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가 조선의 막후 실력자가 된 신덕왕후 강씨는 강. 온 양면 책을 활용하며 위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의 소생인 장성한 다섯 아들의 존재는 큰 위협이었다. 이성계도 신덕왕후 강씨에게 힘을 실어줬다.
세자 책봉에서부터 신덕왕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던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 사이에 낳은 다섯 아들을 권력에서 멀어지게 했다. 즉위식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아들들과의 만남을 거부했고 조선 건국 공신에도 아들들을 제외했다. 이성계는 아들들을 아버지와 자식이 아닌 왕과 신하의 관계로 설정했다. 신하와의 관계도 정적과도 같이 대했다. 나이 어린 세자에게 아들들은 부담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특히,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장원급제자로 문신의 길을 걸었던 이방원에 대한 견제는 한층 더 강해졌다. 이방원은 대신들 사이에서 왕의 자질을 갖춘 왕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조선 건국 과정에서 막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이성계와의 사이가 멀어지게 한 정몽주에 대한 격살도 새 왕조 건국을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었고 이방원이 그 일을 앞장섰을 뿐이었다. 이성계는 그 일로 이방원에 크게 분노했지만, 그로 인해 더 빨리 용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의 큰 공신이었다.
하지만 새 왕조가 건국된 이후 이방원은 경계 대상이 됐다.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이후 세자에 위협에 되는 이는 이성계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성계의 모습에 이방원은 분노와 원망, 그리고 체념이 뒤섞여 아버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은 이성계와 부자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이성계는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신덕왕후 강씨의 이방원에 대한 견제도 노골화됐다.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자들 상당수가 겪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방원의 울분은 커졌지만, 이를 대놓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이는 그를 제거하려는 신덕왕후 강씨에게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방원의 배우자 훗날 원경왕후가 되는 민씨는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민씨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이방원의 성급한 행동을 경계하게 했다. 민씨는 정국의 상황을 잘 읽고 있었다. 신덕왕후 강씨의 힘이 막강한 상황에서 이에 대항하려 한다면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이는 이방원 부부는 물론이고 민씨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방원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친 비바람을 엎드려 피해야 했다.
이 시점에 이성계는 유화책을 내놓았다. 왕자들을 소외시키는데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왕자들을 계속 외면할 수 없었다. 이성계는 다섯 왕자들에게 군권을 나눠 담당하게 하고 관직을 내렸다. 신생 왕조에서 중요한 군권을 왕족들이 관리하면서 혹시 모를 상황에 빠르게 대응하게 하는 한편 군권을 나눠 부담하게 하면서 힘을 쏠림을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아들들과 아버지 간 부자간의 관계 회복에는 여전히 냉정했다.
이방원은 정치적 복권 외에 멀어진 가족관계 회복을 기대했지만, 여전히 냉랭한 아버지의 모습에 큰 실망감을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를 기대할 수 있는 변화였다.
이런 변화에는 신덕왕후 강씨의 다른 노림수가 있었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특별히 친위부대라 할 수 있는 가별초 부대를 별로도 하사했다. 이방원에게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무력을 손에 쥐여준 셈이었다. 이성계는 조선 건국에 이방원의 공이 가장 컸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는 함정이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이방원에게 일부러 힘을 주고 그가 그 힘을 사용하도록 부추겼다. 신덕왕후 강씨는 이방원에게 장남이 이방우의 행방을 알렸다. 이방우는 조선 건국 과정에 반대하고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에는 수도 개경을 떠나있었다. 이 때문에 이방우는 세자 책봉 과정에서 적장자라는 신분에도 멀어지고 말았다. 그의 선택으로 보였다.
이방원이 만난 이방우는 폐인이나 다름없었고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방원은 이방우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이방우가 개경으로 돌아오지 않은 건 그의 뜻도 있었지만, 신덕왕후 강씨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방우는 신덕왕후 강씨의 협박 반 권유 반의 의견을 듣고 칩거 생활을 했다. 그는 애써 세자 자리, 권력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혹사하며 살았다. 이런 이방우의 모습에 이방원은 또 한 번 분노했다. 한때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하며 모자간의 정을 쌓았던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배신감이 그의 마음 가득했다.
신덕왕후 강씨는 이런 이방원의 분노가 군사행동으로 이어지길 오히려 기대했다. 이를 통해 이방원을 제거할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그의 수하로 들어온 가별초 군사들은 친위대로 복귀시키면서 자신에 주어진 힘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행동할 때가 아님을 이방원은 인지했다. 배우자 민씨의 조력이 영향을 줬다.
