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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일제에 충성한 최악의 친일 경찰, 김태석과 노덕술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8. 3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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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는 8월 29일 치욕의 역사인 경술국치일을 맞이해 대표적인 친일 경찰 두 명의 행적을 되짚어 봤다. 그 과정에서 친일파들의 궤변과 자기 합리화의 모습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도 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뿌리내린 당시의 안타까운 역사도 재조명했다. 

8월은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 두 가지가 있다. 8월 15일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광복절이 있고 8월 29일 일제에 국권을 넘긴 경술국치일이 있다. 이미 1905년 이완용을 포함한 친일파 대신들의 주도로 체결된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사실상의 식민지 상태였다. 이후 일제는 단계적으로 국권을 침탈했다. 그 과정에서 군대가 해산되고 사법권과 경찰권도 일제에 넘어갔다. 껍데기만 남은 대한제국과 일제의 한일병합 조약은 형식적이 절차에 불과했다. 이후 대한제국은 사라졌고 황실은 일본 황실에 부속된 왕으로 격하됐다. 이후 긴 일제 강점기가 시작됐다. 아프지만, 꼭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 민족은 국. 내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의 독립의지를 하나로 모아 표출한 3.1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후 독립운동은 더 활기를 띠었고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탄생한 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3.1운동의 정신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가 민주 공화국이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임을 전 세계에 천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시작한 우리 민주주의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 발전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 

이렇게 구국의 의지로 목숨마저 내 던지며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과 일제의 편에 서서 개인적 영달을 꾀한 친일파들도 존재했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조약에 앞장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을사오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외에 일제 강점기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이 다수 있다. 특히, 애국지사들과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선 일제 경찰에서도 친일파들의 존재감을 매우 컸다. 

 

1세대 친일경찰 김태석



프로그램에서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인 김태석과 노덕술의 친일행각을 재조명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위 경찰 간부로 영전했고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해방 후에도 단죄되지 못했고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이다. 

김태석은 1세대 친일 경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그를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로 지정했을 정도였다. 그는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 출신이었지만, 국가에 충성하지 않았다. 그는 시류의 변화에 편승해 그의 능력을 일제를 위해 발휘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의 저지하고 식민지 조선의 치안 유지를 위해 조선인 경찰들을 적극 활용했다. 일제 치하의 조선인 경찰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기회였다. 그들은 일제의 앞잡이로 더 악랄하게 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고문과 비인간적인 가혹 행위가 함께 했다.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큰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김태석은 대표적인 악명 높은 고등경찰로 김태석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데 있어 큰 공을 세웠다.

대표적인 인물로 1919년 조선 총독부에 부임하는 사이트 총독 암살사건을 주도한 강우규 의사가 있다. 강우규 의사는 당시로는 고령인 60대 나이였지만,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젊은 청년층이 많은 상황에서 강우규 의사는 상대적으로 의심을 덜 받았다. 강우규 의사는 국내에서 노령층을 규합해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도 했고 군자금 모집이나 전달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총독 사이토 부임 소식이 들렸다. 일제는 3.1 운동 이후 기존의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기만적인 문화통치로 변경하면서 새로운 총독으로 사이토를 임명했다. 그런 사이토가 조선으로 부임하는 날을 강우규 의사는 거사일로 지정했다.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의사는 남대문 역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그의 바람대로 사이토 총독 척살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주변에 있던 수십 명의 일제 관헌들과 추종자들이 사망 또는 부상을 입었다. 충분히 우리 독립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강우규 의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은거 생활을 했지만, 앞서 언급한 김태석에 의해 체포됐다. 김태석은 자신의 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자수 의사를 밝힌 강우규 의사를 포박해 압송했다. 

강우규는 가혹한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았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강우규 의사를 체포한 공으로 김태석은 일제 경찰에서 더 고속 승진할 수 있었다. 김태석은 밀정 등을 동원해 독립운동 조직을 와해하고 분열시키는 공작을 진행했고 대표적인 무장 독립단체인 의열단이 주도한 밀양폭탄의거 등 각종 거사 시도를 막아냈다. 

이후 김태석인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으로 승진하며 그 직위가 경기지역 경찰 과정에 이르렀고 경찰을 퇴직한 이후에는 경기지역의 군수를 역임하며 행정가로 변신했다. 그는 군수 시절은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대외 침략 전쟁을 진행하던 일제의 군수물자 지원활동 등으로 극 협력했다. 이런 공적으로 그는 지금의 국회에 해당하는 중의원의 고위직인 참의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서 공로자 명단에도 수록될 정도였다. 김태석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거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일에 그 누구보다 성실했다. 하지만 그의 성취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애국지사들을 고문하면서 얻은 결코 명예롭지 않은 민족을 배반한 결과물이었다. 

해방 후 김태석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신변의 위협 속에 살았고 친일행위자 처벌을 위해 만들어진 반미 특위가 활동한 이후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 체포됐다. 그는 반민특위 재판에서 죄를 인정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시대적 상황 등을 거론하는 궤변과 자기 합리화로 자신을 변호했다. 극악의 범죄자들이 죄의식 없이 범죄를 합리화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그의 태도에 당시 재판정에 모인 대중들은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 받았지만, 선고 시 무기징역과 함께 벌금형으로 감형되어 수감됐다.

