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세계 역사에서 최악의 독재자로 손꼽히는 인물은 단연 나치 독일을 이끌었던 독재자 히틀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으로 전 세계의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더해 인종주의를 통치 전면에 내세웠다. 나치 독일은 편협한 민족주의에 근거해 아리아인들을 가장 우월한 민족으로 여기고 타 민족에 대한 억압과 탄압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유대인 외에도 유럽 내 소수 민족들은 나치 독일에 큰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유럽은 철저히 파괴됐다.

독일과 동맹 관계에 있었던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한국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수탈을 당했다. 중국은 거의 전역이 전장이 됐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동남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전범국 일본의 만행은 지금도 그 피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과거 그들의 전범국으로서의 역사를 부인하고 왜곡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픔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된 독재가 히틀러에 필적한 독재자가 지금의 러시아에 있었다. 과거 소련의 최고 지도자였던 스탈린이 그 주인공이다. 역사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32회에서는 스탈린의 생애와 그 시대의 중요 사건들을 다뤘다. 

스탈린은 1878년 지금의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제정 러시아의 시대로 유년기 스탈린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고 관련 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창 시절 비밀 독서회 등에서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며 그 이론에 매료됐고 사회주의 운동가 레닌을 동경하고 제정 러시아 타도를 강력한 주장하는 그의 주장과 사상을 지지했다. 급기야 스탈린은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했다.

이후 스탈린은 레닌을 따라 급진파인 볼셰비키 당의 일원이 되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자금 조달책의 역할을 맡았을 시기에는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은행강도 사건을 일으켜 현금을 탈취하는 등의 과격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적극성은 레닌의 신뢰를 얻고 조직 내에서 그의 위상을 점점 점 높이게 했다. 

 

 


1917년 발생한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의 그의 인생에 있어 큰 전환점이었다. 1905년 황제에게 민생고 해결을 청원하기 위한 행진을 유혈 진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 국민들의 황제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 신과 동격이었던 황제는 사라지고 반정부 시위와 노동자들의 파업 등 저항이 지속됐다. 제정 러시아는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힘으로 제압하려고 했다. 유화책으로 의회가 만들어긴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제정 러시아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내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전쟁의 전황은 러시아에 불리하게 진행됐다. 이미 1905년 러. 일 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러시아의 군대는 과거의 강군이 아니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군대는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성과 없는 장기간의 전쟁과 전쟁에 다수의 물자가 투입되면서 국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 기본적이 민생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는 국민들의 대규모 봉기로 이어졌다.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으로 불리는 이 혁명에 사회주의 진영도 참여했다. 이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됐고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을 지속됐고 국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레닌이 이끄는 급진파 볼셰비키 당이 점점 힘을 얻었다. 그들이 중심이 된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는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레닌이 그 정권의 지도자가 됐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후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회주의 정권은 노동자, 농민, 군인들을 위한 정치를 천명했고 그 계급의 대표들이 모인 의회 형식의 의결 기구인 소비에트가 조직됐다. 이와 함께 제정 러시아 시절 각 계층별 호칭은 사라졌다.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동무, 동지가 일상어가 됐다. 이와 함께 소수의 귀족들이나 농장주들 소유의 토지는 농민들에게 분배됐고 자본가들의 공장은 노동자들의 운영의 주체가 됐다. 그 사이 스탈린은 그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중요한 요직에 등용됐다. 이를 통해 스탈린은 당내에서 점점 세력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레닌의 영향력은 컸고 스탈린은 그 그림자 속에 있었다. 

이런 사회 변화는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잃은 과거 귀족, 농장주, 자본가 등의 반혁명 세력은 그들의 힘을 모았고 힘으로 대응했다. 혁명세력과 반혁명 세력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초기 전황은 반혁명 군이 우세했다. 다수의 장교들과 제정러시아 시절 조직된 숙련된 군대에 그들에게 있었다. 여기에 영국 등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제국주의 일본까지 반혁명 세력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혁명군은 점점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고 반혁명 세력을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전쟁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 남부 흑해와 가까운 도시 차리친 전투에서 스탈린은 혁명군을 지휘하며 승리했다. 이는 그의 명성을 러시아 전역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내에서 위상도 한층 높아졌다. 이후 차리친은 스탈린그라드로 그 명칭이 변경되며 스탈린의 업적을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후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수립됐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시작이었다. 최고 수반은 레닌이었지만, 스탈린은 사실상 공산당 서기장에 올라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했다. 사실상 1당 지배체제인 소련에서 공산당 서기장은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레닌이 건강 악화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면서 스탈린은 그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할 수 있었고 국정을 주도했다. 

