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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일어난 영국과 중국의 전쟁인 아편전쟁은 전쟁의 이름에서 보듯 보통의 전쟁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마약이라 할 수 있는 아편이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은 세계사에서 범위를 좁히면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이 전쟁에서 영구에 패한 청나라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긴 세월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이 무너지는 계기가 됐다. 중국에 승리한 영국은 제국주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들과 심지어 일본의 침탈을 받으며 그들의 이권 대결장으로 전락했다.

중국은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관 속에 포함됐고 동서양의 균형을 무너졌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열렸고 그 서구 중심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우월하고 그들의 시스템이 세계의 표준이 됐다.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편전쟁이 결과가 가져온 일이었다. 이 점에서 아편전쟁은 깊이 연구되고 살펴야 할 역사라 할 수 있다. 역사 예능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30회에서는 이 아편전쟁의 흐름과 그 의미를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아편전쟁의 원인은 이름 그대로 아편, 즉 마약에 있었다. 전쟁 발발 당시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아편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반대로 청나라는 마약으로 인한 폐해가 극심했고 아편 무역을 통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의 충돌이 발생했고 이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사회악이라 할 수 있는 아편 무역을 통제한 게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특히, 아편의 수출국이 영국이었다는 점도 충격적인 부분이다. 이에 세계사에게 아편 전쟁을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부르는 이유일 수도 있다. 

 

아편전쟁 해전 그림 - 위키백과

 

전쟁의 더 큰 문제는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무역의 불균형이었다. 중국차는 영국의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서구 열강들은 중요한 무역 거래처라 할 수 있는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바닷길을 열었고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다.

그들의 무역 범위는 동아시아 전역과 일본으로 확대됐다. 무역이 활발해질수록 영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은 가장 큰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더 활성화하려 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중국 남부의 광저우 항만을 무역항으로 지정하고 서양과의 무역에 있어 청나라 상인을 한정하는 공행 제도를 통해 이들만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영국의 상인들은 중국 대륙에서 직접적인 무역을 할 수 없었다. 광저우 체제로 불리는 중국의 폐쇄적인 보호무역 정책은 자유무역 주의를 주창하는 영국에는 큰 불만 사항이었다.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 있어 교환 수단으로 은을 사용했다. 영국의 제품들이 중국에서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중국의 제품들은 영국을 포함한 유력 상류층의 큰 인기를 얻었다. 차와 도자기 비단 등은 청나라의 대표적 수출품이었고 고가였다. 특히, 차는 초기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품이나 기호품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 계층이 애용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 계급들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영국 국민들에게 중국차는 그들만의 차 문화를 만들었고 당연히 차에 대한 수요는 급격히 늘었고 수입 물량도 늘어났다. 

이에 영국의 막대한 은이 무역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영국은 그 은을 가져올 수출품이 없었다. 영국의 수출품은 청나라 일부 귀족들에 수요가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수요층을 형성하지 못했다. 자급자족의 경제 구조를 가진 중국에서 서양의 제품들은 큰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한정적인 무역 환경도 청나라 시장에 대한 영국의 무역을 어렵게 했다. 영국은 수차례 사절단을 보내 무역 확대를 위한 접촉을 했지만, 문화적 차이만을 확인한 채 진전이 없었다. 청나라는 영국과 서구 세력에 대한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과거 중화사상에 근거해 중국 외 세력은 일종의 오랑캐로 보는 시각 속에 유럽이 있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의 차이는 협상과 합의를 애초부터 어렵게 했다. 이에 기울어진 무역 환경은 영국에 큰 고민이 됐다. 막대한 국부가 청나라로 유출됐다. 

영국으로서는 이런 무역 역조 현상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의 시각이라면 청나라 시장에 맞는 제품을 만들거나 차 수입을 줄이고 그 대체품을 찾는 등의 노력을 하겠지만, 영국은 상상치 못한 방법을 찾았다. 영국은 일종의 블루오션 상품으로 아편 즉 마약에 주목했다. 당시 아편은 의약품으로 사용됐다. 이후 그 수요층이 늘어났고 점점 상류층의 기호품으로 자리했다.

