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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남부의 내륙에 자리한 부여군은 금강 지류의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있어 예로부터 농업이 흥한 풍요의 땅이었다. 금강을 따라가며 만날 수 있는 자연경관도 수려하다. 부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건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 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면서부터다. 부여는 그 이후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사비시대 백제는 나라를 다시 부흥하고 수준 높은 문화, 예술을 발전시켰다. 비록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각종 유적과 유물은 백제의 옛 영화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부여 지역의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등의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고대 왕국 백제의 흔적을 담고 있는 부여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큰 지역이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29회에서는 역사의 도시 부여 일대의 이런저런 모습을 살피고 그곳에 사는 우리 이웃들과 만났다. 

금강 하류를 일컫는 백마강변을 따라가다 유람선 선착장을 찾았다. 그 선착장에서 백마강의 풍경을 강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유람선에 올랐다. 멋진 강변의 풍경을 따라갔다. 백마강은 바다와 연결되는 백제의 중요한 해양 교통로로 백제가 활발한 대외 교류를 하고 그 속에서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키고 번영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백제는 백마강이 흐르는 부여에서 애초 도읍지였던 한강 유역을 잃은 이후 길었던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의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는 비운을 맞이했고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유람선을 타고 가다 백제 멸망의 슬픔을 간직한 낙화암에 이르렀다. 낙화암은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이 함락된 이후 사비성의 궁인들이 몸을 던졌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 망국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마강은 유유히 서해 바다로 흐를 뿐이었다. 유람선을 내려 부여 전경을 살필 수 있는 부소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부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부여의 명소를 벗어나 도랑물이 길을 따라 흐르는 마을 길을 걸었다. 아파트와 현대식 주택들이 즐비한 도시와 다른 이 마을은 정취가 느껴졌다. 그 마을 길을 걷고 또 걷다. 야외에서 국수 말리기가 한창인 국수 공장이 보였다. 보기에도 오랜 세월을 담고 있는 외관과 함께 공장 내부에는 60년 넘은 기계와 오래된 작업 기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 국수공장은 75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이런 공장들은 가업으로 자식대로 이어지곤 하는데 이 국수공장은 이웃에서 또 다른 이웃으로 그 역사를 지속하고 있었다. 23년 전 이 공장을 인수한 사장님 부부는 전 공장 사장님으로부터 기술을 배웠다. 과거 사장님은 공예 조각 관련 일을 했었다고 했다. 국수 공장에 무관한 일을 하던 그가 일에 적응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전 사장님은 그를 설득하고 기술을 전수하며 다독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 국수공장은 그 역사를 쌓아가고 있었다. 전 사장님은 국수 공장 뒤편의 집에 함께 거주하며 일을 거들고 지금 사장님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를 아니지만, 국수공장의 전현직 사장님은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국수공장을 맛을 지키기 위해 그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이에 국수공장은 사장이 바뀌는 과정에서 그 맛을 지켜낼 수 있었다. 국수공장은 75년을 넘어 100년의 역사를 향해 하루하루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 부여의 명소 궁남지로 향했다. 약 1,500여 년 전 백제 무왕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인공연못 궁남지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연꽃의 명소다. 그 넓이는 물론이고 수십여 종의 연꽃이 여름에 장관을 이룬다. 해마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큰 연꽃 축제가 열려 많이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코로나 사태로 그 축제가 제대로 열리는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꽃봉오리가 올라온 연꽃 군락은 방문자자들을 맞이할 준비가 하고 있었다.

궁남지에서는 특이하게도 카누를 타고 궁남지 연못을 둘러볼 수 있느 체험이 가능했다. 연잎들이 거대한 군락을 형성한 이후 카누를 타며 마치 밀림을 지나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제 궁남지는 백제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하기 어려운 이색 체험이 가능한 멋진 여행지였다. 

부여의 명소를 벗어나 강변 마을을 찾았다. 규암 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과거 근. 현대 생활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과거 규암 마을은 1960년까지 크게 번성했다. 수로 교통의 요지였던 마을의 나루터와 그 나루터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과 상권으로 인해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도로교통이 발달하고 수로를 이용한 물류 이동이 줄어들면서 마을을 쇠락을 길을 걸었다. 마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과거 나루터와 활력 넘치는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이 과거의 이곳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고 있었다. 