하지만, 1950년 6.25 한국전쟁 직전 가석방되었고 이후 행적을 알 수 없었다. 전쟁의 혼란기 속에 누군가에 살해를 당했거나 인민군에 잡혀 처형됐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건 없다. 순탄하게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반민족 행위에 대한 제대로 된 단죄를 받지 않은 건 분명하다. 

 

2세대 친일경찰, 고문 기술자 노덕술



이런 김태석이 1세대 친일 경찰이었다면 더 악명 높았던 2세대 친일 경찰의 대명사는 노덕술이었다. 고문 기술자로 알려진 그는 일제 치하에서 경찰로 승승장구하며 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출세의 수단으로 경찰을 택했다. 그는 일본인들보다 더 악랄하게 조선인들을 탄압하고 일제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했다. 

특히, 노덕술이 유명해진 건 그가 독립운동가들에게 행한 고문 때문이었다. 구타는 물론이고 물고문은 기본이었고 상상하기 힘든 고문 기술을 개발해 활용했다. 고의 고문 기술은 일본에서도 인정받았을 정도였다. 그의 고문으로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 그 반대급부로 노덕술은 일제 경찰에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그는 더 일제에 충성을 다했다.

그의 고향인 경남 지역에서 경찰로 일하던 그는 1929년 광주지역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탄압과 와해에 큰 공을 세웠고 항일 운동 저지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평안도 지역의 경찰 과장으로 영전했다. 평안도 지역은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잠입 시 거쳐가는 지역으로 일제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노덕술은 그곳에서도 독립운동의 탄압에 큰 역할을 했다. 아울러 그는 중일 전쟁 이후 전쟁 물자 수송 등의 일에 스스로 앞장서 만주를 오가는 등 전쟁 공헌 활동도 지속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그를 경찰 최고위직에 오르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뇌물 수수 등으로 막대한 부도 축적했다. 가난한 유년 시절을 이겨내고 이룬 성공 스토리였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불의를 위해 발휘했다. 그의 성공에는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을 지지하고 함께 한 우리 민족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에게는 일제 강점기가 영원히 이어질 거라는 믿음을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국은 광복의 기쁨을 맞이했다. 여느 친일파와 같이 노덕술 역시 신변의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악행이 절정을 이뤘고 평안도 지역은 소련군이 점령군으로 진입했다. 일제 경찰의 요직에 있었던 그는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기도 했다. 북한 지역에서 그가 발붙일 곳은 없었다. 그는 월남을 감행했다. 

남한은 그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미 군정을 포함해 이후 들어선 정부까지 친일 경찰들은 경찰직에서 중용됐다. 노덕술 역시 경찰 경력을 인정받아 수사과장이라는 요직에 올랐다. 그 자리에서 노덕술은 고문 기술 등을 활용해 뛰어난 수사능력을 보였고 입지를 단단히 했다. 남한의 자유 민주주의 북한의 공산주의로 이념 대립이 극심해지는 시대적 배경 속에 노덕술은 친일 경찰에서 반공 투사로 변신했다. 미 군정 이후 들어선 이승만 정부에서 노덕술은 경찰의 주요 인사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은 총애했다. 최고 권력층을 배경으로 노덕술은 친일의 그림자를 지우고 권력의 최 상층부에 자리했다. 노덕술이 의열단의 수장이자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연행해 모욕을 준 일화는 해방 후 왜곡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김원봉은 좌익 계열의 인사였지만, 임시정부 합류 이후 큰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는 좌. 우 합작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지만, 중국 공산당과 대치되는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했다.

 