 

스탈린 초상화 - 픽사베이

 


이에 레닌은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그는 스탈린의 권력 독점의 문제를 경고했고 그의 폭력성과 과격함에 대해 우려했다. 그는 1924년 사망하면서 남긴 유언장에 스탈린에 대한 그의 평가를 그대로 담았다. 레닌은 보다 유능하고 뛰어난 웅변가이자 혁명가인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문제는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비해 당내 지지세가 약하고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레닌이 건강하게 영향력을 유지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지만, 병약한 레닌은 스탈린의 힘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미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에 의해 그의 유언은 무시됐다.

스탈린은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는 레닌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를 미라 상태로 만들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성대한 장례식을 주최하며 후계자의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로서 큰 상징성과 권위를 가진 레닌의 후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최대의 정적이 될 수 있었던 트로츠키는 철저히 소외됐다. 스탈린의 레닌 운구행렬의 가장 앞에 섰던 것에 비해 트로츠키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는 소련 국민들이 그에 대한 신망을 잃게 하는 요인이 됐다. 

트로츠키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주도권을 잡은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실각시켰고 트로츠키는 쫓기는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트로츠키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멕시코에 정착했지만, 1940년 스탈린에 보낸 요원에 의해 암살당하며 생을 마무리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주도했던 혁명가의 비참한 최후였다. 스탈린에 이에 그치지 않고 트로츠키의 부인, 자식, 친인척 측근 인사들과 관계된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고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반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후 스탈린은 소련의 권력을 독점하며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그의 뜻대로 소련을 변화시켰다. 산업 구조를 대대적으로 변경했다. 농업 위주의 산업 구조도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농장들은 국가 주도의 집단 농장 체제로 국유화가 진행됐다.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집단농장에 소속을 강요받았다. 소수 민족들을 강제 이주시켜 집단농장에 포함토록 하기도 했다.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도 그 대상이었다. 다수의 한인들이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삶의 터전을 잃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했다. 최근 국내로 유해가 봉헌된 독립 영웅 홍범도 장군도 이에 포함되어 인생의 말련을 낯선 카자흐스탄에서 보내야 했다. 

이런 강력한 농업 국유화는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농민들은 집단농장 합류를 거부하거나 잡단으로 봉기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그들의 가축 등을 농업 생산에 활용하지 않고 식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따르지 않는 농민들에게는 엄청난 억압을 받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이렇게 국유화된 농업 생산물들은 모두 공업화를 위한 자금으로 활용됐다. 농민들은 극히 일부의 배급만을 받을 수 있었고 생활을 궁급해졌다. 열심히 일해도 나아질 수 없는 삶은 농민들의 노동 의욕을 크게 떨어뜨렸다. 이에 애초 기대와 달리 농업생산성은 향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련은 농업 생산물을 수출품으로 대부분 활용했고 농민들의 삶은 빈곤 상황에 빠졌다. 

1930년 초 홀로도모르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대기근이 발생했지만, 소련 정부는 이에 대한 구호에 소극적이었다. 기아 상태에 빠진 이들의 구호할 식량은 모두 수출됐고 그로 인한 수익은 공업화에 사용됐다. 정부의 미온적 대처 속에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 그 숫자가 수백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계속되는 극심한 기아 상황에서 인육을 섭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일어났다. 어쩌면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이때부터 그 뿌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비참한 상황은 언론 통제로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은 언론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회유하면서 사실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했다. 서방 언론마저 포섭하여 우크라이나 대기근 상항을 왜곡하는 가짜 뉴스를 만들었다. 한편으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선전, 선동이 언론사 지면과 뉴스를 채웠다. 마치 나치 독일의 언론 장악과 통제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농민들과 다수 국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강력한 공업화 정책은 그 차제로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소련은 세계 3대 공업국으로 도약했고 소련은 당시 전 세계에 불어닥친 대공황의 경제 위기속에서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규모 공업지대인 콤비나트가 만들어지고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강력히 시행됐다. 소련은 어느새 엄청난 생산력을 보유한 산업화를 이뤄냈고 각종 사회 인프라가 구축됐다. 이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근거가 됐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 조형물 - 픽사베이



소련이 그 체제를 강화하는 사이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등장했다. 히틀러의 독일은 국가 사회주의 체제인 나치쯤을 중심으로 스탈린 독재체제와 비교되는 히틀러의 독재 체제가 완성됐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으로서 부담하는 막대한 배상금과 각종 제약을 철폐하고 군사 대국화를 시도했다. 무장을 시작한 독일은 군사 강국으로 거듭났다. 독일의 위협은 점점 유럽에 전운을 드리우게 했다. 히틀러의 독일은 소련에 큰 위협이 됐다. 

