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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때묻지 않은 자연, 광활한 대지,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땅이다. 그 이면에 심각한 기아와 가난, 내전 등 부정적 이미지도 함께 한다. 이에 더해 여전히 미개하고 문명과 거리가 먼 빈곤의 땅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진다. 이는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으로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인류 문명이 시작된 땅이고 현재 50개국이 넘는 나라에 3,000 민족이 공존하는 다양성의 땅이고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아직 잠재력이 풍부한 가능성의 땅이기도 하다. 지금 아프리카의 상황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들의 침략과 수탈의 산물이기도 하다.

지금 아프리카의 비극적인 상황은 결코 아프리카인들이 게으르고 나약해서 무능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 지금의 아프리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한 보다  폭넓은 고찰이 필요한 이유다. 역사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31회에서 다룬 아프리카 국가인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의 비극이 함축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아프리카 동쪽 해안과 접한 아프리카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점하고 있는 소말리아는 아라비아반도와 인접해 있어 일찍이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있었다. 이에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이슬람 국가이기도 하다.  소말리아는 고대로부터 문명이 존재했다. 기원전 9,000년 경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동굴 벽화가 소말리아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 소말리아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바다 교통로인 수에즈 운하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가 생산되는 홍해의 길목인 아덴만을 면하고 있다. 이에 아덴만 일대에는 다수의 상선과 원유 운반선 등이 오가는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소말리아는 지정학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하지만 소말리아는 30여 년간 지속 중인 내전과 국가 기간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고 국토가 황폐해졌다. 장기간의 무정부 상태는 국가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이런 전쟁의 공포와 위협 속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국가 시스템은 소말리아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내전이 시작된 시점에 심각해진 기아의 빈곤의 문제는 여전하고 대부분 국민들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소말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빈곤 국가 중 하나다. 이를 돕기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도 내전 상황 속에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실정이다. 이에 더해 아덴만을 무대로 다수의 해적이 소말리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소말리아는 해적 국가라는 오명까지 더해졌다. 소말리아 해적 문제는 우리나라 선박이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는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에 소말리아는 우리에게 좋은 이미지의 국가가 아니다. 

이런 소말리아의 상황의 근본 문제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를 기원으로 하는 유럽의 식민 지배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제국주의가 최절정기에 있었던 19세기 후반 아프리카는 서구 열강들이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각축장이었다. 서구 열강들은 그들의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분할 점령했고 영토를 분할했다.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문제는 아프리카의 영토 분할이 과거 역사 문화적 전통과 민족의 분포 등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었다. 이는 지금도 아프리카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내전과 국가 간 갈등과 무력 충돌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소말리아도 다르지 않았다. 소말리아는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되어 지배받았다. 애초 유목국가였던 소말리아는 원치 않게 유럽 3개국이 이들을 지배하면서 종족 간 분열이 심화됐다. 식민 지배자들은 통치의 편의를 위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분열을 조장했다. 이는 향후 소말리아 내전의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적인 흐름 중 하나였던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받은 소말리아는 독립을 위한 노력과 투쟁을 지속했다. 1960년 소말리아는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고 독립국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뿌리 깊은 종족 간 갈등은 국가 통합을 어렵게 했고 정치적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런 국가적 혼란을 틈타 강력한 독재자 시아드 바래가 등장했다. 1969년 그는 대통령 경호원을 매수해 당시 소말리아의 대통령을 시해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이후 그는 1991년까지 22년간 장기 집권했다. 

그는 사회주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고 냉전시대 대외 확장을 노리는 공산주의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는 사회주의 정책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시아드 바레 1인 독재체제였고 자신이 속한 종족을 우대하고 타 종족을 탄압했다. 다수의 타 종족 국민들을 학살하는 등 철권통치를 했다. 특정 종족과 세력의 권력 독점은 내부 갈등을 커지게 했다. 이에 더해 국가 경제마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시아드 바레 정권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시아드 바레는 이런 내부적 문제를 전쟁을 통해 무마하려 했다. 

