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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누군가에 긴 비극의 시작이 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8. 2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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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위인으로 칭송되고 있다. 15세기 유럽에서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아메리카 대륙이 그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서구의 역사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발견이 주는 영향력을 매우 컸다.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일 수 있는 이유지만, 이는 지극히 서구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한편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누군가에 큰 재앙의 시작이었고 서구의 신대륙에 대한 수탈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는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를 보다 입체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다. 역사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콜럼버스와 함께 서구의 신대륙 정복사를 재조명했다.

아메리카 대륙은 비어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이미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과거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거쳐 넘어간 아시아인들이 원주민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바이킹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메리카가 거대한 대륙이라는 인식은 없었다. 이에 본격적인 탐험을 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유럽인들에게 그들의 서쪽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다. 이미 그 시대부터 지구는 둥글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고 서쪽으로 항해하다 보면 인도나 아시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시도는 누구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일이었고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이런 서쪽으로의 항해는 아니었지만, 당시 유럽은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항로가 절실했다. 동. 서양의 주요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장악한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유럽은 아시아, 인도와의 교역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지역에서 나오는 도자기 등 진귀한 공예품과 향신료 등의 수요가 많았고 상인들에게 중요한 무역 아이템이었다.  동. 서양 교역의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막대한 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에 아시아,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 개척은 그 나라의 번영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15세기 신항로 개척의 선두 주자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어 중세 이후 끊이지 않는 전쟁과 분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대신 내륙으로의 세력 확대는 제한이 있었다. 바다는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찾으려 했다. 가능한 일이었지만,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항로는 먼 길이었고 장기간의 항해가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바닷길이었다. 

포르투갈에 콜럼버스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는 서쪽으로 향하는 새로운 동방 항로를 개척할 것을 주장했고 지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미 항로 개척에 나서고 있는 포르투갈은 관심이 없었다. 또한, 콜럼버스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서쪽 바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지나는 바닷길이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항로보다 빠르다는 확신도 없었다. 

콜럼버스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오랜 기간 원나라에서 생활했던 탐험가 마르코폴로의 여행기 동방견문록 통해 아시아, 특히, 인도에 대해 동경했다. 인도 항로를 개척한다는 건 막대한 부를 가져오는 일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기로 했지만, 귀족 출신도 아니고 선원 출신의 탐험가에게 선뜻 후원을 해줄 나라가 나오기 어려웠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향했다. 당시 스페인은 페르난도 국왕과 이사벨 여왕이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다.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과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는 결혼을 통해 스페인을 통합하고 현 스페인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들은 내부 통합과 함께 이베리아반도에 남아있는 이슬람 세력들을 밀어내기 위해 전쟁을 지속 중이었다. 그 한편으로 스페인의 대외 영역 확장에도 힘쓰고 있었다. 두 왕은 아시아로 향하는 신항로 개척에 관심이 있었다. 초기 콜럼버스의 제안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그가 발견한 땅의 총독 지위 부여, 그 땅에서 이익 중 10%를 자신에게 줄 것 등을 요구했다. 다소 황당한 요구였다.

콜럼버스의 주장은 허황된 꿈이었고 스페인에서도 후원을 얻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스페인은 인근 국가인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선교지를 찾으려는 자국 내 가톨릭 세력이 콜럼버스의 후원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얻어 선단을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항로로 향하는 건 큰 모험이었고 선원들을 모집하기도 어려웠다. 콜럼버스는 3척으로 어렵게 선단을 구성해 서쪽 바다로 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향한 항해는 불확실성과의 싸움이었다. 선원들 역시 2 달여 기간 아무 성과 없이 이어진 항해해 지쳐갔다.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콜럼버스는 어렵게 내부 불만을 잠재우며 항해를 이어갔고 1492년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이르렀다. 콜럼버스는 그가 도착한 땅을 산살바드르, 구세주의 섬으로 명령했고 이후 아이티 섬에 도착해 현지 원주민과 만났다. 콜럼버스는 그가 도착한 땅이 인도의 일부분이라 여겼다. 이에 그는 그 지역의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 칭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가 도착한 지역의 섬들의 이름 역시 서인도제도로 명령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는 큰 착각이었고 콜럼버스는 그가 도착한 곳이 신대륙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는 이곳에 일분 선원들을 남겨 정착지를 조성하는 한편, 원주민들과 그 지역에서 나오는 특산물 등을 싣고 스페인으로 귀향했다. 콜럼버스의 발견과 신항로 개척은 유럽에는 큰 충격이었다. 기존에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도 했다. 이후 각 나라별로 신항로 개척을 위한 움직임이 경쟁적으로 일어났다. 신대륙 발견과 항로 개척의 선두 주자가 된 스페인은 이후 해상 강국으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이런 큰 업적을 이룬 콜럼버스지만, 그의 미래는 영광으로 가득하지 못했다. 이후 스페인의 큰 후원을 받아 2차 항해에 나섰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유럽인들은 새로운 땅에서 황금 등 당장 이익이 될만한 결과를 기대했다. 탐욕 가득한 항해였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2차 항해는 실망스러웠다. 오히려 기존에 조성한 정착지가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파괴되는 등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콜럼버스에 대한 스페인의 신뢰는 크게 떨어졌고 큰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서쪽으로 향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콜럼버스는 신항로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잃었다. 크게 떨어진 콜럼버스의 위상은 이어질 3차, 4차 항해 준비를 어렵게 했다. 콜럼버스는 그 항해를 통해서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점점 신항로 개척의 선두주자에서 멀어졌고 더는 탐험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의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이 사망한 은 콜럼버스의 재기 가능성을 사라지게 했다. 1506년 콜럼버스는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그가 발견한 땅을 인도로 확신했다. 

