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막을 내린 2020 도쿄 올림픽은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개최가 1년 연기되는 올림픽이었다. 이로 인해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은 5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나아지지 않는 코로나 상황으로 대부분 경기가 무관중으로 치러졌고 감염병 예방을 위해 각종 행사의 내용이나 진행이 이전과 달랐다.
전 세계인이 모이는 화합의 장이 되어야 할 올림픽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대회가 치러졌다. 바로 옆 이웃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이었지만, 우리 역시 올림픽 열기가 이전 대회보다 차가웠다. 최근 냉각된 한일 관계와 개최국 일본의 독도 관련 도발과 전범기 사용과 관련한 이슈로 더 악화된 이미지는 올림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이전과 다르게 하는 요인이 됐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선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활약은 올림픽에 중계에 사람들을 하나 둘 모이게 했고 국민들은 메달과 같은 결과가 아닌 선수들의 노력과 그 성취에 큰 박수를 보내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메달은 이전 대회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었지만, 국민들은 선수들 모두에게 응원을 보냈고 이전에 조명 받지 못했던 종목들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었다.
최근 역사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는 올림픽과 광복절을 맞이해 그와 관련한 한 인물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는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 그 주인공이었다. 1912년 일제 강점기에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일제 치하의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웠다. 그 역시 20대 중반의 나이에 마라토너로서는 최고의 영광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한 올림픽 영웅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36년 일제 강점기에서 우리 민족은 자기 나라 이름으로 국제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손기정과 그와 함께 마라톤에 출전한 남승용은 모두 일본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해야 했다. 그들의 유니폼에는 일장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손기정 금메달, 남승용 동메달의 빛나는 결과는 얻었지만, 영광의 순간이 될 시상식에서 슬픈 표정이 가득했다. 시상식에서 단상에서 올라가는 국기는 일장기였다. 그들은 시상식에서 함께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그들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올림픽 메달의 영광은 마음 한편에 큰 고통을 안겨줬다. 그 순간 그들 마음속에는 여론 감정이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학업과 함께 가정의 생계를 위한 생업 전선에서 함께 나서야 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마음껏 달리는 것으로 삶의 무게를 덜어냈다. 그는 학교와 집은 항상 뛰어나 오가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달리기에 대한 재능을 서서히 보였다. 그런 손기정을 눈여겨 본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는 신의주에서 경성, 지금의 서울로 상경해 양정고등보통학교 지금의 양정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달리기를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선수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달리기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던 손기정은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거듭하며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전국 대회에서도 그는 독보적이었다.
손기정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선수들과의 경쟁에서도 압도적이었다. 그의 기량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표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비공인이었지만,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인이 일본 대표로 마라톤에 출전하는데 부정적이었다. 지금도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은 그 상징성이 매우 크다. 그런 마라톤에서 조선인 손기정이 대표로 출전해 메달을 획득한다는 건 그들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베를린 올림픽은 그들과 동맹관계에 있는 나치 독일에서 주최하는 대회로 일본에는 그 의미가 클 수 있었다.
이에 일본은 손기정과 함께 유력한 마라톤 대표 선수 후보였던 남승용의 일본 대표팀 선발을 막으려 애썼다. 훈련 과정에서 일본 선수와의 차별은 일상이었고 수차례 대표 선발전을 치렀다. 한 번이면 족할 대표 선발전은 무려 3번이나 실시됐다. 혹시 모른 변수 발생을 기대한 일본의 시도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손기정과 남승용은 월등한 기량으로 일본 선수들을 압도했다. 결국, 3명이 출전하는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남승용은 그 안에 포함됐다.
손기정과 남승용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 어느 종목보다 컨디션 조절이 중요한 마라톤 선수였지만, 그들은 열차에서 장기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은 멸시를 감수해야 했다. 손기정은 그에 굴하지 않고 열차가 잠시 정차한 순간 플랫폼을 달리며 경기 감각을 유지했다.
