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벗어나 세계사로 그 영역을 넓힌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현대 세계사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그중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대결한 독. 소 전쟁을 다뤘다. 올해 80주년이 되는 독.소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우리에게 많은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의 당사자가 중 하나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 소련이었다는 점에서 언급하기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독.소 전쟁은 나치 독일과 민주주의 서방 진영이 대결한 서부 전선과 비교할 수 없는 파괴적이고 엄청난 피해를 남긴 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결과는 세계의 흐름을 뒤바꿔 놓을 정도로 그 후폭풍이 거셌다. 역사저널 그날 323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와 함께 독.소 전쟁의 발발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서부지역에 대한 전격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독.소 전쟁은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침략을 당한 소련의 사상자는 민간인을 포함해 2천만 명이 훨씬 넘고 독일 역시 전쟁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양측을 포함해 3천여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전쟁으로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참혹함으로 가득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배경은 나치 독일의 독재자이자 제2차 세계대전을 중요 전범이 히틀러의 지독한 인종주의에서 먼저 찾을 수 있다. 히틀러는 독일 아리아인들에게 대한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외 민족들은 철저히 배격하고 차별했다. 이런 히틀러의 인종주의는 수많은 유대인들의 학살로 이어졌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살아가던 집시들도 큰 희생을 치렀다. 히틀러는 공산주의 소련을 이루는 주 민족인 슬라브인들 역시 유대인 못지않게 크게 혐오했다. 그에게 슬라브인들은 멸종되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여기에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혐오까지 더해지며 소련에 대한 적대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절대 권력자의 편견과 잘못된 의지는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1939년 상호 불가침 조약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전쟁 물자를 제공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들에게 없는 물자는 수입을 해서라도 공급했다. 이에 독일과 소련을 오가는 열차는 쉼 없이 국경을 오갔다. 이는 독.소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히틀러의 성향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쩌면 같은 독재자인 히틀러와 공산주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교감이 있어 가능할 일이었다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양측의 밀월 관계에는 서로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 나치 독일은 개전 초기 서부전선에 집중해야 했다. 배후에 적을 두는 건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었다. 실제 독일은 소련의 위협을 불가침 조약으로 무마하면서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미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략을 우려하고 있었다. 소련은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의 동맹 체결을 추진했지만,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경계심으로 협상 진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은 불안한 서부 국경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직 공산혁명 후 안정되지 않은 내부 사정을 정리해야 했다. 이런 소련의 이해관계를 읽고 있던 독일이 손을 내밀었다. 소련은 독일과 직접 협상으로 침략 위험을 해소했다. 하지만 소련의 권력자 스탈린은 독일과의 불가침 협정이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소련은 독일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스탈린의 계획은 1942년 정도면 그들이 원하는 수준의 방어 체계가 마련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소련은 불가침 협정을 지속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다.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협정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서로의 셈법은 달랐지만, 소련과의 불가침 협정으로 동부 전선의 위험을 제거한 나치 독일은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집중했다. 독일은 인근 국가들은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다. 1939년 프랑스를 침공한 나치 독일은 6주 만에 수도 파리를 점령했다. 프랑스가 자랑하던 난공불락의 요쇄 마지노선도 소용이 없었다. 파죽지세의 독일군에 프랑스는 쉽게 무너졌다. 프랑스는 영국에 망명 정부를 수립해야 했고 프랑스에는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그들에게 협력하는 괴뢰 정부가 들어섰다. 프랑스 점령으로 독일은 서유럽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나치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는 이탈리아, 나치 독일에 우호적인 독재자 프랑코가 권력을 장악한 스페인까지 그 영향권에 있었다.
