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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이면서도 멋진 풍경으로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섬 제주, 한 번 찾으면 또다시 가고 싶어 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광지인 제주지만,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4.3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 사건은 1948년 4월 3일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까지 진행된 무력 충돌로 이 과정에서 14,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민간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좌익 무장세력에 대한 진압과 토벌작전이었지만, 훗날 진상이 밝혀지면서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희생당한 사건으로 다시 정의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이 나오기까지 희생자들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좌익 용공세력으로 매도되었고 피해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좌익 용공분자의 멍에는 대를 이어 연좌제 등으로 그들의 삶을 옭가매는 원인이 됐습니다.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2,000년대 들어 당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한 편, 정부차원의 사과와 후속조치가 이루어졌지만, 그 아픔은 여전히 제주도민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제주에 자리한 4.3평화공원과 그 기념관은 당시의 상황들을 재현하는 한편,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장소입니다. 또한, 그때의 희생의 평화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하도록 하고자 하는 제주도민들의 의지가 투영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비 오던 어느 날 그곳을 찾아 장면 장면들을 담아보았습니다.

 

 

 

평화공원의 전경

 

 

사망자들의 표지석, 행방불명인인의 표지석, 봉안실

사망자들은 3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여전히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한 행방불명자도 수천 명이

이르고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찾은 당일에는 행방불명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야외 전시물을 지나 기념관으로 

 

 

기념관 로비, 당시 영상을 볼 수 있는 시청각 상영실

 

 

전시관의 입구

 

 

 

당시의 시대상과 해방전후 제주의 현황을 담은 기록들

 

 

제 강점기 제주는 일본군이 제주를 병참 기지화하여 곳곳에 기지를 구축하고 수많은 군대를 주두토록 했습니다. 제주는 일제의 억압 속에 상당기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후 해방 이후 제주는 자치권을 회복하고 이를 위해 학교를 건립하는 한편 주민 자치기구를 만드는 등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비극의 시작

 

 

미 군정이 들어서고 남북간 이념 갈등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제주에는 미군정과 주민들 간의 긴장감이 커져갔습니다. 미군정의 억압적인 통치는 주민들의 반감을 불러왔고 급기야 1948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들의 사망하자 갈등은 더 커졌습니다. 제주도민들은 총파업으로 맞섰고 미군정에 이은 대한민국 정부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반발을 진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은 투옥되고 희생됐습니다. 이에 더해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청년단이 진압군에 포함되면서 억압의 강도는 한층 더해졌습니다. 이는 제주도민들의 반발은 거세졌습니다. 

 

 

 

사건의 전개

 

 

제주도민들의 반발은 급기야 무장봉기로 이어졌습니다. 무장봉기는 공산세력들이 주도하였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가 제주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에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진압을 더 강경하게 진행됐습니다. 평화협상이 진전을 보이기도 했지만, 방화사건이 조작되면서 그 기회는 사라졌고 군대에 의한 무력진압이 본격화됐습니다.

 

 

 

피로 물들어가는 제주

 

 

무력진압은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습니다. 실제 무장봉기 세력은 그 규모가 크지 않았고 무장세력과 민간인들을 충분히 분리할 수 있었지만, 군대는 무장세력이 출몰할 수 있는 지역을 초토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산간지역 주민들  상당수는 터전을 잃었습니다. 무장세력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다소 좌익세력으로 몰려 희생됐습니다. 이에 산간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되거나 산속으로 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유지되던 마을 공동체는 상당수 파괴됐습니다.

 

 

 

무고한 희생이 계속되고

 

 

진압 작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6.25 전쟁과정에서 그리고 전쟁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무장봉기 세력이 궤멸된 이후에도 그들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다수의 민간인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수는 14,000명이 넘었고 연령과 남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피해 산에 들어간 수민들은 굶어 죽거나 동사하기도 했고 제주도민들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사망자들의 수는 당시 제주도민의 1/10에 해당하는 수로 제주 특유의 지역공동체는 파괴되고 산간지방의 마을 상당수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제주도민들의 삶 자체가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희생자들의 사진으로 채워진 전시관 출구

 

진상 규명을 위한 힘겨운 발걸음

 

 

사건이 끝나고 제주 4.3사건은 언급조차 금기시됐습니다. 그 진실에 다가서는 건 좌익용공분자로 낙인찍히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군사정권 시대가 끝나고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되는 시점부터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정파적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쉽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가해자들이 상당수 포함된 정치세력들로서는 진상규명이 결코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국가적인 사과가 이루어졌고 최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조금이나마 아픔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주 4.3사건은 비극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넘어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우게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4.3 사건을 왜곡하고 폄하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4.3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론화할 수 있게 된 건 큰 진전입니다. 다만, 여전히 수천 명의 행방불명자들이 존재하고 있고 완전한 진상규명 등 조치가 더 필요합니다. 이런 노력이 후퇴하는 일은 더 없어야 합니다. 제주 4.3 사건은 이념과 정파적 이익을 초월한 인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주 4.3평화공원과 기념관 방문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제주에 가는 분들 중 시간이 된다면 꼭 한 번 방문하기를 추천합니다. 제주 4.3 사건외에 국가권력에 의해 인권이 파괴된 과거사에 대해서도 고찰이 필요합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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