시아드 바레는 국경 문제로 갈등관계에 있었던 에디오피아를 침공했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있었던 오가덴 전쟁의 시작이었다. 개전 초기 소말리아는 구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 등 군사력의 우위로 전쟁을 주도했다. 과거 소말리아 영토였던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 소련이 소말리아 지원을 끊고 공산화된 에디오피아를 지원하면서 전쟁 양상이 달라졌다. 소련의 대표적 위성 국가인 쿠바군 수만 명이 에디오피아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하면서 소말리아는 수세에 몰렸고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애초부터 무리한 전쟁이었고 그 전쟁마저 패하면서 시아드 바레 정권은 더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시아드 바레 정권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지원 속에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 따른 막대한 비용 부담과 경제 상황 악화, 크게 증가한 외채 등의 문제로 소말리아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이후에도 소말리아 경제는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소련의 해체와 이로 인한 냉전체제의 종결은 소말리아에 큰 악재가 됐다. 미국은 시아드 바레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시아드 바레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다수의 반군들이 소말리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새로운 지도자 아이디드와 강력한 군벌인 마흐드가 중심이 되어 연합한 반군은 1991년 시아드 바레 정권을 무너뜨렸다. 시아드 바레는 소말리아에서 축출됐고 1995년 타국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독재 정권이 몰락했지만, 소말리아의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반군 세력은 분열됐고 그들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내전의 시작이었다.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모가디슈는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하던 당시를 베경으로 하고 있다. 모가디슈는 소말리아의 수도다. 이런 혼란 속에 1991년과 1992년 소말리아는 극심한 가뭄과 기상 이변으로 그들 국가 산업이의 근본이 농업이 파탄 났다. 식량 부족은 극심했고 대부분 국민들의 기아 상태에 빠져들었다. 혼란한 정치 상황과 내전에 기아까지 겹치면서 소말리아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다수의 국민들의 영양실조에 빠졌고 목숨을 잃었다. 소말리아의 비참한 상황은 해외 언론들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구호의 손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각국에서 답지하는 구호품은 무장한 군벌 세력들이 물품을 약탈하는 등 이를 독점했고 구호가 필요한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에 소말리아 국민들의 기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UN이 중심이 되어 평화유지군을 파견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다국적군도 함께 했다. 국제 사회의 개입으로 구호활동이 활발해졌고 소말리아 재건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말리아 국민들에게는 희망적인 일이었지만, 자신들의 영향력과 이권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군벌들에게는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최대 군벌인 아이디는 노골적으로 평화유지군 활동에 반감을 보였고 평화유지군에 무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평화유지군 병사들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국제적인 공분을 불러왔다. 이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했다.

 

소말리아 지도

 


미국은 아이디드를 전쟁 범죄자로 규정하고 특수부대를 파견해 그의 체포를 시도했다. 무력 충돌이 불가피했다.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과 장비를 가지고도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이는 아이디드 군의 저항도 문제였지만, 그들을 가볍게 여긴 미군의 방심도 큰 이유였다. 여기에 군벌들과의 전투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소말리아 국민들 상당수가 미군과 평화유지군에 반감을 가지는 등 현지 여론 악화도 영향을 줬다. 안정적 구호활동과 치안 확보라는 목표를 가지고 진행된 미국의 소말리가 군사 작전은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이런 미국의 실패 후 아이디드는 내전 과정에서 총격을 입고 사망했다. 최대 군벌 지도자의 사망에도 소말리아 내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각 종족별 지역별 군벌들이 세력을 유지한 채 대립했고 무력 충돌이 지속됐다. 1990년대 과도 정부가 구성되는 등 국가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정부가 소말리아 전체는 통제하지 못했고 혼란은 지속됐다. 소말리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놓였다. 

국민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켜야 했다. 이는 미성년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사회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각자 도생이 필수적이었고 힘없는 어린이들은 철저히 소외됐다. 어린이들은 교육의 기회가 전혀 없었고 보호받지 못했다. 상당수 어린이들은 살기 위해 무장단체에 지원했다. 그곳에서는 최소한의 굶주림을 피할 수 있었고 신변의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다. 이에 총기는 소말리아 국민들에게 자신을 지키는 필수품이 됐다. 장기간의 내전과 미소 냉전 기간 유입된 다수의 무기가 넘쳐났고 무기 밀매가 보편화되면서 소말리아에서 총은 누구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이 되고 말았다. 어린이들이 총을 들고 자랑하는 일은 소말라에서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됐다. 

