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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급속히 냉각된 한일 관계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일본의 수출규제와 우리나라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등 맞대응과 민간의 일본 보이콧 운동이 겹쳐지면서 인적, 물적 교류가 급속히 위축되었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에 따른 일본의 갑작스러운 한국인 입국 불허 조치와 정부의 대응 조치가 더해지면서 사태 해결이 더 어려웠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정권의 유지를 위해 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고 일본의 우익 세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가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면서 국제 분쟁 지역화하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은 국제사법 재판소에서 시비를 가리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오랜 기간 우리 주권이 미치는 우리 영토인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 판결로 결정하는 건 일본의 의도에 말려드는 일로 우리 정부는 응하지 않고 있다. 

한일 관계에 있어 지속적으로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독도에 대해 역사저널 그날 256회에서는 우리 현대사의사건들과 함께 심도 있게 다뤘다. 그곳에서 일본의 독도에 대한 주장이 얼마나 허황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인지를 어려 사료들과 함께 반박했다. 

 

 


일본의 독도 침탈의 시작은 1905년 러. 일 전쟁 직후였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세력 다툼을 벌였고 급기야 전쟁으로 이어졌다. 세계 여론은 거대한 제국이었던 러시아에 일본이 상대가 안 될 것이라는 의견이 상당했다. 하지만 일본은 오랜 기간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고 예상을 깨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러시아는 거대한 영토를 보유하긴 했지만, 전 근대적인 황제 중심의 국가 운영 시스템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고 나라의 역량을 온전히 전쟁에 집중하지 못했다.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병합하려는 큰 목표로 온 힘을 다한 일본은 사생결단의 자세로 전쟁에 임했다. 이런 차이는 결과로 연결됐다. 

러. 일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 사건은 세계 최고의 함대로 여겨졌던 발틱함대의 몰락이었다. 러시아는 밀리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유럽에서 발틱함대를 동해로 이동했다. 그 여정은 6개월이 소요됐고 긴 여정은 발틱함대를 지치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발틱 함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시키려 했지만, 우리 동해에서 일본 함대에 괴멸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의 상징과도 같았던 발틱함대의 패전은 러시아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했다. 일본은 러. 일 전쟁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잡았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반도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런 러. 일 전쟁의 와중에 독도는 일본 해군의 첩보 업무를 수행하는 관측소가 위치했다. 명백히 우리의 영토였지만, 일본은 독도를 그들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불법적으로 점거했다. 이는 일본의 독도 침탈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독도에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러시아 발틱 함대의 경로를 파악하고 그들과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일본은 일찍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인지하고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하려 하였고 전쟁의 와중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후 일본은 독도에 대한 지배권을 지속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독도는 각종 고대 문헌을 통해 우리 영토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일본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실제 일본은 독고 인근의 어로 행위에 대해 별도의 허가증을 발급해 준 기록이 있다. 이는 독도가 그들의 영토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또한, 대한제국은 1900년 별도의 칙령을 통해 울릉도와 인근의 섬 독도를 대한제국의 관할에 있음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일본은 1905년 독도와 가장 인접한 일본 시마네현 관보에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다. 일본은 이를 독도에 대한 지배권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독도에 대한 영토편입을 일개 현의 관보에만 기재했을 뿐이었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에 독도, 그들의 말오 다케시마를 편입했음을 관보에 기재한 날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해 기념식을 지금도 매년 거행하고 있고 정부의 관료가 참석해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에 맞서 우리나라에서는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41호로서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날을 기념해 독도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있지만, 1905년은 이미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되었고 대한제국이 이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이에 일본의 독도 침탈은 더 구체화되었다. 일본은 독도에 대한 어업권을 어업인에게 독점적으로 부여하면서 독도를 그들의 필요에 의해 무단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독도를 중심으로 서식하던 바다사자의 한 종류인 강치는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멸종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한때 강치는 만여 마리 이상이 서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1905년 이후 가족과 기름을 얻기 위한 남획으로 개체 수가 급감하였고 1950년대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 강치의 비극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우리 민족의 비극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일이었다. 