국외 항일 독립운동가들



그 임시정부의 요직이 있었던 김원봉이었지만, 해방 후 돌아온 서울에서 김원봉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며 남한에서 그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고 우익 단체로부터 지속적인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고 가장 많은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려 했던 김원봉은 일제의 집요한 추격에도 체포되지 않았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월북을 택해야 했다. 노덕술과의 악연은 그의 월북에 큰 영향을 줬다. 김원봉은 김일성 정권에서 요직을 역임한 이후 숙청되는 비운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이력을 빛나는 항일 운동 성과에도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에 대한 서훈과 국가유공자 지정을 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만약, 그가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고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해방 후 승승장구하던 노덕술은 앞서 언급한 김태석과 마찬가지로 반민특위가 구성된 이후 위기를 맞이했다. 대표적인 친일 경찰이자 고문 기술자였던 그의 악행은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경찰 내부에서도 노덕술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이들이 늘었다. 노덕술의 저지른 고문치사 사건과 그가 주도한 반민특위 의원들에 대한 암살 음모 사건이 전모가 드러나며 노덕술은 그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비호했고 석방을 종용하기도 했다. 친일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는 경찰도 조직적으로 노덕술을 보호했다. 노덕술은 많은 증거와 증인들이 있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이유로 반민특위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출소하며 자유의 몸이 됐다. 노덕술은 재판 과정에서 자기 합리화는 물론이고 이해할 수 없는 자기 확신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는 반민족 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노덕술은 시대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했다는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형적인 비겁한 변명이고 그의 죄가 사라지는 일도 아니었다. 노덕술로 인해 고통받았던 이들에 대한 일만의 죄책감도 그는 없었다.  노덕술을 단죄하지 못한 건 반민특위의 한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반민특위는 제헌헌법을 제정하던 당시 만들어진 특별법으로 구성되었지만, 출범 초기부터 어려운 여정을 지속했다. 해방 후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친일 세력들이 방해가 극심했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반민특위에 비판적이었다. 반민특위는 독자적으로 본분을 다하려 했지만, 행정부의 비협조와 친일 경찰들의 조직적이 방해와 폭력,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민특위를 지지하던 정치세력들이 몰락하면서 힘을 잃었다. 결국, 반민특위는 친일청산과 친일파 숙청이라는 국민적 여망을 이루지 못하고 1년여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는 친일청산의 소중한 기회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이렇게 위기를 넘긴 노덕술은 경찰을 나와 군인으로 변신했고 헌병대장으로 영전하며 권력층과 근거리에서 위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노덕술은 뇌물 혐의로 불명에 제대했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뇌물죄도 있었지만,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당시에  권력 암투에서 밀린 결과이기도 했다. 권력에서 멀어진 그는 그동안의 악행에 따른 보복 등을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그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60년 4.19 혁명 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때였다. 그는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또 한 번 권력욕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을  반공 투사로 선전하며 선거전에 나섰지만, 8명의 후보 중 6위에 머물렀다. 세상은 변했고 그는 국민들의 자신에 대한 냉소만을 확인했다. 

이후 그는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다 적발되어 법적 처벌을 받기도 했다. 친일 경찰의 면모를 노년에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노덕술은 그의 친일 행각에 대한 처벌은 전혀 받지 않았고 김태석과 마찬가지로 사죄와 반성도 없었다. 노덕술은 편안한 노후를 보내다 1968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에 의해 고통받고 세상을 떠난 이들의 원통함을 뒤로하고 노덕술은 천수를 다하는 호사를 누렸다. 심지어 국가 유공자로 대한민국 정부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노덕술을 포함한 일제 경찰들의 고문 기술은 해방 후 경찰에 전수되어 독재권력에 항거하는 민주화 인사들과 학생들에 대한 고문으로 이어졌다. 고문 기술자 노덕술의 유산은 이근안 등의 또 다른 고문 기술자로 이어지며 현대사의 그림자로 남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이근안이 주로 근무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 사진

 


김태석과 노덕술은 그 이름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들 외에 일제에 부역한 수많은 친일 경찰들이 있었다. 이들은 해방 후 상당수가 은거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재 등용되어 경찰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정의를 구현해야 할 경찰을 불의에 타협하고 불의를 위해 온 힘을 다한 정의롭지 못한 이들이 주인이 되는 아이러니가 계속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고 반공이라는 방패막 뒤에 숨어 그들의 부와 명예를 유지하고 자손에게 이어갈 수 있었다. 경찰뿐만 아니라 일본 육사출신들이 요직을 점했던 군과 사회 각 분야의 친일파들도 다르지 않았다. 반공은 해방 후 공산주의 북한과 대척점에 있는 남한에서 중요한 이념이었고 기습남침을 감행하는 등 무력 도발을 지속하는 북한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사상적 기반이기 했다. 문제는 그 반공의 기반에 친일파 세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이 애국을 외치고 나라를 지키는 반공투사가 되는 역사의 역설이 수십년간 이어졌다. 친일파들은 독재권력에 영합해 기득권을 유지했다. 

정작 반공을 앞세운 독재 정권들은 북한에 대한 유화책을 펼치며 남북대화에 나서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반공의 이념은 독재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좌익 용공으로 모는 등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독재 정권은 반공을 무기로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했고 인권을 경시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언론은 이런 정권을 감시하지 못했고 경찰을 비롯한 검찰, 사법부도 이에 동조하며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었다.

정의롭지 못한 이들이 주장하는 정의는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정의의 바탕 위에 공권력은 더 권위를 세울 수 있지만, 해방 후 우리 사회는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다. 공권력의  바탕이 되는 경찰도 다르지 않았다. 대표적 친일 경찰인 김태석과 노덕술의 삶이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친일 청산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친일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고 그때 쌓은 친일파들의 부와 명예는 세습되었다. 그들 상당수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도층으로 자리하고 있다. 반대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과 그 자손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삶은 사는 이들이 다수다. 결코 나와서는 안되는 불평등이다. 

그들에 대한 청산과 숙청은 어렵지만, 대신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역사를 통해 그들을 기억하고 그 역사를 계속 전달해 주는 일이다. 이를 통해 그들의 친일 행적이 민족을 배반한 부끄러운 일임을 기록으로 남기고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 점에서 김태석, 노덕술의 악행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역사라 할 수 있다.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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