스탈린은 대외적 위험 요인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활용했다. 스탈린은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비밀 군사조직을 활용해 반 정부 세력과 관련 인사들을 체포하고 처형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국민 간 상호 감시와 신고 체제를 만들어 하루 타인이 고발로 하루아침에 반체제 인사가 되어 체포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전날 누군가를 체포하던 이어 고발되어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말 그대로 누구도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공포의 시대였다. 이는 사회 전반, 계층을 구분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 권력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군대로 해당됐다. 다수의 군 장성과 장교들이 숙청대상이 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일이 됐다. 대숙청기를 거치며 스탈린은 절대 권력자가 됐다.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였다.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은 같은 독재자이면서 강한 라이벌로 자리했다. 히틀러는 강력한 인종주의자였고 소련의 슬라브족과 공산당이 주도하는 사회주의에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며 우호 관계를 형성했다. 양국은 향후 10년간 서로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독일은 동부 유럽에 대한 위협을 줄였고 서유럽 침공에 더 주력할 수 있게 됐다. 소련은 독일의 위협을 해소하고 군사적 경제적으로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독재자들의 상호 이해관계에 따라 속 마음을 숨긴 밀월 관계의 형성이었다. 소련은 이후 독일에 지속적으로 물자를 공급하며 그들의 침략 전쟁을 도왔다. 독일은 그들의 전력을 집중해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대부분을 장악했다. 1940년에 이르러 독일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었다.

독일은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대규모 공습을 단행하는 등 압박했지만, 영국은 항전 의지를 보이며 맞섰다. 정체된 전쟁 상황 속에서 히틀러의 시선은 동부 전선의 소련으로 향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아무 예고 없이 소련과의 국경 전역에서 기습 침공을 감행했다. 독. 소 전쟁의 시작이었다. 소련은 전선의 이상 징후를 사전에 파악했지만, 독일의 전면전에 대비하지 못했다. 군부의 대숙청으로 무너진 군 조직을 완벽히 재건하지 못했고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나치 독일의 침공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잠깐의 밀월 관계를 끝내고 대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나치 독일은 기습전에 성공하며 소련의 서쪽 영토를 장악해 나갔다.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키예프 지역을 향해 진격했다. 초기 전황은 독일에 매우 유리했다. 하지만 전열을 정비한 소련은 서쪽 지역의 생산 시설을 동부로 신속히 이전했고 지구전으로 맞섰다. 스탈린은 독일군이 위협이 현실이 된 모스크바를 지키며 전쟁을 지휘했다. 