영국은 이 아편의 청나라 무역 수지 개선에 활용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점령한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근거지로 했지만, 점차 식민지화된 인도에서 대단위 농장에서 양귀비를 재배하고 대형 아편 생산체제를 구축해  이를 제조하여 청나라에 판매했다. 영국은 인도를 활용한 아편의 삼각 무역을 통해 차 수입으로 인한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했다. 그 중심에는 식민지 경영을 이끌었던 동인도 회사가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청나라에 대한 아편 무역을 주도했다. 동인도 회사는 사기업이었지만, 실상은 영국 정부의 비호를 받는 식민지 경영의 주체했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식민지 확장에 따른 자금난에 시달렸고 수익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청나라 아편 무역은 중요한 돌파구였다. 마약 거래였던 만큼 아편 무역은 대부분 밀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영국 역시 이 거래가 결코 정당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탐욕에 근거한 영국의 아편 무역은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지만, 영국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약을 거래한다는 점은 분명 부도덕하고 잘못된 일이었지만, 막대한 수익 앞에서 그런 부분은 무시됐다.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 꽃과 열매 - 픽사베이

 


그 결과 영국의 청나라에 대한 무역 수지는 크게 개선됐다. 영국은 막대한 부를 창출했지만, 이는 청나라에는 큰 비극이었다. 아편이 성행하면서 청나라 국민들의 생활을 극도로 피폐해졌다. 마약에 중독된 이들이 늘어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됐다. 마약중독자는 사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갔고 마약 거래 과정에서 이를 비호하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청나라 정부는 마약 근절을 위한 노력을 했지만, 상당수 고위층과 관료 사회에는 아편이 만연했다. 청나라로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 시점에 등장한 인물이 임칙서다. 그는 청나라에게 보기 드물게 편협한 세계관을 버리고 서양 문물의 수용과 근대화를 주장한 열린 인물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애초 아편의 부분 허용과 통제를 병행하려 했지만, 임칙서는 아편의 폐해 근절을 강력히 주장했다. 임칙서는 국가 차원의 아편 중독자  치료와 함께 아편 무역의 강력한 통제와 단속을 함께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청나라 황제의 지지를 얻었고 임칙서는 중국의 무역항인 광저우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임칙서는 부임 직후 아편 무역 근절을 위한 조치는 강력히 추지했다. 청나라 관료조직을 강하게 단속하고 상인들의 아편 거래를 엄히 처벌했다. 이후 영국을 포함한 서양 상인들의 아편 거래를 통제했다. 이에 앞서 임칙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편 무역을 주도하는 영국의 행태 개선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통해 아편 무역의 문제를 대. 내외적으로 공론화하고 단속과 처벌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임칙서의 강공 드라이브는 성공적이었다. 임칙서는 아편 상인들을 처벌했고 영국 상인들도 예외가 없었다. 다수의 아편을 압수해 바다에 폐기했고 무역 거래를 하는 상인들에게 아편 거래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처벌을 받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영국 상인들은 이에 강력한 반발했다. 그들은 사유재산권 침해와 함께 일정의 치외법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조치는 정당했고 국제적인 지지도 있었다. 영국정부도 자국 상인들을 대놓고 지지하지 어려웠다. 

이 시점에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상인인들과 청나라 상인의 출동 과정에는 청나라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청나라는 사건의 범인인 영국인의 인도를 요구했다. 영국 상인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자국 법에 의한 사법처리를 주장했다. 이에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의 청나라 진입을 막는 등 사실상 무역을 중단했다. 이는 무력 충돌을 불러왔고 정부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자국민 보호와 이익 수호라는 명분으로 청나라와의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당시 여당은 국익의 관점에서 전쟁을 주장했고 야당은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한 전쟁을 반대했다. 표결 끝에 영국 의회는 전쟁을 승인했다. 아편전쟁의 시작이었다. 영국의 원정군은 청나라로 향했다. 1840년 6월 영국과 청나라는 중국 광저우를 시작으로 대결했다. 동. 서양 패권국의 대결이었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영국의 앞선 무기체계와 전술 앞에 대응하지 못했다. 대포의 사거리는 비교가 될 수 없었고 개인화기 역시 큰 차이가 있었다. 여러 전쟁에서 전토 경험을 쌓은 영국군은 매우 숙련된 병사들이었다. 이에 비해 만연된 부정부패 속에 구성된 청나라 군은 오합지졸이었다. 영국군은 무역항인 광저우를 해상 봉쇄한 이후 해안선을 따라 북상해 청나라 수도 북경에 인접한 톈진항을 공격했다. 위협을 느낀 청나라 정부는 영구의 협상 요구를 받아들였다. 영국은 우선 영국에 강경하게 대응한 임칙서의 파면을 요구했다. 청나라 정부는 이에 응했다. 영국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던 임칙서는 광저우에서 소환되어 원지로 떠났다. 하지만 이런 조치에도 영국은 무리한 요구를 거듭했고 청나라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전쟁은 영국의 일방적 우세였다. 영국군의 압도적 화력 앞에 청나라 군은 무기력했다. 특히, 당시로는 최첨단 병기라 할 수 있는 철갑 증기기관 함선이 등장은 전투의 양상을 영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했다. 청나라의 목선은 영국 함선에 상대가 될 수 없었고 다수의 배가 포격에 침몰하는 해전에서 청나라는 크게 참패했다. 육지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적 우위에도 청나라 군은 영국군에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중요 거점을 점령당했다. 청나라 경제의 중요한 축인 대운하 요충지마저 영국군이 점령하자 청나라는 더 버틸 수 없었다. 

