되었고 당대 유명 여배우들이 장희빈 역시 캐스팅되어 연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골을 우려내듯 드라마화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졌다. 그만큼 그 이야기는 드라마틱 하고 극적인 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숙종의 중전이었던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밀려 서인으로 강등되어 유배생활을 했고 이후 복권되어 중전 자리로 돌아왔지만, 장희빈의 저주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장희빈의 행위가 발각되었고 장희빈은 숙종의 사약을 받고 역시 그 생을 마감했다. 얼핏 보면 한 남자와 두 여인 사이의 치정극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숙종 임금에 대한 이미지는 우유부단한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숙종은 조선 19대 임금으로 1674년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720년 승하할 때까지 무려 46년을 재위했다. 그는 어른 나이에 즉위했지만, 대비 등의 섭정을 거부했고 친정을 했고 오랜 기간 왕위를 지켰다. 그 기간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혼란기 속에서 붕당 정치의 강화로 권위가 크게 떨어진 왕권을 다시 강화했고 조세와 국방 등에서 치적을 남겼다. 그를 치정 드라마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할 수 없는 이유다. 그와 인현왕후, 장희빈 사이의 일은 그의 재위 기간 극히 일부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일요일 MBC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는 숙종에 대해 다뤘다. 

숙종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인조에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 그의 아들 현종에 이어 즉위했다. 숙종은 장자상속을 받았다. 성리학이 나라의 지배 시스템의 근간이었던 조선에서 장자로서 왕위를 승계 받는 건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중요했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위 계승에 있어 장자상속을 받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숙종은 그 점에 있어서 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 

숙종 즉위 당시 붕당정치는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고착화된 상황이었다. 조선 시대 중기 지방의 사림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시작된 붕당의 역사는 선조 때 이르러 서인과 동인으로 나누어져 강한 대립을 했다. 그 대립은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화됐고 북인은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함께 그 세력이 사라졌다. 이후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더 격화됐다. 숙종의 선대왕 현종 때에는 왕실의 예법에 대한 예송논쟁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이 권력을 주도 받으며 양측의 대립은 정권을 잡는 쪽이 상대방을 숙청하는 식의 상호 공존을 거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숙종 즉위 당시 권력의 중심은 남인이었다. 숙종은 남인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고 서인의 손을 들어주며 일종의 정계 개편을 단행했다. 숙종 즉위 후 서인은 권력을 중심이 됐다. 그 과정에서 숙종은 첫 번째 중전이었던 인원왕후가 병으로 승하했고 서인에서 간택한 인현왕후를 두 번째 중전으로 맏이 했다. 인현왕후는 본인이 원치 않아도 서인을 대표하는 정치적 상징성이 큰 인물이 됐다. 

하지만 서인의 권력은 영원하지 않았다. 숙종은 권력의 편중을 경계했다.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서인과 남인 두 붕당의 대립은 적절히 이용했다. 숙종은 서인 세력을 축출하고 남인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환국을 다시 단행했다. 이는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의 입지를 크게 흔들리게 했다. 마침 장희빈에게서 아들이 태어나고 그 아들이 세자가 되면서 인현왕후는 더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정치적 격변 속에 인현왕후는 폐서인 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후 장희빈은 중전의 자리에 올랐고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 남인의 권력은 다시 강화됐다. 

숙종은 이런 남인의 일당 독주에도 제동을 걸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중전 복귀와 동시에 남인을 대거 숙청하고 서인들에게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했다. 숙종 시대 권력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남인으로 서인으로 이동하며 주도세력이 바뀌었다. 이를 주도한 숙종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왕권은 크게 강화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서인과 남인을 대표했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큰 고초를 겪게 됐다.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그 삶을 끝냈고 인현왕후 역시 병으로 중전 복귀 후 세상을 떠났다. 모두 비운의 삶이었다. 어떻게 숙종은 두 여인의 불행과 권력을 맞바꾸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만큼 숙종은 냉정하고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한 왕이었다. 

이런 강한 권력을 기반으로 숙종은 광해군 때부터 시행되었던 대동법의 전국적 확대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일반 백성들의 부담을 한층 덜어줄 수 있었다. 또한, 토지 정리 사업인 양전 사업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며 재정 건전성 확보의 기반을 만들었다. 군역의 불공평성을 해소하는 제도 개선을 하는가 하면 일종의 주민등록 제도인 호패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했다. 여기에 화폐경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상평통보를 만들어 유통하게 했다. 

이외에 국방력 강화를 위해 중요 요지에 산성을 축조하고 중앙군은 5군영 체제로 확립하여 군제도 개선을 마무리했다. 일본과는 통신사 파견으로 교류하고 왜관을 통해 무역을 실시했다. 세조에 의해 폐위하고 사사되었던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권하였고 사육신들들의 복권도 단행했다. 이는 왕에 대한 충성을 유교적 명분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숙종은 재위 기간 사회, 경제, 국방까지 여러 치적을 남겼다. 그를 궁중 암투의 주인공으로만 치부하기 어려운 중요한 이유다. 물론, 그는 성리학적 통치기반을 유지했고 조선에 필요했던 선진 문물의 도입과 사회개혁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 치세 시간 남인이 몰락하면서 서인을 중심으로 한 1당 독재체제가 공고히 된 면도 있었다. 서인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고 정국은 노론이 주도했다. 노론은 이후 경종과 영조, 정조 때까지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을 유지했다. 

이런 아쉬움 속에서도 숙종은 임진왜란 이후 불거진 조선의 사회적 모순을 조금이나마 해결하려는 의지는 보인 님금이었다. 숙종의 확립한 강한 왕권을 기반으로 조선은 영조와 정조시대 부흥의 가능성을 보일 수 있었다. 숙종은 알려진 것 이상으로 조선 후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임금이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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