그렇게 도착한 베를린에서 손기정과 남승용은 황당한 순간을 맞이했다. 일본 선수를 한 명이라도 더 출전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비 선수를 베를린에 추가로 파견한 일본은 베를린 현지에서 또 한 번의 대표 선수 선발전을 치렀다. 불합리한 처사였지만, 손기정과 남승용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이런 시도는 손기정과 남승용의 뛰어난 실력 앞에 무력화됐다. 일본 선수 한 명은 선발전 도중 코스를 벗어나 지름길로 뛰는 최악의 비겁함으로 조선인 선수들과 맞섰지만,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본 역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손기정 마음에는 강한 항일 의지가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
힘든 과정을 거쳐 출전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은 경기 초반 1위 선수를 앞에 두고 2위 그룹에서 달렸다. 당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아르헨티나 선수 자발라는 초반부터 압도적 선두로 치고 나갔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 속 그의 독주는 오버 페이스였다. 점점 힘이 떨어지던 자발라는 경기 도중 기권했다. 이는 2위 그룹에게 큰 기회였다. 손기정은 함께 선두 경쟁을 하던 영국의 하퍼를 따돌리고 경기 후반 단돈 선두에 올라섰고 독주 끝에 결승전을 통과했다. 그의 막판 스퍼트는 엄청났다. 손기정은 당시로는 깨지지 않았던 2시간 30분 벽을 깨는 세계 신기록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영국의 하퍼가 들어왔고 하위권에서 엄청난 스퍼트를 한 남승용이 3위로 골인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2명의 조선인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내는 순간이었다.
기쁨으로 가득한 순간이었지만, 손기정과 남승용을 환호할 수 없었다. 메달리스트들이 흔히 하는 세리머니를 그들을 하지 않았다. 당시 경기장에 있던 일본인들은 그들의 올림픽 성과에 환호했지만, 손기정과 남승용은 그들의 영광이 일본의 영광과 성과가 되는 현실에 깊은 좌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시상대에서 손기정은 우승자 선물로 받은 나무 묘목으로 애써 그의 단복을 가리려 했고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고개를 숙였다. 동메달 리스트 남승용 역시 슬픔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는 훗날 손기정에게 부러웠던 건 그의 금메달이 아니라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나무 묘목이 그에게 있었건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손기정과 남승용은 가장 슬픈 표정의 메달리스트가 됐다. 그들에게는 일제 강점기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아픔이 가득했다. 실제 손기정은 고국의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서 단 한마디 슬프다는 글만 남기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비록, 일본 선수로 메달리스트가 됐지만, 손기정은 자신의 조선인임을 수시로 밝혔다. 그는 자신의 사인에도 한글을 사용했다. 이런 그의 노력 때문이지 당시 마라톤을 중계하는 현지 아나운서는 손기정이 조선인이라는 멘트를 했고 그 기록이 남아있다. 손기정은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자격으로 당시 개최국 독일의 권력자인 히틀러와 면담을 하기도 했다. 한국인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히틀러와 면담한 손기정이었다.
시상식 후 손기정과 남승용은 일본이 주최하는 축하 연회에 참여하지 않고 몰래 숙소를 나와 조선인이 주최하는 축하행사에 참여했다. 그 축하 행사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봉근이 주도했다. 안봉근은 독일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틈틈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와 현지의 조선인들을 손기정과 남승용의 메달을 조용히 축하하고 격려했다. 그곳에서 손기정은 그의 생애 처음으로 태극기를 볼 수 있었다. 그때의 감격은 올림픽 메달 그 이상이었다.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쾌거는 민족의 영광이었다. 당시는 일제의 문화통치기로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언론사나 출판사가 있었다. 각 신문들은 앞다투어 손기정과 남승용의 메달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그들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는 모두를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이에 당시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교묘히 지워낸 기사를 신문에 실었다. 총독부의 검열은 성능이 떨어지는 인쇄기의 탓으로 돌려 피해 갔다. 이런 일장기 말소에 동아일보도 가세했다. 그 기사들은 기사가 큰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총독부는 인쇄기 성능이 상대적으로 우수했던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를 의도적인 행위로 인식했고 관련자들을 구속하는 등 강력히 탄압했다.