영국의 힘에 굴복한 청나라는 영국의 주장을 대폭 수용한 조약을 해야 했다. 1842년 8월 29일 그렇게 난징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홍콩을 영국에 넘겨야 했고 영국은 중국 영토 내에 자국 영토를 가지게 됐다. 이에 더해 청나라 내 독점 무역 상인 제도인 공행 제도가 철폐되어 영국 상인들의 중국 진출이 용이해졌다. 또한, 청나라는 광저우 외에 상하이 등 4개  항구를 무역항으로 추가 개방해야 했다.

그 개항장에는 영국인 거주와 영사관 설치가 가능토록 했다. 영국과 청나라 관리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고 해 사실상의 개항장의 영국인 거주지는 조계지로서 치외법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영국은 추가 협상을 통해 치외법권과 최혜국대우 관세협정권을 더 추가했다. 

또한, 청나라는 막대한 전쟁 보상금과 함께 페기한 아편에 대한 보상금도 지불하게 됐다. 완전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을 시작으로 청나라는 다른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며 자주권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이로써 청나라는 그들의 원치 않았지만, 조공을 받을 대상 또는 오랑캐로 여겼던  서구 열강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됐고 문호를 대폭 개방해야 했다.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 또한 그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청나라를 잠든 사자로 보며 경계했던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의 실상이 병든 돼지임을 인지하고 본격적인 침탈에 나섰다. 

 

아편전쟁 육상전투 그림 - 위키백과

 


청나라의 상실감과는 별개로 영국은 난징조약만으로 그들의 목표를 다 이룰 수 없었다. 청나라의 무역 개방이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역 목표한 이익이 나오지 않았다. 청나라 국민들의 영국 등 서양 제품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많지 않았고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국민들의 서구 열강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심지어 아편마저 중국에서 자체 재배 생산이 되면서 아편 무역도 위축됐다. 한 마디로 장사할 환경이 더 나빠졌다. 영국은 청나라의 더 큰 개방과 이권 확보를 위한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다. 

영국은 이미 한차례 성공한 힘에 의한 압박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그들 혼자만이 아니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했다. 영국은 그들 국적의 선박 애로호가 해적 혐의를 받고 선원들이 구금 등 처벌을 받자 이에 항의했다. 애로호 사건으로 명령된 이 사건은 영국에는 또 다른 전쟁의 중요한 빌미가 됐다. 실상은 이전 난징조약의 개정을 통한 더 많은 이권 확보를 위한 침략이었다. 청나라의 허약함을 확인한 다른 열강들도 침략에 동참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앞장섰고 미국과 러시아가 이권을 위해 숟가락을 얹었다. 청나라는 영국 한 나라도 벅찬 상황에도 4개의 강대국과 맞서야 했다.

처음에는 협상을 통해 그들의 이권을 얻으려 했지만, 청나라는 이에 응할 수 없었다. 결국, 1856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청나라 남부 중요 무역항인 광저우에 상륙했다. 제2차 아편전쟁의 시작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의 행태는 매우 폭력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그들은 광저우 시내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광저우 지역을 장악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북상하여 베이징의 관문인 톈진마저 장악했다. 이에 청나라는 버티지 못했고 협상에 응했다. 마침 청나라 남부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데도 상당한 군사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1858년 톈진조약이 체결됐다. 

청나라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포함된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중국 무역항 10개 개방, 외국인이 중국 내 여행과 무역 자유 보장, 외국 상선의 자유로운 장강 유역 진출, 아편 무역의 합법화, 베이징에 외국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외교관들의 상주 허용, 기독교 공인, 막대한 보상금의 지급이었다. 이전의 난징 조약을 넘어서는 개방과 함께 중국 시장을 서구 열강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마당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사실상 청나라가 반 식민지 상태로 빠져드는 일이었다. 