과거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최근 이곳은 옛 건물들에 청년들의 공방이나 카페 등이 들어서며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색다른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지역의 새로운 문화예술의 거점으로 또 다른 길을 모색 중이고 실제 많은 청년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는 마을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변화하는 마을 한편에서 오래된 의상실을 만났다. 이제는 마을의 어르신들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 된 이곳은 그 외관이나 내부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의상실을 지키고 있는 팔순을 넘어선 어르신으로부터 과거 마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 중에는 마을에 홍수가 들어쳤을 때도 재봉틀을 돌렸다는 일화도 들어있었다. 의상실 사장님에게 그만큼 재봉틀과 의상실은 가정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쌓인 세월은 이제 재봉틀을 그의 삶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생계에 대한 걱정을 덜었지만, 일을 놓을 수 없다. 그렇게 의상실의 재봉틀은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을을 더 둘러봤다. 그 길에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예쁘게 꾸민 카페의 화단과 외관, 먹음직스러운 빵이 있는 내부 공간은 유서 깊은 마을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 부부는 도시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부모님이 계시는 이곳으로 귀촌했다. 부여에 터를 잡은 부부는 지역의 특색 가득한 젓갈 파스타 등 독특한 메뉴를 내놓고 있었다. 부부의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이 부부에게는 아픈 사연이 있었다. 2년여 전 이 마을에 정착한 부부에게는 생후 2살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여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만들어가던 부부에게는 큰 슬픔이었다. 부부는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카페 일을 더 열심히 했다고 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있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 싶었다. 

일에 열중하면서 슬픔은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부여와 이 마을은 이 부부를 묵묵히 다독여 주는 소중한 장소가 됐다. 아이와의 뜻하지 않은 이별은 분명 큰 시련이고 지금도 부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지만, 부부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부부가 만들어내는 젓갈 파스타는 그래서 더 특별했다.

백마강변의 또 다른 마을에게 남다른 사연을 간직한 또 다른 귀촌 부부가 있었다. 커다란 고목 아래 모여있는 할머니를 따라가 다다른 떡 방앗간을 운영하는 부부가 그들이었그 그 부부는 과거 도시에서 큰 실패를 경험하고 귀촌을 결심했다. 10여전 전에 이 마을의 떡 방앗간을 인수한 부부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했다.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실수도 있었고 다수의 시행착오 과정도 거쳤다. 남모르게 눈물도 흘려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부부의 떡 방앗간은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떡 만드는 데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실력도 갖췄다. 부부는 떡 방앗간이 자리를 잡자 이곳에 카페를 운영하며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 카페는 부부가 오랜 세월 구상했던 일이었다. 이 카페에서는 커피 등 독특한 차와 이 떡 방앗간에서 만든 떡을 내놓고 있었다. 서구적 스타일의 카페에 익숙한 이들에게 방앗간과 카페가 공존하는 모습은 이채롭게 다가왔다. 이들 카페 일과 방앗간 일을 모두 하면서 더 바쁜 일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제는 고된 하루가 행복하기만 하다. 이렇게 떡 방앗간 카페의 부부는 제2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부여의 또 다른 마을을 찾았다. 마을 입구의 우거진 대나 무 숲과 잘 정돈된 돌담이 정겨웠다. 돌담길을 따라 마당이 넓은 한 가정집에 모여있는 마을 어머니들이 보였다. 어머니들은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을의 어머니들은 마을에 벽화를 그리는 사업이 시작되면서 그림을 배웠다고 했다. 어머니들의 손으로 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졌고 마을 분위기도 달라졌다.

어머니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림 그리기 모임을 지속했고 실력도 키웠다. 어머니들의 그림은 멋지고 세련되지 않았지만, 어머니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림과 함께 어머니들이 이야기가 더해져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림책이 만들어졌다. 어머니들은 꾸준히 그들만의 그림책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그 그림책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낀 어머니들의 생각과 가족에 대한 사랑, 삶의 성찰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책은 그 가정의 역사가 되고 있었다. 진실된 어머니들의 그림과 글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런 어머니들의 작품이 계속 만들어지고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여정의 막바지 한적한 마을을 찾았다. 보부상의 그림이 그려진 벽화를 따라 걷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베틀로 모시를 짜는 가정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두 분의 할머니는 전통방식으로 쉼 없이 모시를 삼고 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할머니에게서 이 마을의 모시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지역은 과거 모시 수공업인 흥했고 지역에서 생산하는 모시는 전국적으로 큰 인기가 있었다. 그 덕분에 인근 시장에서는 모시를 사려는 이들이 몰렸다고  했다. 시대 흐름 속에 모시는 점점 사라져갔다. 모시를 짜는 이들도 사라졌다. 두 할머니는 마을의 모시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중 할 할머니에게는 아픈 사연이 있었다. 모시를 짜고 이를 팔아 가정의 생계를 유지한 할머니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그 일을 했다. 고되고 힘든 일의 연속이었지만, 가족들이 보다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고 일의 고단함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귀하게 키웠던 두 아들마저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할머니는 가족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할머니는 허망한 현실에도 모시를 짜고 만들어내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모시는 삶의 한 부분으로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모시 짜는 일에 열심인 건 슬픔을 잊기 위한 몸부림과 같아 보였다. 이제 이 할머니가 슬픔을 이겨내고 행복한 일상을 찾기를 기원했다. 

역사의 고장 부여지만, 부여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었다. 부여에서 만난 이웃들과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더 나은 지금과 미래를 위해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이 모여 부여는 또 다른 미래를 위한 여정을 지속 중이었다. 부여는 과거 긴 역사 위에 새로운 역사를 더 쌓아가는 중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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