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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마지막 왕조였던 조선시대의 역사는 1592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가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다. 그만큼 임진왜란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임진왜란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다. 전 국토는 황폐화됐다. 산업의 근간인 농업을 지탱하는 농토의 피해는 극심했다. 그때의 피해는 조선 후기에 복구되지 못했다. 

또한, 전란의 와중에 조선의 사회 시스템 전반이 파괴되고 전후 수습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에 16세기와 17세기 소빙기라 불릴 정도로 이상 저온 현상으로 대표되는 이상 기후는 농업생산을 더 위축시키고 식량난을 불러왔다. 전쟁과 이상기후는 일반 백성들의 삶을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기아와 질병이 창궐하고 기상 이변으로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도탄에 빠진 민생 문제를 해결한 집권층의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한계가 있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더 큰 힘을 쏟았다.

신분제 질서를 더 공고히 하고 한층 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실생활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유교적 예법이 강조됐다. 그 예법에 부응하는 제사나 차례 등 형식적인 면이 중요한 덕목이 됐다. 조선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인 성리학은 실생활과 멀어지고 관념화됐다. 일반 백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더 가지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졌다. 남.녀간의 차이는 더 강력한 차별로 변질됐다.

이렇게 공고해진 기득권 세력의 카르텔은 근본적인 변화를 목소리를 차단했다. 보통의 나라라면 혁명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하나 된 힘으로 결집되진 않았다. 조선의 집권층은 교묘히 그 위기를 극복했다. 그렇게 양반 사대부 중심의 사회구조는 유지됐지만, 그 사회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거부하고 중국 중심의 편협한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 사이 세계는 대항해 시대와 산업혁명의 과정을 거친 유럽이 흐름을 주도하고 엄청난 문명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조선은 그런 변화를 외면했다. 그 댓가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결말로 연결됐다. 

 

 



이 점에서 임진왜란은 너무 아픈 역사였다. 그리고 그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역인 일본의 정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최악의 빌런이고 악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다. 임진왜란의 배경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그가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개인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을 목표로 조선을 침략했다고 우리는 역사서를 통해 배웠다.

하지만 도요토미 개인에 대해서는 그 정보가 부족함이 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임진왜란 전후 일본의 상황과 중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두 인물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일본의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1467년부터 1603년까지 일본은 각 지역 군벌들이 세력 대결을 펼친 전국시대였다. 그 시대 일본의 왕은 실권을 잃었고 중앙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에 각 지역의 영주인 다이묘들이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이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권모술수와 배신의 역사가 쌓이고 또 쌓였다. 당연히 막대한 인명 피해가 뒤따랐다. 이 과정에서 힘을 가진 무사들이 득세했다. 무사의 시대였다. 

이 혼란기에 3인의 강력한 권력자가 등장했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무장 출신의 오다 노부나가,  명문가 출신의 세력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평민 출신에서 올라와 최상위 권력층으로 올라선 자수성가 형의 실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들이었다. 이들 3인의 관계에서 오다는 패권을 장악한 인물로 가장 위 순위를 점하고 있었고 도요토미는 그의 수하에 있었다. 

도요토미는 어린 시절 오다의 가신으로 들어와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충성심을 발휘했고 오다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점차 하급 군인에서 공을 세워 장군으로 올라섰다. 도요토미는 강력한 무술 실력이나 힘을 가진 무사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지략과 임기응변 능력을 바탕으로 그 세력을 키웠다. 평민 출신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도요토미를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뛰어난 생존 본능은 그를 지략가로 만들었다. 이에 비해 도쿠가와는 명문 가문 출신에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로 도요토미와 큰 대조를 보였다. 이런 배경 탓에 도요토미는 도쿠가와에 다소 밀리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난 사건이 발생했다. 1582년 일본 최고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가 내부 반란으로 사망했다. 일본 역사에서는 혼노지의 변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도요토미에게는 기회로 다가왔다. 당시 도요토미는 오다의 명에 따라 관서 지역의 정벌에 나선 상황이었다. 오다의 사망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도요토미는 이 사건이 그가 2인자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도요토미의 군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군에 반란군을 제압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도요토미가 최고 권력자가 된 순간이었다. 