이렇게 강제 강탈당한 독도는 일본의 세계 2차대전 패망 이후 당연히 우리의 영토로 돌아와야 했지만, 일본은 전범국임에도 독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연합국의 주축인 미국의 정관계를 상대로 지소적인 로비를 벌여 독도에 대한 지배권이 일본에 있음을 주지시키는 한편, 다방면의 로비를 전개했다. 이는 1951년 일본의 전후 배상을 논의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에서고 계속됐다. 

이 회의에서 일본은 독도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상당수 미국의 정관계 인사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독도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은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영국이 당시 제작한 지도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일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언급을 회피했다. 문제는 이에 대응해야 할 대한민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6.25 전쟁의 와중이기도 했지만,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의 상황은 일제 침략의 직접 당사자인 대한민국이 전후 배상 협상에 참여하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이는 공산정권과 자유 대만으로 갈라진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침략의 가장 큰 피해자인 대한민국과 중국이 참여하지 못한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고 이는 이후 일본과의 과거 청산 문제를 미완의 상태로 이어지게 한 원인이 됐다. 대한민국의 참여하지 못한 회의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주장이 수용되도록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평화회의에서 독도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고 협정문에도 독도 관련 내용은 없었다. 이를 두고 일본은 독도가 자신의 영토이기 때문이었다는 억지 주장을 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제시한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와 전후 일본을 지배하던 미 군정의 지도 등의 증거는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연합국들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해방 후 미 군정 시기 독도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을 했었다. 최근 밝혀진 자료에서 1947년 독도 산악회가 독도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름은 산악회였지만, 민관이 합동으로 독도를 찾아 연구하고 우리 영토임을 표시한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일행은 독도의 식생과 지형을 연구하고 독도에 대한민국 영토임을 표시하는 표지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자료를 사진으로 전해져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들은 이후 독도와 관련한 전시와 대중 홍보 활동을 통해 독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등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독도에 있었다. 1948년 미군 폭격기의 독도 폭격 사건이 그것이었다. 당시 미 공군의 폭격기는 독도에서 폭격 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독고 인근 해역에서 조업을 하던 우리 어선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는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시 폭격 관련 사항은 일본의 어민들에게만 전해졌다. 

이 사건은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미군은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과 유감 표명으로 사건을 서둘러 덮었다. 이 시건은 무고한 국민들의 많게는 수백 명이 희생된 일이었지만, 해방 후 혼란한 사회 분위 등이 겹쳐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해 큰 반응이 없었다. 만약, 그들의 영토라면 큰 반발이 있어야 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이 역시 독도가 누구의 영토인지 알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사건 이후 독도에는 당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설치되었고 자연재해로 그 모습이 사라졌지만, 최근 수중 탐사 과정에서 그 모습이 발견되어 전해지고 있다. 우리 영토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위령비의 존재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자료와 근거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도 다수 존재한다. 그럼에도 일본은 현재로 독도에 대한 주장을 굽히기는커녕 틈만 나면 이슈화하고 있다. 그들의 학생들에게도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가르치고 있고 국방백서에 독도가 그들 영토임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언제든 독도 관련 문제를 국제 이슈화하려는 모습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주장을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미국 정관계 상당수 인사들이 이에 동조하는 것도 현실이다. 

우리 정부는 이슈화 자체가 근거가 없을 일이기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있지만, 내부적으로서는 일본의 주장이 허구이며 관련한 증거가 충분히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다. 독도는 당연히 대한민국 영토라는 당위성 이상의 조치와 내부의 이해, 논리적인 무장이 필요하다. 코로나 사태로 온 나라가 힘든 요즘이지만, 역사저널 그날에서 다룬 독도 관련 이슈는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아직 독도에는 일본 군국주의 망령이 남아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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