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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25회] 독소 전쟁의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9. 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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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전장이었던 독일과 소련이 대결한 동부전선, 그 전선에서 양국이 대결했던 독소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교양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25회에서는 독소전쟁의 양상을 크게 달라지게 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살폈다. 

1942년 8월 21일 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약 6개월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양측을 합쳐 다수의 민간인이 포함된 200여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다. 그만큼 스탈린그라드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상징적인 의미가 큰 도시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와 공산주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이 도시에 대해 큰 애착을 보였고 가용한 전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그 이름이 볼고그라드로 불리는 스탈린그라드는 과거 러시아 공산혁명 후 내전 당시 스탈린이 이끄는 공산주의 적군이 기존 왕당파 세력인 백군을 상대로 방어진을 펼치며 큰 전공을 세운 도시였다. 스탈린은 이 도시에서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의 산업화를 이끌었고 스탈린그라드는 소련에서 매우 발전한 도시가 됐다. 이에 1925년 지역의 공산당수는 도시 이름에 스탈린 이름을 더해 스탈린그라드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의 정치적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히틀러는 이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통해 소련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고 전쟁 승리의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보이던 히틀러에게는 레닌그라드와 함께 스탈린그라드는 꼭 점령해야할 장소였다.

 

 


실리적인 측면도 있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의 대표적 산업도시이기도 했고 도시 동쪽의 볼가강은 소련의 중요한 수송로였다. 이 볼가강을 통해 카스피해 유전에서 나는 석유가 소련 내륙으로 이동했다.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소련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지역은 이미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카스피해연안의 유전지대를 장악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전력적 요충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되면서 석유의 안정적 확보는 전쟁 수행에 절대적인 필요조건이었다. 나치 독일은 주축국의 일원이 된 당시 최대 산유국 루마니아로부터 다수의 석유를 공급받았지만, 부족함이 있었다. 지금은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당시 소련의 영토였던 카스피해 바쿠 지역의 유전을 손에 넣는다면 전쟁수행이 한결 수월해질 수 있었다. 독일은 그 여세를 몰아 또 다른 석유생산지인 중동지역으로 세력권을 넓힐수도 있었다. 반대로 소련은 석유 공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었다.

이는 독소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치 독일은 전격전을 통해 초기 독소전쟁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이후 소련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며 단기간에 전쟁을 승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에 히틀러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공격을 중단하고 잠시 소강기를 거쳤다. 이후 히틀러의 관심은 스탈린그라드를 포함한 소련 남부지역에 집중됐다. 이를 두고 잘못된 선택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나치 독일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방향전환이었다. 

이런 배경속에 나치 독일은 1942년 8월 기습적인 대규모 공중 폭격으로 스탈란그라드 공격의 서막을 열었다. 수천톤의 폭탄을 쏟아부은 무차별 폭격은 스탈린그라드 일원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 수 만명의 시민들이 사망했다. 이런 폭격에 그 지역을 방어하던 군인들과 시민들은 극도의 패닉상태에 빠졌다. 소련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많은 시민들이 볼가강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이대로라면 나치 독일은 손쉽게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긴급명령을 통해 절대 물러서지 말 것을 천명하며 시민과 군인들의 전선 이탈을 강력히 막았다. 후퇴하는 이들과 시민들을 군법에 의해 엄하게 처벌했다. 즉결 처분이 이어졌다. 이를 위해 사수부대가 조직되고 강력한 통제를 했다. 또한, 소련은 탈영병 등 군법을 위반한 군인들과 범죄자들로 구성된 형벌부대는 조직해 최전선에 내세웠다. 그들은 독일군의 진격에 가장 먼저 대응하는 역할을 했다. 총알받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대부분 전사했다. 어렵게 독일군을 막아내도 다시 최전선에 투입됐다. 그들의 임무가 끝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 뿐이었다. 

이렇게 강력한 통제와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한 소련은 끈질기게 독일군에 저항했다. 당국의 강압도 있었지만, 다수의 군인들과 시민들은 결사 항전에 동참했다. 스탈린의 독재는 분명 그들 삶에 큰 해악이었지만, 그들은 침략자에 맞서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당면한 위협을 극복하고 그들의 땅을 지켜야 한다는 데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런 소련군에 여성들도 다수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여성들이 군에 참여하는 국가가 없지 않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소련군에는 다수의 여성들이 함께했다. 여군들은 간호, 통신은 물론이고 전투 부대에서도 함께 싸웠다. 육군에서는 독일군을 공포에 떨게했던 저격수들 중 상당수가 여군이었고 적진 깊숙히 침투해 근접 공습작전을 전개했던 여성 전투 비행전단도 공군에 있었다. 소련의 여성 전투비행전단은 성능이 크게 떨어지는 쌍엽기로 구성됐지만, 소음이 덜한 쌍엽기의 이점을 살리는 과감한 저공 비행으로 독일군의 요충지를 폭격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이런 여군들의 존재는 독일군에 큰 충격이었다. 독일군들은 소련군뿐만 아니라 도시에 남아있는 모든 소련인들과도 싸워야 했다. 