훗날 이탈리아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신대륙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후 그 신대륙은 그의 이름 따 아메리카로 불리게 됐다. 역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신대륙의 발견자로 기록하고 있다. 콜럼버스는 살아서 그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사후 그의 업적을 인정받았지만, 신대륙 발견자로서 그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런 콜럼버스의 불운과 함께 콜럼버스는 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황금 등 물적 자원의 확보가 이루어지 않는 상화에서 콜럼버스는 지역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노예 무역의 대상으로 하는 등 비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서양인들의 신대륙 발견은 원주민들에게 약탈과 착취, 정체성 상실의 역사가 됐다. 서양인들은 소수였지만, 앞선 무기로 원주민들을 제압했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원주민들을 대했다. 서양인들에게 원주민들은 값싼 노동력이었다. 마치 가축과 같은 존재였고 그들은 노예무역의 대상으로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서양인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은 기회의 땅이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서양인들은 침략자였다. 초기 서양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원주민들은 점차 그들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기회의 땅에서 그들의 탐욕을 채우려는 서양인들의 총칼 앞에 원주민들은 무기력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 발견은 지옥의 문을 여는 일이었다. 

이후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멕시코의 아즈테크 문명과 남미 잉카 문명을 차례로 정복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었지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었다. 문화, 예술, 과학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 인구 수는 서양의 정복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혹자는 아즈테크 문명의 인신공양 등 그들의 비 인륜적인 전통을 부각하며 그들의 후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유렵은 긴 세월 전쟁과 살육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도구가 석기 시대에 머물렀던 것도 도구의 발전 없이도 충분히 풍요로운 삶을 살수 있었던 탓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즈테크 문명은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에 의해 잉카 문명은 또 다른 정복자 피사로에 의해 무너졌다. 이들은 소수의 병력만으로 손쉽게 거대한 문명을 무너뜨렸다. 원주민들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무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침략자들을 상대로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아즈테크 문명의 멸망에는 코르테스와 연합한 주변 부족들이 힘이 크게 작용했다. 잉카 문명은 그들의 왕이 어이없게 포로가 되면서 싸움의 주도권을 내줬다. 원주민들은 정복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막대한 금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탐욕만 더 자극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동안 원주민들이 겪지 못한 전염병이 치명적이었다. 서양인들이 가지고 온 천연두는 원주민들에게 불치의 병이었고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갔다. 서양의 정복자들은 그렇게 손쉽게 수천 년간 이어진 분명을 차지했다. 

그렇게 아메리카 대륙을 장악한 서구 세력은 현지의 인적, 물적 자원을 마음껏 활용했고 부를 축적했다. 그 지역의 금과 각종 광물 자원 등은 유럽 나라들을 부강하게 했고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필요한 농산물을 재배했다. 문명의 교류라는 순 기능도 있었지만, 동등한 관계의 교류는 아니었다. 유럽의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서구 유럽의 생산기지일 뿐이었고 산업혁명 이후 대량 생산 체제가 들어선 이후 그 제품들의 소비지이기도 했다. 신대륙에는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서양인들로 가득했다. 그 아메리카 대륙은 서양인들이 그 주인공이 됐다. 찬란한 문명의 전통은 사라져갔다. 이는 아프리카 대륙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정복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상황으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잔혹한 행위들과 약찰과 파괴가 정당화하는 건 아니다. 서구의 신대륙에 대한 통치는 기존의 전통을 무기했고 파괴적이었고 잔혹했다. 그들의 편의대로 그어진 나라별 경계선은 현재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서양의 발전된 기술을 전해줬다는 인식도 가능하지만, 원주민들이 원한 일이 아니었고 서양인들의 통치를 보다 편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철도와 각종 공장을 건설했던 이유가 전쟁 수행의 목적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점으로 만남을 가지게 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만남은 철저히 불평등한 관계였다. 그 관계를 긴 식민 지배로 이어졌고 불평등의 구조는 지금도 지속 중이다. 인종차별의 나쁜 폐습은 여전히 남아있고 경제력의 차이도 크다. 무엇보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역사의 발전이 외세에 의해 단절되고 왜곡되고 말았다. 35년의 식민 지배에도 그때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임을 고려하면 신대륙의 고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콜럼버스가 과연 추앙받아야 할 인물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그가 당시로는 파격적인 개척자의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침략자이기도 했다. 그의 업적이 모두에서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지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콜럼버스가 아니어도 누군가에 의해 신대륙을 발견되었을 것이고 비극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콜럼버스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장 앞에선 인물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콜럼버스는 그 개인과 함께 당시 시대상을 더해 여러 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진 : 프로그램 외,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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