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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은 호반의 도시로 불린다. 한강 수계의 댐들이 곳곳에 자리하며 인공 호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물은 춘천과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다. 이 댐들은 멋진 풍경을 만들어주었고 경춘 국도와 경춘선 열차가 있어 춘천은 관광 도시로 예전부터 많은 이들이 찾았다. 특히, 춘천 일대는 주머니 사정이 풍족하지 않았던 대학생들이 완행열차를 타고 함께 MT를 가는 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이런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많았던 탓인지 춘천에는 낭만의 도시라는 또 다른 칭호가 붙기도 했다. 춘천행 기차는 그 낭만을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현재 춘천은 강원도청 소재지로 기존의 관광의 도시를 벗어나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의 각종 문화행사가 매년 열리는 문화의 도시로도 그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최근 고속도로가 생기고 경춘선 철도가 전철화되면서 수도권에서의 접근성이 한층 좋아진 탓에 특색 있는 여행지가 되면서 방문자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수도권과의 거리가 줄어들면서 기존의 농업과 함께 상. 공업이 함께 발전하는 도시로 변화하는 중이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39회에서는 가을 느낌으로 채워지고 있는 이 춘천을 찾았다. 춘천의 명소 중 한 곳이 의암호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멋진 산세와 의암호의 풍경이 어우러진 경치와 함께 이를 조망할 수 있는 스카이워크를 걸었다. 마치 물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풍경을 뒤로하고 어느 농촌 마을에 들렀다. 마을 길을 걷다 어딘가로 분주히 걸어가는 마을 할머니들과 만났다. 이들은 미용실에 가는 길이라 했다. 외딴 마을에 미용실이라 하니 궁금증이 생겼다. 그들을 따라갔다. 하지만 미용실 간판은 보이지 않았고 가정집이 눈에 들어왔다. 미용실이라고는 쉽게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곳에서 한창 작업에 열중인 마을 주민을 만났다. 그는 각종 고철과 폐자재 등으로 독특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정크아트의 아티스트인 이 주민은 도시에서 함께 이곳으로 귀촌을 했다고 했다. 

 



이주 초기 이들은 복잡한 도시 생활을 벗어나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의 낭만을 꿈꾸며 정원에서 삶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극심한 외로움과 단절감에 시달려야 했다. 도시에서 익숙했던 생활패턴을 바꾸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을 보듬어주고 소통해 준 마을 주민들이 있어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을 주민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무료함을 덜어주고 위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아티스트로 자리했고 아내는 자신의 미용기술을 살려 미용실을 열었다. 가정집 한편을 개조한 미용실이지만, 시설은 도시의 미용실 못지않았다. 미용실을 가기 위해 읍내로 먼 거리를 이용해야 했던 마을 주민들에게 미용실은 너무 소중한 공간이었다. 지금은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소통의 장소가 됐다. 이렇게 자신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부부는 삶의 활력을 되찾았고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춘천의 또 다른 인공 호수 춘천댐으로 향했다. 춘천댐의 풍경을 따라가다 매운탕 식당들이 모여있는 거리로 들어섰다. 그중 한 매운탕 식당을 찾았다. 이곳에서 잡은 쏘가리를 재료로 하는 매운탕이 주메뉴였다. 이 식당은 3대를 넘어 이어지는 식당이었다. 과거 춘천댐 공사를 하던 시기 현장 식당으로 시작해 가업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는 집안의 맛을 전수받은 어머니와 그 며느리가 식당을 운영 중이었다. 불편할 수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지만,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모녀 이상의 조화로 이 식당만의 맛을 지켜가는 중이었다. 

춘천댐을 지나 강촌의 한마을로 여정이 이어졌다. 그 마을 길을 걷다가 도자기 공방을 만났다. 어느 예술가의 공방인가 했지만,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하는 곳이었다. 마을의 어머니들이 주축이 된 마을 공방에서 주민들은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데 열중이었다. 경력이 쌓이면서 주민들의 작품은 단순한 습작 수준을 넘어서있었다. 이곳은 주민들의 상호 소통하고 문화생활을 하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 공방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마을 곳곳을 꾸며주는 소품들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이에 이 마을은 어디를 가던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춘천의 원도심으로 향했다. 춘천 역시 곳곳에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원도심은 과거 향수 가득한 모습들이 남아있었다. 골목길을 걷다가 골목 곳곳을 사진으로 담는 사진 동아리 회원들을 만났다. 노년의 사진가들로 구성된 이 동아리는 점점 사라져가는 춘천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했다. 점점 개발의 바람에 사라질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 기억하고 싶은 것이 이들의 소망이었다. 많은 시간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걸어야 하지만, 이들은 함께 서로를 격려하고 과거를 추억하면서 마을 곳곳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이들의 노력은 춘천의 역사를 전해주는 일로 가치가 있었다. 

