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우리 민족은 두 차례 큰 전란을 겪었다. 1592년부터 1598년에 거쳐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 1636년 청나라의 침략으로 일어난 병자호란이 있다. 두 전란은 조선에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임진왜란은 병자호란과 달리 전 국토가 전장이었고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다.
그 영향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눌 정도다. 그만큼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의 사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다만, 그 변화는 전란을 통해 교훈을 얻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방향이 아닌 기득권 세력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쪽으로 왜곡되어 전개됐다. 그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더 극심해졌다. 지배층의 수구화는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은 변화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이었고 서양의 동양 침탈이 본격화하는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조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뒤처지게 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그 임진왜란의 과정에서 많은 영웅들이 등장했다. 이 중에는 역사서에 남는 인물도 있었지만, 외적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이름 모를 의병들과 군사가 되어 침략군에 맞서 싸운 수많은 백성들도 있었다. 백성들의 의지는 무능하고 심지어 비겁하기까지 했던 집권층을 대신해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그 영웅들 중 가장 으뜸은 이순신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었고 단 한 번의 패전도 없이 일본 수군을 물리쳤고 남해바다의 재해권을 장악했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극심한 붕당의 대립과 부조리가 만연한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에 편승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무과에 합격해 무장이 되었음에도 승진이 느렸다. 이런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본 임진왜란 당시 명재상인 류성룡의 천거로 그는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어 그 뜻을 펼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군 기강을 바로잡고 임진왜란 발생 전 수군을 양성하고 거북선 등 신 무기를 만드는 등 전란에 대비했다. 그런 대비는 수군의 승리로 연결됐다. 남해바다의 재해권을 장악한 조선은 일본의 수륙 병진 작전을 막아낼 수 있었다. 중요한 곡창 지대인 호남을 지킬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이 초반 열세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순신은 장군으로서 전쟁 영웅이기도 했지만, 문과 무를 겸비한 인물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한, 역사의 기록자였다. 그가 임진왜란 기간 일기 형식으로 적은 난중일기는 당시 전생 상황과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사료로 남아있다.
이렇게 우리 역사의 영웅으로 남아있는 이순신이었지만, 1597년 그 해는 그에게 고통과 아픔의 시간이었다. 전란을 극복한 영웅인 그였지만, 당시 기록에는 그의 인간적 고뇌가 가득했다. 그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1597년은 이순신에게는 죽음을 생각하게 할 정도의 시간이었다.
임진왜란은 7년 내내 전투가 벌어진 건 아니었다. 일본군의 전격 침략과 북진, 명나라의 파병과 조선군의 반격 과정에서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밀려나 대치했다. 그 사이 조선의 의도와 달리 명나라와 일본 사이 강화협상이 지속됐다. 하지만 일본의 실력자 도요토미의 무리한 조건으로 인해 협상은 진전이 없었고 지루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이순신의 수군 역시 강화협상 과정에서 일본군과 교전이 크게 제한됐다. 그전 한산도 대첩에서 크게 패하면 이순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힘을 확인한 일본군은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해전 자체를 회피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까지 진출하여 적선을 섬멸하기도 했다.
일본군에게는 이순신의 수군이 재 침략의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명나라와 일본군의 강화협상은 결렬됐고 일본군은 1597년 8월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두 번째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은 조선을 굴복시키고 했던 이전과 달리 약탈적 성격이 강했다. 일본군은 주로 남부 지방 침략을 집중했고 각종 문화재와 도자기 등 물적 수탈과 함께 수많은 조선인을 납치해 국제 노예상에게 판매하는 등 인적, 물적 수탈에 집중했다. 그 결과 다수의 문화재와 서적이 약탈됐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성리학과 도자기 기술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문화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전쟁을 위해 일본은 정보전을 통해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다. 일본군은 본래 앙숙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인 고니시와 가토의 관계를 이용했다. 고니시 측에서 조선 조정에 가토의 부산 상륙 일정을 흘렸다. 조선군이 사전에 가토를 해상에서 제거하라는 뜻이었지만, 적의 정보를 믿고 군사를 움직이긴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고니시의 가토의 관계를 등을 고려할 때 정보의 신빙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선조 임금은 이순신에게 부산으로의 출전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고민했다. 적의 정보를 믿는다는 것 자체도 석연치 않았고 부산은 조선군에는 매우 불리한 지역이었다. 만약, 적의 함정이라면 조선 수군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이런 이순신을 선조 임금은 강하게 불신했다.
이미 이순신이 승전을 거듭하고 그 명성을 쌓아가는 시점부터 선조는 이순신을 경계했다. 자칫 그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 수도 있고 신뢰가 땅에 떨어진 왕의 권위를 능가하는 인물의 등장에 개인적인 질투심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각종 기록에서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전쟁 기간 긍정에서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자신의 출전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점은 선조를 분노하게 했다.
결국, 이순신은 항명 등을 이유로 파면되고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됐다. 그는 그곳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왕명을 어겼다는 건 역적의 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고 이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런 이순신을 구명할 이도 없었다. 그를 천거하고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던 재상 류성룡도 이순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탁을 포함한 몇몇 대신들의 적극 구명으로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건졌고 모드 관직을 잃고 백의종군하게 됐다.