마침 일제에 비판적인 언론들을 주시하던 총독부에게 일장기 말소사건은 좋은 구실이 됐다. 결국, 많은 언론인들이 투옥됐고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폐간의 길을 가고 말았다. 이런 사건은 귀국길에 오른 손기정에게도 전해졌다. 그로서는 그의 성과가 오히려 누군가에게 큰 고통이 되는 현실에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손기정을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고 지속 감시했다. 손기정은 귀국 후 제대로 된 환영식을 할 수 없었고 생활 전반을 통제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라톤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아직 20대 중반의 한창나이로 더 나은 기록을 세울 수도 있는 그였지만, 일게 강점기의 환경이 그의 더 높은 성장을 막았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이후 나치의 대외 침략이 노골화되고 이에 따라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과 함께 주축국에 포함된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이어지며 올림픽이 더는 열릴 수 없었고 스포츠 활동도 크게 위축됐다.
일제에 의해 일본은 물론이고 조선까지 전시 체제 속에 포함시킨 상황이 이어지며 그의 선수 생활은 사실상 마무리되고 말았다. 손기정은 지속적인 감시 속에 일본으로 자의반 타의 반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마라톤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세계 최고의 마라톤 선수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이후 그는 해방 때까지 은행원으로 일하며 스포츠가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 있었다.
해방 후 손기정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마라톤 지도자로 스포츠 관련 행정가로 스포츠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코치로 참여한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서윤복,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의 우승을 이끌었고 한국이 마라톤 강국으로 올라서도록 했다. 이후 대한 체육회와 서울 올림픽조직위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개막식이 열리는 메인 스타디움에 들어서는 주자로 나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백발의 노인이 됐지만, 태극 마크를 달고 올림픽 경기장을 뛰는 사실만으로도 행복 가득한 모습이었다. 당시 극비리에 준비되던 마지막 성화봉송과 점화와 관련해 해외 언론에서 연습 과정이 유출되어 보도되는 해프닝이 있었고 손기정의 봉송 순서가 변경되는 일이 있었지만, 그는 게이치 않았다. 그만큼 독립된 조국에서 그의 이름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게 그에게는 중요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지막 소원이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 선수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내고 시상대에 오르는 장면이 그것이었다. 한국 마라톤의 황금기였던 1948년 런던 1952년 헬싱키에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한국 마라톤은 세계 마라톤과 크게 멀어지며 마라톤 변방국이 되고 말았다. 손기정의 소망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그 꿈이 이루어졌다.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황영조가 일본 선수와의 치열한 선두 경쟁을 이겨내고 결승선을 가장 먼저 들어왔다. 당시 1위는 한국이었고 2위는 일본, 3위는 독일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그와 관련된 나라가 메달을 나눠가졌다. 그때는 나라 잃은 한국이 가장 높은 곳에 있었어도 그 기쁨을 누릴 수 없었지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온전히 우승의 영광을 한국이 가져갈 수 있었다.
손기정은 그 기쁨을 현장에서 함께 하며 그의 마음속 한을 풀 수 있었다. 손기정에 이은 황영조의 쾌거는 과거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했고 온 국민에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후에도 손기정은 사회활동을 하며 노년을 보냈고 2002년 지병이 악화되어 90세의 나이로 그 생을 마무리했다. 파란만장하다는 표현이 맞는 삶이었다. 그의 삶은 우리 민족의 영광과 아픔을 함께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전해져야 할 그리스 전사의 투구는 50년이 지나 1986년 손기정에게 전해졌고 그는 1994년 그 투구를 국가에 기증했다. 그 투구는 그의 올림픽에서의 영광을 보여주는 징표가 됐고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그가 풀지 못한 소망이 남아있다. 올림픽 공식 기록에 손기정은 일본 선수로 남아있다. 손기정은 물론이고 국가 차원에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는 일본인 손기정이다. 그 당시 그의 이야기가 부연되어 있긴 하지만, 그의 베를린 올림픽의 영광은 여전히 일본이 가지고 있다. 일본은 도쿄 올림픽 역대 메달리스트를 소개하는 장소에서도 손기정을 일본식 이름 키테이 손으로 표시됐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불법 조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우리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최근 일본의 과거사를 부정하는 역사 왜곡이 더 심화되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시대의 문제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왜곡된 기록을 고치는 노력이 필요하다.
손기정의 삶은 우리의 아픈 근. 현대사의 한 부분이지만, 일제에 저항했던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손기정은 마라톤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지금 우리는 한국의 마라토너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전 세계에서 한국 선수로 인정되고 기억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는 그가 비운의 마라토너로 남지 않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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