이렇게 서유럽 대부분을 장악한 히틀러였지만, 그의 정복욕은 채워지지 않았다. 영국의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섬나라의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영국은 당시 수상이었던 처칠을 중심으로 독일에 항전했다. 독일은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영국 전역에 무차별 공습을 하는 등 군사적으로 영국을 압박했지만, 영국은 굴복하지 않았다. 영국의 존재는 향후 그들에 우호적인 미국의 참전과 함께 유럽에서의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을 불러올 수 있었다. 히틀러는 영국의 저항 이면에 소련의 존재가 있다고 인식했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의 인종적인 편견에 더해 유럽 정복이라는 목표를 위해 소련 공격을 단행했다. 소련을 굴복시킨다면 영국 역시 버틸 수 없다는 계산을 했다. 또한, 히틀러는 소련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은 불가침 협정 유지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런 소련의 모습이 히틀러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독일의 침공은 전격적이었다. 독일은 그들의 중요한 전술이었던 대규모 기갑부대를 앞세워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미 서부전선에서 큰 성과를 냈던 기갑부대 중심의 독일군의 전격적인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런 독일군에 소련군은 대응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육군과 공군 전력을 상당 부분을 잃었다. 중과 부족의 상황이었다. 소련은 독일의 침략 징후를 첩보전과 국경 지역의 상황 변화를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가 있다. 스탈린의 방심이 가장 유력하지만, 계속된 첩보에도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건 영국을 포함한 서방 세력의 역정보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도 있었다는 의견이 있다. 분명한 건 소련은 독일의 기습을 대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독일은 3대 집단군을 조직해 소련을 압박했다. 방어선이 붕괴된 소련은 내륙 깊숙이 독일군의 침략을 받아야 했다. 바르바로사(중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1세의 또 다른 이름) 작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군의 소련 침공은 일종의 동방원정이었다. 물론, 지도의 잘못된 신념이 그 바탕이었다.
독일의 기습공격은 북부 집단군이 소련 공산혁명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로 향했고 중부 집단군은 소련의 제1 도시 모스크바로 남부 집단군은 소련 남부 키예프를 지나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유전지대로 향했다. 소련의 정벌도 있었지만, 아울로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 확보의 목적도 있었다.
소련군은 초기 크게 밀렸고 주력군이 궤멸됐다. 독일군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고 서부전선에 다시 집중하려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들도 소련이 몇 주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이는 소련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소련군은 어려운 과정에서 결사항전으로 독일군에 맞섰다. 독일군은 민간인을 포함한 대량 학살과 무차별 파괴로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다. 독일군에 잡힌 소련군은 인권이 철저히 무시됐고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에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고 있는 미국과 영국군 포로들이 소련군 포로들을 몰래 도왔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독일군의 만행은 소련군과 함께 소련 국민들의 저항 의지는 한층 더 강해졌다. 민족 말살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침략한 침략군에 민관군이 함께 맞섰다. 철저히 포위된 요새에서는 모두가 전멸할 때까지 독일군에 저항하기까지 했다. 또한, 소련군은 후퇴하는 과정에 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으로 독일군이 현지에서 군수 물자를 조달하지 못하도록 했다. 과거 러시아가 나폴레옹군의 침략에 저항했던 방식 그대로였다.
이런 소련의 강력한 저항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계획한 단기전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했다. 전쟁을 점점 장기전 양상으로 변했다. 이는 독일의 원하지 않았던 동. 서부 전선의 동시 전쟁으로 이어졌고 궁극적으로 그들을 패망으로 이끌었다. 결국,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은 결정적 패착이었다. 이를 두고 히틀러의 독선과 아집, 전략적 무능의 결과라는 평가도 있지만, 당시 상황과 전선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렇게만 평가할 수 없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중요한 건 소련은 독일의 침략에 무너지지 않았고 전열을 정비해 독일군을 자신들의 영토에서 몰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동부 독일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동부전선의 상황 반전은 나치 독일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소련군의 베를린 진입 시점에 히틀러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장은 정리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 전쟁은 가장 비극적인 전장이었다. 인류 전쟁 역사에서 가장 큰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들의 그릇된 판단과 아집에 의해 그 피해가 커졌지만, 그것만으로 이 전쟁을 설명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이 전쟁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자료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고 아직 진행중이다.
이런 처절한 전쟁의 승자가 된 소련은 매해 5월 9일을 나치 독일에 맞서 승리한 승전 기념일로 지정해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독.소 전쟁의 승리는 소련을 가장 높은 승전국으로 그들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실제 소련은 수천만명의 인명을 잃었고 서부 지역이 초토화되는 피해가 있었다. 충분히 승전국의 자격이 있었다. 반대로 패전국 독일은 소련에 장악된 동부 유럽에서 그 영향력을 모두 잃었다. 과거 프로이센 제국의 영광도 완전히 사라졌고 나라는 동서로 분단됐다.
전후 소련은 서방 강대국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동서 냉전 시기 공산 진영의 리더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소련은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이런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 한반도는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났지만, 동.서 냉전의 가장 앞선에 자리하면서 남북 분단과 6.25 한국전쟁의 아픔을 겪게 된다. 독.소 전쟁은 우리 현대사와도 관련이 큰일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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