히틀러는 빠르게 소련을 굴복시킬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사회주의 소련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 레닌그라드에서는 900여 일의 봉쇄 작전에도 시민들과 군인들이 극한의 상황을 견디며 저항했다. 모스크바 진격도 늦어졌다. 이에 히틀러는 남부 전선에 힘을 집중했다.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와 흑해 유전지대 장악을 목표로 전쟁 전략을 수정했다. 그 길목에 자리한 스탈린그라드는 중요한 전장이 됐다. 스탈린그라드를 장악하며 독일은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가능성이 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그림 - 픽사베이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은 강하게 저항했다.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됐다. 독일군은 시가전을 이겨내며 도시를 장악해 갔지만, 소련은 그 사이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10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해 소련 내부 깊숙이 들어온 독일군은 역포위 했다. 포위된 독일군은 대부분 궤멸되거나 포로가 됐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은 전세를 빠르게 반전시켰고 250만 명의 대군으로 반격했다. 1944년 독일군의 봉쇄에 고립됐던 레닌그라드가 해방됐고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이미 서부전선은 미국의 참전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 성공 이후 서방 세계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독일의 전선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소련군의 기세를 막아내긴 역부족이었다. 나치 독일은 다수의 소년병을 최전선에 투입하는 등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소련군은 연합국 중 가장 먼저 베를린에 진입해 국회의사당을 장악했다. 나치 독일의 패전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시각 지하 벙커에 은신해 있던 히틀러는 그의 애인과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안가 함께 동반 자살을 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최악의 독재자들의 맞선 독. 소 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군인과 민간인 포함 3,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일설에는 1928년생 참전 군인 중 대부분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참혹한 살육전이었다. 소련이 승리하긴 했지만, 국민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국민들의 희생 위에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승전국의 지위를 얻었고 막대한 영토를 추가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 질서를 좌우하는 강대국의 위치를 점했다. 소련을 강대국의 위치에 올려놓은 스탈린은 개인 우상화와 신격화 작업을 하며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는 미. 소가 대립하는 양극체제 냉전 체제의 시작이었다. 이 속에서 한국은 그 대립의 최전선에 있었고 6.25 한국전쟁의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김일성과 함께 6.25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역인 스탈린은 1953년 3월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는 평소 암살과 반란의 위험에 대하 극도로 민감했다. 이에 보안에 극도로 신경을 쓰는 등 신변 안전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뇌출혈로 생명이 위험에 처한 순간 복잡한 비밀 별장의 위치와 구조 탓에 골든 타임에 치료를 받지 못하며 쓸쓸히 최후를 맞이했다. 일설에는 측근에 의한 독살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후 스탈린의 대량 학살과 철권통치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했다. 스탈린 이후 소련의 지도자들에 의해 그의 생애가 격하되기도 했고 스탈린의 철권통치는 언급하기 꺼려지는 역사가 됐다. 민주주의 진영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기만 하다. 

스탈린의 생애는 격변의 시대에 맞닿아 있다. 러시아가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지 않았다면 스탈린의 평범한 신학도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제정 러시아의 후진적 사회 시스템과 부패 등 체제의 한계가 드러나는 과정에서도 러시아는 자체적인 개혁을 하지 못했다. 이는 국민들의 큰 분노를 불러왔고 사회주의 혁명의 원인이 됐다. 이는 레닌 이후 최악의 독재자로 기억되는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시켰다.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뜻에 반하는 반하는 사회 구조는 언젠가 큰 격변 상황에 빠져들 수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레닌 동상 - 픽사베이

 


민주주의 시스템은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인 선거 제도가 있다. 선거를 통해 국민들은 집권 세력을 교체할 수 있고 그때만큼은 국민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사회 여론은 의사결정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고 권력자들과 집권층은 그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가 상호 공전하고 견제하는 삼권 분립의 원칙도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다.

하지만 소련과 스탈린의 사회주의는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용인하고 국가의 정책을 모든 국민에게 강요하는 체제였다.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은 묻히고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권력은 공산당 최고 지도자에게 집중됐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지도자는 반대파를 힘으로 제압하고 탄압했고 종신 권력을 유지했다. 애초 노동자, 농민, 군인 등 사회 약자들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주의 본래 이념과 가치는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사회주의 소련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들의 체제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만 했다. 이런 체제 경쟁 속에서 소련의 사회주의는 한계에 봉착했고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1991년 12월 소련은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코르바초프는 개혁, 개방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며 기울어가는 소련을 되살리려 했지만, 공산당 내 보수파의 쿠데타로 실각의 위기에 몰렸고 그 쿠데타가 국민들의 반발에 실패하면서 소련 연방 영역에 있던 국가들의 독립 러시가 이어지면서 더는 소련을 지켜낼 수 없었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 후 시작된 미. 소 냉전은 종말을 고하게 됐다. 

스탈린은 몰락한 사회주의 소련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를 변질시키고 권력을 국민이 아닌 자신의 독점했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의 통치 기간 중요한 가치인 인권이 유린되는 일이 무수히 많았고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을 정당화했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스탈린과 그의 쌍벽을 이루는 최악의 독재가 히틀러는 이제 세상에 업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는 민주주의 가치를 파괴하는 독재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런 독재의 역사가 얼마 전까지 있었다. 국민들의 힘으로 이를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지만, 민주주의는 계속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특정 세력, 특정 계층들이 만들어낸 강력한 카르텔은 국민의 뜻이 아닌 그들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국민들이 항상 정치와 사회 흐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재는 국민들의 무관심을 먹고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