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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인사동에서 발견된 우리 인쇄술의 우수성 입증한 한글금속활자 유물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8. 2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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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 X에서는 조선시대 생활상과 금속활자 인쇄술과 관련한 유적과 유물을 소개했다. 그중에서 올해 6월 인사동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한글 금속활자 조판 유물은 초기 한글의 표기법을 그대로 반영한 활자본으로 한글의 발전사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었다. 

경복궁의 전경을 살필 수 있는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한 여정은 경복궁의 복원공사 과정과 발굴 현장으로 이어졌다. 경복궁은 조선이 시작과 함께 건축됐다. 조선의 설계자라 할 수 있는 정도전의 주도로 건축된 경복궁은 새로운 수도 한양의 중심으로 제1왕궁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경복궁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타고 폐허 상태로 오랜 기간 방치됐다. 그 경복궁은 조선 말기 집권한 대원군에 의해 중건됐다. 엄청난 규모의 대공사로 건축 과정에서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소요됐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통해 세도정치 기간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 국가적 자긍심을 드높이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 후유증도 컸다.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큰 지지를 받았던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이반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문제는 있었지만, 경복궁의 중건은 우리 역사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다만, 경복궁의 중건 이후 조선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망국의 길을 걸었다는 건 큰 아쉬움이었다. 

조선을 계승한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경복궁을 철저히 파괴했다. 경복궁 곳곳의 전각이 해체되어 개인에 매각됐고 그 원형이 훼손됐다. 조선 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에 건립됐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고 왕실을 격하시키는 등의 의도가 포함된 일이었다.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 왕궁이 아닌 용도로 사용되며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되는 아픔도 있었다.

 

인사동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한글 금속활자본 - 문화재청



조선총독부 건물은 해방 후 중앙청으로 불리며  정부청사로 사용됐고 그 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중, 김영삼 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해체철거됐다. 조선 총독부의 첨탑은 보존되어 독립기념관 한편에 전시되고 있다. 이후 경복궁은 그 원형을 되찾기 위한 긴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 1단계 사업이 완료됐고 2단계 사업이 진행 중이고 경복궁 복원은 앞으로 수십 년간 지속될 예정이다. 그 원형을 되살리고 역사적 흐름 속에서 묻히고 사라진 유적들과 유물을 발굴하는 일도 병행하고 ㅣ있다. 그 과정에서 문헌에만 존재하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최근 발굴 작업을 통해 발견된 화장실 유적을 찾았다. 이 유적은 1900년대 초 사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는데 땅속 깊이 묻혀있던 그 터가 발견되어 그 존재가 확인됐다. 화장실 유적은 당시의 건축 양식과 식생활 등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어 그 가치가 크다. 경복궁을 화장실은 자연 친화적인 정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은 큰 규모였다. 이는 조선이 낙후된 국가만이 아닌 문명국가로서의 면모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적은 발굴 작업이 종료된 이후 이 터에 대한 활용 방안이 마련될 때까지 다시 매몰되어 보존된다고 했다. 

경복궁의 유적 발굴 현장을 떠나 도착한 장소는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의 한 공사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최근 의미 있는 유물이 발견됐다. 과거 이 지역은 왕궁이나 관청과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고 오늘날의 시장인 시전 등  상업시설이 있었고 유동인구가 많고 다양한 교류가 있었던 곳이었다. 그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실제 공사를 하면서 땅속 각 층별로 문화재층이 있었다. 그 속에서 발견된 항아리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다. 

그 안에는 1600여 점은 조선 초기 금속활자,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시계와 물시계의 부속품, 중종과 선조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총통과 동종 등이 있었다. 조선 전기 시대의 유물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는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항아리가 과거 중요 물품을 보관하는 수단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자리에 있던 관청에서 사용 빈도가 줄어든 물품을 보관했을 거라는 가설과 임진왜란 등 혼란기에 급히 숨겨둔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그 배경을 떠나 오랜 세월 그 항아리 속에 있었던 소중한 유물들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한글 금속활자는 조선 초기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 표기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은 중국의 한자음을 우리말로 표기하기 위한 표기법을 만들었고 동국정운이라는 서적을 간행했다. 동국정운식 표기법은 15세기에 한정되어 사용됐다. 그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반영하고 있는 금속활자의 원형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여기에 한자 금속활자 역시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 서체는 세종 시대 만들어진 서체인 갑인자로 추정되고 있다. 갑인자는 고려 시대부터 활발해진 금속활자를 계량한 것으로 그 크기를 키우고 필체를 더 세밀하게 했다. 조선은 태종때 계미자라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고 세종 때 더 발전된 금속활자 서체를 만들어 사용했다. 만약, 갑인자 금속활자가 맞는다면 1450년대로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활판인쇄기술보다 수 십 년을 더 앞서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우리의 인쇄술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됐다. 중국은 그들의 4개 발명품으로 종이, 목판인쇄술, 나침반, 화약을 꼽고 있다. 이 발명품들은 인류 문명 발달에 큰 영향을 줬다. 우리 역시 그 영향을 받았지만, 목판 인쇄술은 더 큰 발전을 보였다. 경주 석가탑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라니경은 이견이 존재하긴 하지만, 현존하는 최고 목판 인쇄물이고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목판본은 우리 인쇄술의 발전을 상징하는 보물이다. 

이에 멈추지 않고 목판 인쇄술은 고려 시대 금속활자로 더 발전했다. 금속활자본은 각각의 글자를 조합할 수 있어 필요할 때 서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량 생산에는 목판 인쇄가 유리하지만, 목판은 각각의 조판을 만들 수 없고 그 서책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단점이 있다. 금속 활자는 서적 출판의 유연성을 더 할 수 있다. 금속활자는 지식과 문명의 전파에 있어 보다 속도감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금속활자에 있어서도 빠르게 그 기술을 활용했다. 직지심체요절은 전 세계에서 공인된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다. 상. 하권으로 이루어진 직지심체요절은 상권이 유실되고 하권만 남아있지만,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는 증거가 명백하다. 아쉽게고 그 책은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다. 개화기 프랑스 공사가 전국 각지의 유물과 서적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직지심체요절이 포함됐고 먼 여행길을 떠나게 됐다. 

 

직지심체요절 목판본 - 문화재청



직지심체요절은 오랜 세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다 재불 학자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지고 인류 역사의 유산으로 자리했다. 이를 통해 독일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성서가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수정되어야 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발명국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인류의 유산이자 우리 역사의 유산인 직지심체요절은 여전히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과거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알지 못한 아픈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금속활자에 있어 우리 선조들의 앞선 능력과 기술이 인정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인류 문명 발전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금속활자에 있어 우리는 매우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종이에 적힌 문자와 글이 문화 교류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관련 기술이 발전했다는 건 문화적으로 크게 앞서 나라임을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발견된 조선 세종 시대 금속활자본은 당시의 금속활자 기술을 입증하는 증거다. 단순한 유물 중 하나로 보기에는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조선이 힘없고 시대 변화에 둔감한 후진적인 나라가 아닌 문화, 예술이 발달한 문명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 개화기 난맥상으로 가득했던 일부분의 모습만으로 조선을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음악과 드라마 외에 K 컬처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건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축적된 문화, 예술적 전통이 그 바탕에 있다. 그 위에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더 발전시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역사, 문화, 예술과 관련한 유적과 유물들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 점에서 최근 발견된 한글과 한자 금속활자본의 발견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인식시키는 소중한 보물이라 할 수 있다.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그 실체가 더 명확히 밝혀지고 더 많은 이들이 그 유물을 보고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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