이런 상황은 소말리아에 해적이 창궐하는 원인인 제공했다. 애초 소말리아 해적은 바다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어민들이 자경단에서 시작했다. 소말리아 해역은 예로부터 수산물이 풍부했다. 하지만 무정부 상태가 장기화되면서 다른 나라의 선박들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무단으로 조업하기 시작했고 그 규모가 커졌다. 타국의 선박들은 크고 자동화된 설비로 다량의 어족 자원을 무차별로 남획했다. 가내 어업 수준이었던 소말리아 어민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이에 더해 세계 각국의 위험 폐기물이 소말리아 해역에 버려졌다. 소말리아 정부나 군벌들은 돈을 받고 선진국들의 유독성 폐기물의 해안 투기를 묵인했다. 그 안에는 핵 폐기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화유지군 역시 무단 투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당연히 소말리아 연안의 어장은 황폐해 질수밖에 없었다. 소말리아 어민들의 삶의 터전을 잃었고 생명의 위협마저 받는 처지에 몰렸지만, 국가의 역할은 전혀 없었다. 이에 어민들은 자경단을 조직에 그들의 바다를 지켜야 했다. 

이렇게 시작된 자경단 활동은 점점 해적화됐다. 어장이 망가진 상태에서 어로 행위로는 생계가 어려웠다. 소말리아 앞바다는 지나는 다수의 무역선과 유조선이 타깃이 됐다. 그 배를 장악하고 선원들의 몸값을 요구하는 해적 행위가 수시로 일어났다. 몇몇 성공사례가 나오면서 해적의 수는 크게 증가했다. 삶의 중요한 근간이 농업과 어업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나라에 넘쳐나는 무기는 해적 활동에 유용했다. 

이에 다수의 선박 피랍사건이 소말리에 해역에서 발생했다. 전 세계 해적 사건의 90프로 이상이 이 지역에서 일어난다는 통계도 있었다. 소말리아 해적 문제는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됐다. 해적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이에 포함됐다. 2011년 일어란 삼호 주얼리호 피랍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특수부대는 파견해 해적들을 소탕하고 배와 선원들을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해적들과 함께했던 석해균 선장은 해적들의 총격을 받고 사경을 헤매다 극적으로 회복되기도 했다. 이는 소말리아 해적의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보여줬다. 이 외에도 우리 선박과 선원들이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되는 사건이 수차례 발생했다. 

 

소말리아 국기

 


해적들의 창궐에 세계 각국은 해적 소탕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됐다. 전 세계 해양 물류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에즈 운하와 홍해와 연결된 소말리아 해역에의 해역은 모든 나라에 위협이 되는 일이었다. 이에 국제 연합군이 결성되어 소말리아 해역에서 해적활동을 감시하고 오가는 선박들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청해부대가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 해역을 지나는 선박들도 자체적인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경비 인력을 늘리는 등의 자구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소말리아 해적은 여전히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소말리아 해적은 이제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시스템과 고도화된 장비를 더해 활동하고 있다. 그 안에는 어민들과 군벌, 과거 정부군, 기술자 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대응하지 어려운 존재들이 됐다. 한번 성공하면 막대한 금액을 챙길 수 있는 해적 활동에 대한 유혹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해외 자본이 투자자로 이들을 지원하는 비일비재하다. 소말리아 해적인 사실상 국제적인 산업이 됐다. 심지어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는 항구 도시는 소말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 되고 있다. 이에 소말리아인들 상당수가 이 해적을 꿈꾸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국제 공조 강화와 강력한 무력 대응으로 소말리아 해적 사건의 수는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힘으로 해적 활동을 억제하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무력 대응이 느슨해지는 시점에 해적이 다시 크게 증가할 수 있다. 즉, 소말리아의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사회가 안정되도록 하는 게 급선무다. 이에 UN를 포함한 평화유지군 활동은 소말리아의 정상화에 큰 비중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그 성과로 소말리아는 정부 조직이 갖추어지고 군벌 세력 등 각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무정부 상태가 해결된 건 아니고 국민들의 빈곤 상황도 여전하다. 사회적 불안 요인이 잔존하고 있다. 최근에는 테러 조직들이 소말리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소말리아에 진정한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기에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렇게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의 비극이 함축된 곳이다. 소말리아를 비극의 땅이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 비극의 큰 원인이 외적 요인에 있다. 식민지배가 있었고 냉전 체제 속에 비정상적인 독재정권이 나라를 지배했다. 그 유산은 끝나지 않는 내전을 불러왔다. 이에 국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해야 하고 해적이 되어야 했다.

소말리아의 비극은 이제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또한, 소말리아가 가진 문제가 아프리카 상당수 국가들이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는 문제라는 점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소말리아의 문제는 근. 현대사 속 아프리카에 대한 수탈과 침략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문제의 근원을 살피고 소말리아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


사진 : 프로그램,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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