신덕왕후 강씨의 함정은 결국 실패했지만,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의 최측근 인사인 정도전을 보다 더 자신에 가깝게 만들었다.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와 이방원으로 대표하는 다섯 아들과의 갈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미 세자 책봉 과정에서 신덕왕후 강씨에 힘을 실어주고 말았다. 정도전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신덕왕후 강씨와 연결된 인사였다. 그는 세자의 스승으로 현재의 권력뿐만 아니라 차기 권력에서도 그 힘을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한편으로는 치열한 권력투쟁의 가운데 서고 말았다.
이방원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적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한고비는 넘겼지만, 이방원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이방원은 명나라의 사신으로 임명되어 먼 길을 떠나게 됐다. 조선 건국 초기 명나라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명나라 역시 신흥국으로 나라 정비와 국경에 대한 경계를 강화해야 했고 조선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명나라는 아직 그들의 세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요동지역의 여진족 등 이민족과 조선의 유착과 이에 따른 위협을 경계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사대외교를 천명하며 관계 회복을 기대했지만, 명나라는 이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도리어 옛 고려 영토 중 일부를 요구하는가 하면 조선의 새 왕조에 대한 책봉에도 미온적이었다. 이는 조선 외교에 있어 큰 부담이었다. 왕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중국 왕조와의 우호 관계가 필요했다. 또한,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은 선진문물과 기술을 들려오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조선으로서는 명나라와의 관계 회복이 필요했다.
조선은 왕자의 사신 파견을 요구하는 명나라의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이성계는 그 적임자로 이방원을 선택했다. 이방원이 왕자 중 가장 뛰어한 학식과 문신으로서의 역량을 가진 게 큰 이유였다. 하지만 명나라행은 위험을 함께 하는 일이었다. 고려 말기 명나라와의 관계가 불편하던 시절 고려 사신 중 상당수가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길에 오르는 일이 있었다.
이런 위험 외에 명나라행은 귀환까지 수개월 이상의 소요되는 일이기도 했다. 이방원의 명나라 사신 임무는 그를 위험에 빠뜨리기 위한 신덕왕후 강씨의 또 다른 음모이기도 했다. 이성계는 그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이방원 외에 다른 적임자가 없었다. 이성계는 위험한 임무를 맡은 이방원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할 수도 있었지만, 왕과 신하의 관계만으로 그를 대했다. 이방원은 여전히 냉랭한 아버지와의 관계, 위험 가득한 일정에 대해 큰 부담을 안고 명나라로 떠났다.
이 길은 이방원에게는 전화위복이었다. 이방원은 명나라 황제는 물론이고 명나라 권력층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조선과 명나라 외교 관계를 복원하는 성과를 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는 일이 됐다. 이방원은 외교적 성과를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방원의 상황은 나아진 건 아니었다. 이방원은 여전히 버림받은 왕자였고 외교적 성과가 그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높인 건 아니었다. 신덕왕후 강씨의 위치가 공고한 이상 이방원의 움직임에는 큰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세자 외 다른 왕자들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는 왕권 강화를 위해 고려 색채가 가득한 개경을 떠나 새로운 수도인 한양으로의 천도를 시행했다. 여전히 과거 고려 왕실에 대한 향수가 큰 개경은 이성계에서 적당한 수도가 아니었다. 개경을 기반으로 한 구 세력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강했다. 이와 함께 기존 고려 왕실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다수의 왕씨 사람들이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를 통해 고려 왕조 부활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꺾으려 했다. 이와 동시에 조정을 떠나 은거 중인 과거 고려의 관료들을 재 등용해 정부 시스템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렇게 조선 왕조는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권력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마침 권력 투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신덕왕후 강씨가 큰 병이 들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세자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만약, 그가 세상을 떠난다면 세자의 자리가 흔들릴 수 있었다. 이성계의 나이도 노년에 접어든 상황에서 세자를 지켜줄 세력이 절실했다. 신덕왕후 강씨는 정도전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며 그의 사후를 대비했다. 그대로 안심할 수 없었다. 신덕왕후 강씨가 가장 경계하는 이방원이 건재하기 때문이었다.
이방원은 그에게 불리한 권력지형 탓에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있었지만, 미래 권력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그의 배우자 민씨의 가문은 고려 시대부터 막강한 힘을 가진 유력 가문이었고 이방원의 장인 민제를 중심으로 사대부 세력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방원이 군권을 나눠가진 나머지 아들들과 힘을 합한다면 권력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다. 신덕왕후 강씨도 이를 알고 있었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그는 이를 걱정했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제 권력 투쟁에서 이방원이 서서히 그 존재감을 드러낼 시점이 다가왔다. 그를 막을 세력은 이제 정도전 외에는 없다. 권력투쟁은 왕실 내부의 암투에서 왕권과 신권이 대립하는 구도도 변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 사이에서 이성계는 이방원을 더 경계할 수밖에 없고 부자간의 갈등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과 이성계는 부자간이 아닌 구권력과 신권력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하는 운명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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