이는 청나라 내부에서 큰 반발을 불러왔다. 조약이 비준이 진행되지 않았다. 청나라의 반발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다시 무력도발을 감행했고 국지전에서 청나라 군이 승리하면서 청나라 강경파의 입지가 더 강해졌다. 하지만 전쟁 흐름이 변한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인 한층 더 강해진 군사력으로 전쟁에 임했고 베이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청나라에게는 더 굴욕적인 협상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중재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됐다. 기존 톈진 조약의 빠른 이행과 함께 10개 무역항 외에 수도 베이징의 관문이 톈진항도 개방됐다. 기독교의 포교 자유가 허용됐고 몰수됐던 기존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자산도 반환됐다. 베이징에서 서구 열강의 외교사절이 상시 거주하게 됐다. 기존 홍콩에 더해 홍콩과 인접한 주룽반도도 영국에 넘겨져 영국령이 포함됐다.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러시아는 연해주 지역을 넘겨받아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됐다. 청나라 정부가 배상해야 할 금액도 더 늘었다. 청나라 정부가 금지하던 자국 국민들의 이민도 허용됐다.  

이로써 중국 대륙은 서구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청나라는 빈 껍데기만 남았고 황제의 권한은 사실상 사라졌다. 혼란기 속에 세력을 키운 군벌들이 지방을 장악하고 중앙의 통제는 무의미해졌다. 중앙 정치도 권력자들이 장악했다. 이런 상황에도 청나라는 자체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국가 시스템의 근본적 문제를 개선하고 봉건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는 개혁이 필요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청나라 정부 주도로 일어난 양무운동은 기존 체제 유지에 근거한 군사력 강화를 위한 근대화 운동으로 한계가 있었다. 

이후 청나라는 정부에 대한 국민적인 반감이 커지고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구질서의 붕괴를 위한 국민적 열망이 점점 커져갔다. 청나라 정부는 외부로서는 서구 열강의 지속적인 이권 강탈과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고 외부의 적과 맞설 수 있는 내부 역량도 키우지 못했다. 그 근본이 될 수 있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긴 세월 유지됐던 중국 봉건제 질서는 해체됐고 구질서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도 멸망의 길을 걸었다. 청나라는 역사의 흐름을 반전시키지 못했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무너졌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 건국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차 아편 전쟁 후 7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아편전쟁의 여파는 중국 봉건제 붕괴를 이끌었다. 

이는 아편전쟁을 세계사의 주요 사건으로 보는 이유다. 동서양의 힘의 균형이 완전히 서양으로 기울었고 청나라 몰락 이후 아시아는 서구 열강, 그들의 뒤를 따르는 일본의 이권 쟁탈전의 장소가 됐다.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대항해 시대 이후 시작된 제국주의는 최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편전쟁의 주 장소였던 중국 광저우의 야경

 


아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이 되고 수탈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서구 열강에 의해 개항을 한 일본은 서구의 산업화 시스템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산업국가로 발전했다. 서구 열강들이 중국의 이권에 집중한 탓에 일본은 그들의 이권 침탈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자체적으로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일본은 그 힘을 서구 열강들처럼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 됐다. 서구 열강들처럼 일본은 이권을 위해 아시아 국가를 침략했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맞이했고 중국 역시 일본이 일으킨 중일 전쟁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아편전쟁의 효과는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본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마저 바꿔놓았다. 이렇게 아편전쟁은 큰 의미가 있었지만, 당시 중국은 아편전쟁을 통해 교훈을 얻지 못했다. 역사의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지만, 중국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앞서 서술한 대로 참혹했다.

이는 중국 역사의 큰 치욕이고 아픔이었다. 그 아픔은 이후 일본의 침략과 중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산업화나 근대화에서 뒤처지고 말았다. 그때 중국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기민하게 대처했다면 세계사는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아마도 중국은 강대국의 위치를 계속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공산주의 중국의 탄생도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상상이다.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계질서 속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때도 그렇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일제 강점기를 통해 아픈 경험을 했다. 중국은 아편 전쟁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하고 교육에도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들에게 아편전쟁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약과 관련한 범죄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강경하게 대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이에 아편 전쟁은 우리 역시 잊지 말고 살펴야 할 세계사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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