그 시점에 도쿠가와는 신중함을 유지했다. 이는 도요토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말았다. 도요토미의 과감함은 그를 전국시대를 주도하는 인물로 만들었다. 도쿠가와의 신중함과 기다림은 자신에서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이후 도요토미는 오사카성을 축조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도요토미는 각 지역의 영주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정했고 일본 전체를 통일시켜 나갔다. 하지만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는 도요토미에 큰 고민거리였다. 도쿠가와의 무너뜨리거나 그의 수하로 만들지 못한다면 도요토미의 권력을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과거 주군이었던 오다의 비참한 최후를 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결국,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세력을 군사적으로 맞섰다. 도요토미가 우세한 전력이었지만, 도쿠가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누구도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 관계가 지속됐다. 이런 양측의 대결은 서로에게 부담이었다. 주변의 영주들이 그들의 배후를 공격할 수도 있었고 긴 전쟁은 양측 모두에 힘을 약화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도요토미는 적극적인 유화책으로 도쿠가와를 회유했다. 심지어 도요토미는 자신의 결혼한 누이동생을 이혼시켜 도쿠가와와 혼인하도록 하는가 하면 그의 어머니도 사실상의 볼모로 도쿠가와에 보냈다. 이런 도요토미의 적극적인 포용책은 도쿠가와를 움직였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에 충성을 맹세하여 그의 수하로 들어왔다. 완벽한 군신의 관계가 아닌 동맹의 관계였지만, 일본 최고 실력자를 자신의 세력 안으로 포함시킨 도요토미의 위상은 한층 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도요토미는 일본을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됐다. 

이렇게 일본의 전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긴 전쟁을 거치면서 세력이 커진 무사 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워야 했고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주들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도요토미는 외국으로 눈을 돌렸다. 교역과 통상 확대를 넘어 정복을 꿈꾸기 시작했다. 도요토미는 오랜 전쟁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예 군사들이 있었고 그 군대에는 서양과의 교역을 통해 확보한 조총이라는 신무기도 있었다. 이런 결집된 군사력은 조선 침략으로 이어졌다. 이는 조선의 역사의 큰 비극인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오사카성 - 픽사베이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당했다. 이순신 등 영웅의 등장과 의병들의 항전, 명나라의 참전 등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의 여파는 명나라에게 영향을 줬고 얼마 안가 만주에서 일어난 신흥 국가 후금이 등장했고 후금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를 열었다. 임진왜란은 동북아 국제 정제의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즉, 일본 전국시대의 종말과 통일이 불러온 사건이기도 했다.

조선이 당시 일본의 상황을 잘 읽고 방비했다면 임진왜란의 상황을 크게 달라지게 할 수 있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도요토미가 아닌 다른 인물이 일본을 통일했다면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 정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하게 된다. 

이런 변화의 중심이 된 인물인 도요토미였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종료되는 시점에 사망했다. 이후 일본은 다시 혼돈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 시기를 정리한 건 도쿠가와였다. 그는 임진왜란에 참전하기 않고 때를 기다렸다. 다수의 영주들의 긴 전쟁으로 힘을 소진한  상황에서 도쿠가와는 아껴둔 힘으로 혼란의 상황을 정리하고 최고 실력자로 올라섰다. 그는 이후 에도 막부 시대를 열었고 이 시기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까지 수백 년간 일본의 정치 체제로 유지됐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은 도쿠가와였다.

전국시대 마지막 3인의 실력자 중 최후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이런 일본 전국시대 패권 다툼의 과정은 지금도 드라마와 영화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했다 사라지고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주변국들 특히, 조선에는 최악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 역사가 결코 세계사와 분리되지 않고 항상 연결되고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일본이 여전히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잘못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는 상황이고 현재도 불편한 관계가 지속 중이지만, 그들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대를 잘 알아야 대비할 할 수 있고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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