이순신에게 그동안의 전쟁에서의 공적은 모두 사라지고 죄인의 신분만 남았다. 그는 육군과 수군을 총괄하는 도원수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복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에게는 큰 좌절의 시간이었다. 목숨을 다해 전장에서 싸운 그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여기에 고문의 후유증이 더해지며 그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이런 그를 더 좌절하게 만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순신의 모친이 그의 투옥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로 한양으로 향하던 중 별세했다는 부고가 전해졌다. 이순신에게 어머니는 각별한 존재였다. 어려서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형제들도 세상을 떠나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이순신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혈육이었다. 어머니는 이순신에게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이런 어머니의 별세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죽음의 위기에 놓인 아들을 만나기 위해 나선 길에 객사했다는 소식은 이순신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가 투옥되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먼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있었다. 이순신으로서는 자책의 마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이순신은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죄인의 신분이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슬픔의 감정은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슬픔을 뒤로하고 다시 전장에 나선 이순신에서 또 한 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 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전량 해전에서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원균은 삼도 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른 후 조정의 출전 명령이 무리한 명령임을 인지했다. 원균은 출전을 차일피일 미뤘지만, 조정의 계속된 압력에 출전은 강행했고 이는 큰 패배로 연결됐다.
칠전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은 12척의 판옥선만을 남기도 전 함선이 파괴되고 이순신이 조선 수군 대부분도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원균 역시 전투 중 전사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그토록 원했던 바다의 재해권을 확보했다. 일본군은 거침없이 호남지역에 진출할 수 있었고 육군과 수군의 동시 진격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이는 한양을 빠르게 공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순신에서 조선 수군은 자신의 역량을 모두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해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던 거북선과 함선의 파괴 외에 숙련된 병사들을 대부분 잃었다는 사실이 더 큰 아픔이었다. 이는 그의 신체 일부가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좌절만 할 수 없었다. 조선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선조 임금은 친히 교지를 내렸다. 그 교지에는 선조의 자책과 회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그렇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지만, 이순신에게 남은 건 육군에서 편입한 약간의 병사와 12척의 함선 정도였다. 수군을 새롭게 편성하고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일본군의 재침이 본격화된 시점에 수군의 근거지 마저 위협받는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런 상황을 고려해 이순신에게 육군에 합류한 것으로 명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장계를 통해 수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자신이 목숨을 다해 바다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 유명한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는 말이 여기서 등장한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병력과 함선, 여기에 큰 패배 이후 조선 수군에 퍼진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까지 이순신이 극복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이순신은 강한 군율로 내부의 동요를 잠재우는 한편, 해남과 진도 사이에 빠른 물살이 흐르는 울돌목, 명량을 일본군의 해상 진출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로 정하고 이곳에서 적선을 맞이해다. 조선 수군은 추후 건조한 한 척을 포함해 13척의 함선으로 일본군을 맞이했다. 초기 이순신은 두려움에 나서지 못하는 다른 함선을 대신해 대장선을 이끌고 홀로 고군분투했다.
적선은 모두 130여 척에 이르렀지만, 그들 역시 이순신을 두려워했고 이순신은 좁은 수로를 이용해 적선을 각개 격파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순신의 분전에 다른 장수들의 배가 하나 둘 가세하며 전투 양상이 변했다. 그 사이 물살이 방향이 바뀌면서 조선 수군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순신의 수군은 앞선 화포와 해류 등을 이용해 절대 불리한 상항은 극복하고 대승을 거뒀다. 명량해전의 결과였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다시 재해권을 확보했고 일본군의 진격도 주춤하게 됐다. 정유재란의 양상도 일본군의 공세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공세로 전환됐다.
이순신의 기적과도 같은 승전은 또다시 큰 슬픔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순신에게 거듭 패퇴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이순신의 고향인 충남 아산지역을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이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아들의 사망은 이순신에게는 그 어떤 일보다 큰 고통이었다. 전쟁 중인 탓에 아들의 장례조차 자신이 치를 수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애통한 마음을 난중일기에 적을 뿐이었다. 그는 수군을 이끄는 장군으로 자식 잃은 고통과 슬픔조차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는 글을 통해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삭여야 했다.
이렇게 1597년 인간 이순신에게는 너무 긴 한 해였다.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한 그 1년이 이순신에게는 100년과도 같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도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이끄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도 홀로 감내해야 했다. 그에게는 나라가 우선이었다. 적을 물리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 그는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인간적인 고뇌가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도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마지막까지 전장을 지켰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너무나 극적인 최후였다. 그 때문에 그의 마지막 전투에서의 전사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기대 섞인 스토리가 지지를 받기도 한다. 그의 전사가 그만큼 애통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치 상황과 선조 임금의 형태는 이순신이 영웅으로만 남아있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생기게 한다. 이순신의 전사는 어쩌면 그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최후에 대한 의문을 떠나 이순신이 영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낸 그의 스토리가 더해져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597년 이순신의 1년은 다시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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