 

볼고그라드시 전쟁 유적 - 픽사베이

 


이런 소련의 강력한 저항과 함께 독일군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전투에 직면했다. 대규모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는 거대한 시가전의 장소가 됐다. 크게 파괴된 건물과 시설물의 잔해는 유용한 은폐, 엄폐물이 됐다. 소련군은  새롭게 만들어진 변화를 활용해 소규모 부대 단위로 요소요소 배치되어 진격하는 독일군에 맞섰다. 도시 곳곳에 장애물은 독일이 강점이 전차부대의 진격을 막았다. 독일군은 전차부대의 기동력을 앞세워 상대 진영을 초토화하고 보병이 그 지역에 진입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했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불가능했다. 독일군은 원치않았던 시가전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련군은 근접전을 유도하며 독일군을 괴롭혔다. 바로 지근 거리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맞서 싸웠다. 심지어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벽을 사이에 두고 맞서기도 했고 건물의 층마다 독일군과 소련군이 혼재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반복됐다. 총격전 외에 몸과 몸이 부딪히는 백병전이 일상이었다. 이에 야전삽이 유용한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소련의 일명 껴안기 전략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물론, 다수의 전.사상자 발생은 불가피했다. 이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한 소련군의 생존 시간이 평균적으로 24시간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독일군의 피해도 컸다. 하지만 독일군은 새로운 전쟁 상황에 적응하며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해나갔고 90% 가까이 그들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소련의 수성전은 한계에 봉착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수성전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대규모 반격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소련군에서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반격 작전을 감행했다. 천왕성 작전으로 명령된 이 작전을 통해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독일군을 공격했다. 100만명의 병력이 동원한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해 있던 독일군 30여만명은 순식간에 소련군에 포위되는 신세가 됐다.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군은 이제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다. 

독일군은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했지만, 소련군에 밀려 실패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에 보급도 원할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항공 보급을 지시했지만, 소련군은 이를 간파하고 대비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물자 부족으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부상병들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독일군 진영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희망이 사라진 현실이 독일군들을 심리적으로 흔들었다.

반대로 소련군은 풍족한 보급으로 사기가 올라있었다. 독일과의 전쟁으로 연합군이 일원이 된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수지원을 받았다. 본토가 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던 미국은 엄청난 생산능력으로 군수 물자를 생산하고 연합국들을 지원했다. 미국은 소련에 식량은 물론이고 다수 수송장비와 무전기 등을 지원했다. 미국이 지원한 트럭은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였다. 특히, 소련이 자랑하는 다연장 로켓포의 이동성이 향상되면서 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무전기는 소련의 전차무대에 없었던 장비를 무선기가 대신하며 실시간 의사 소통이 가능해졌다. 부대 단위 전차부대 기동이 가능해졌고 그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미국의 엄청난 군수 지원은 향후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독일에 우세를 점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이런 상반된 상황에서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이끌던 파울루스 장군은 히틀러에게 후퇴 명령을 내려주길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히틀러는 현 위치를 사수하고 결사 항전만을 명령했다. 30만의 독일군 중 상당수가 전투과정에서 그리고 굶주림과 병으로 전사했다. 사람 몸에 붙어 피를 빠는 해충인 이가 힘을 잃은 독일 부상병에 달라 붙어 그 피를 빨고 또 다른 부상병에 붙어 피를 빨아도 이를 제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나타나기도 했다. 

독일군은 그들은 조여오는 소련군의 공세 속에 공포와 절망감 속에 전의를 상실했다. 자신들과 함께 하던 군마를 죽여 식량을 대신했고 맞서 싸울 탄약도 부족했다. 전쟁 중 맞이한 크리스마스는 독일군에게 더 큰 좌절감과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소련군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독일군을 향해 스탈린그라드가 그들의 무덤이며 7초 마다 한 명씩 죽어간다는 섬뜩한 내용의 선전 방송을 지속했다. 실제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놓여있던 독일군에게 그 심리전은 그들의 고통을 더 가중하게 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장군 파울루스는 그 누구보다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히틀러는 그를 이례적으로 원수로 진급시키며 죽음으로 항전할 것을 독려했다. 그에게 최고 명예를 안겨준 것이지만, 파울루스는 그와 남은 병사들의 삶이 더 소중했다. 결국, 파울루스는 남아있는 병사 9만여명과 함께 소련군에 항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볼고그라드시 전쟁관련 조형물 사진 - 픽사베이

 


독소 전쟁 발발후 내내 패하기만 했고 수성전에만 나섰던 소련군이 독일군에 대한 첫 승전이었다. 무엇보다 독일군 중 가장 강하다 할 수 있는 남부 집단군에 대한 승리는 그 의미가 컸다. 제2차 세계대전어서 패배를 몰랐던 독일군에게는 첫 패전이었다. 전력적인 손실이 막대했고 최강이라 자부하던 군의 패전은 심리적 영향이 상당했다.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이후 나치 독일은 동.서 양 방면에서 전선이 2개가 형성됐고 버티기 힘든 상황에 몰렸다. 이는 나치 독일이 패망을 길로 접어들게 했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지만, 승지와 패자 모두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누군가에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겠지만, 그 영광은 무고한 이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에 영웅도시라는 칭호를 내렸지만, 전사한 군인들이나 사망한 사망한 시민들에게는 의미없는 일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항복한 독일군 9만여명 중 전후 독일로 살아 돌아간 이는 수 천명에 불과했다.

즉, 전쟁은 모두에게 아픈 상처만 남기는 일일 뿐이었다. 그 역사적 의미와 예기한다 해도 그때 세상을 떠난 이들의 원통함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의 죽음을 무미건조한 몇 줄의 글로만 남길 뿐이다. 몇몇 주요 인물들은 그 이름이라도 남길 수 있지만, 대다수 군인들과 시민들은 숫자 중 한 명일 뿐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여러 전쟁사를 다시 살피면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승패의 분석과 그 영향이 아닌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든든한 국방력은 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 목적은 전쟁에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전쟁을 막는데 있어야 한다. 전쟁은 몇몇 정치인들에게 의해 일어나지만, 실제 전쟁의 승리를 위해 피흘리는 이들은 무고한 군인들과 시민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재조명은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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