춘천 서면의 한 마을로 여정은 이어졌다. 이 마을은 박사마을로 불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 마을은 외진 곳아 자리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박사 학위자를 배출했다. 그만큼 이 마을의 교육열은 예로부터 뜨거웠다. 마을 입구에 새겨진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숫자는 184명에 이르렀다. 지금은 다리로 도심과 연결돼 되지만, 과거 이 마을은 나룻배를 몇 번을 타고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 열악한 조건에서도 마을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배움을 위해 강한 열정을 보였고 박사마을이라는 이곳만의 전통을 만들었다. 마을 곳곳에서 만나는 이들 상당수는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이런 박사마을과 어울리는 장소가 인근에 있었다. 대나무를 말리는 현장이 보여 작업을 하는 이들과 대화를 하니 인근 붓 공방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을 따라 공방을 찾았다. 공방에는 다양한 모양과 소재의 붓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공방의 장인은 작업에 한창이었다. 특히, 염소털이 보편적인 붓과 달리 닭털로 만든 붓이 인상적이었다. 닭털 붓은 더 개성 있는 필체를 구사할 수 있지만, 만들기가 훨씬 더 어렵다. 장인의 손길에서 닭털 붓은 그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장인은 전통 붓의 맥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붓은 세심한 손길과 정성이 필요한 일로 작업이 고되고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두 아들이 그의 기술을 이어가기 위해 함께 하고 있어 외롭지 않아 보였다. 박사마을답게 큰 아들은 박사학위, 작은 아들은 석사학위 소지자였다. 아들들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와 관련한 공부를 했다. 이들인 아버지의 기술을 배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삼부자다 함께 하며 전통의 붓의 역사도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어느 농촌 마을 길을 걸었다.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들판을 지나 어느 포도밭이 보였다. 그 포도밭에서는 한 부부가 작업이 한창이었다. 잘 정돈되고 관리된 포도밭의 포도가 탐스러워 보였다. 이 포도밭은 친환경 유기농 재배를 하고 있었다. 이 포도밭은 농장주는 과거 자신이 몸소 농약에 대한 폐해를 경험하고 친환경 재배를 시작했다. 초기 낮은 생산성 때문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많은 포도가 벌레 먹고 상할 수밖에 없었다. 수익이 크게 줄면서 농장 경영에도 어려움이 커졌다. 이 때문에 부부간의 갈등도 커졌다. 

하지만 부인이 친환경 농업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이제는 부부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모두 친환경 유기농 재배를 위해 함께 했다. 그 결과 이 농장은 친환경 유기농 재배의 원칙을 지킬 수 있었다. 지금은 자리를 잡아 많은 수확도 가능하고 포도주 등 가공품도 만들고 있었다. 이 부부의 고집과 노력의 결과였다. 이 고집이 계속 이어지길 응원했다. 

 

경춘선 ITX 열차 - 픽사베이



여정의 막바지 이제는 전철이 지나는 경춘선 철도 주변 길을 찾았다. 전철 길면에 형성된 시장길을 걷다가 오래된 식당에 들렀다. 메밀전을 파는 이 식당은 올해 88살이 된 할머니와 아들 내외가 함께 운영 중이었다. 할머니는 고령에도 하루고 쉬지 않고 식당을 한다고 했다. 과거 힘들었던 시절 5남매를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던 일상을 지켜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40대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5남매가 있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메밀전 식당을 하게 됐다. 식당을 하면 최소한 자식들을 굶기지는 않겠다는 작은 소망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 일은 이제는 그의 삶과 함께 하는 일이 됐다. 이 식당은 가정을 지켜준 소중한 공간이었다. 

할머니의 삶은 과거 우리 어머니들의 삶과 너무 닮아있다. 과거 우리 어머니들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살았다. 자신의 이름이 없는 그림자 같은 삶이었다. 그 누구보다 가정을 위해 헌신했지만, 빛나는 못하는 존재들이 우리 어머니였다. 할머니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식당에서 할머니는 그 누구의 아내,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할머니가 인생의 황혼기에도 식당 일을 놓지 않고 하루도 쉬지 않고 하는 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할머니의 삶을 보여주는 거친 손을 보니 마음 한 편이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의 할머니는 외로웠지만, 지금 할머니 곁에 아들과 며느리가 있다. 과거에는 할머니가 자식들의 삶은 지탱해 주었지만, 지금은 아들과 며느리가 할머니의 일상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이제는 할머니의 일상이 보다 행복하고 여유롭기를 기원해 본다. 

이렇게 춘천에서 만난 이웃들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이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많은 돈을 벌고 명성을 쌓는 건 아니었지만, 춘천에서 만난 이웃들은 밝고 긍정적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진짜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게 해 준 춘천에서의 여정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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